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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와 동해 The Review of Isabu and East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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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호 (2010년 12월) 5

<논문>

1.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이사부 장군은 512년에 전선에 목사자를 실은 무력의 행사 수단에 의해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을 정복했다. 동 정복의 결과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즉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권원이 512년에 확립되게 되었다. 고대법상 정복은 영토취득의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고대법이 국가에게 정복에 의한 영토취득을 허용하고 그 시기에 국가에게 전쟁권 수행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아니었냐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무력의 행사를 금지한 현대 국제법상으로 정복은 침략행위를 구성하고 위법하며 영토취득을 위한 타당한 권원을 보장할 수 없다. “국제연합 현장”제2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국가의 전쟁수행권과 영토의 취득을 위한 정복권이 제한된다. 영토취득을 규율하는 국제법의 규칙은 수세기 동안 변천되어 왔다. 한편으로, 분쟁에 있어서 문제의 주장과 사태는 그것이 오늘 존재하는 조건과 규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취득된 때에 존재하는 조건과 규칙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국제법은 소급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다. 상기 결과에 따라 독도의 영토주권에 관해 우리 정부당국에 의해 기획되는 기본정책과 역사학자에 의해 수집되는 기본연구는 512년의 역사적 권원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권원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같은 현대국제 법상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하는 것이 요구된다.
8,000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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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시대의 군사활동이나 방어에 있어서 성곽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攻城이나 守城戰이라는 것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이 상시화된 삼국시대의 경우 수많은 성곽이 건설되고 또 폐기되었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유적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유적도 있고 또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만 그 위치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러 史書에 기록되어 있거나 유적으로 남아있는 삼척지역의 성곽과 수군 유적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국 시대 신라의 여러 군사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연구하였다.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10개의 城址 가운데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갈야산성, 옥원성, 호산리성지, 광태리고성, 맹방고성 정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성터로 자리잡 았던 곳이라 여겨지며 결과적으로 신라의 북방 진출이나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오화리산성은 신라의 삼척 점거 초기에 조성된 산성이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여겨지며, 古代 삼척군의 領縣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호산리성지(혹은 옥원성지), 광태리고성(혹은 맹방고성) 은 小據點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갈야산성 성벽하부에서 신라고분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갈야산성도 신라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 시기는 오화리산성 보다는 후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신라는 일찍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박 운영 제도를 확립하였고, ‘船府’라는 관 청을 두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규모의 수군과 병선제조 능력,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신라의 북상과 함께 동해안 곳곳의 주요 요충지가 신라 선박의 기항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와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하여 가장 중요한 기항지였다고 여겨진다. 異斯夫가 우산국 정벌을 앞두고 하슬라군주로 임명된 사실을 중시하여 이사부 가 통제하던 신라군이 모두 하슬라(강릉)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가서 우산국 정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史料도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래 하슬라(강릉)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실직주’라는 명칭하에 관리되고 있었던 것을 州의 명칭과 그 중심지를 하슬라 지역으로 바꾸어 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직군주를 지내면서 건설해 놓은 군사거점을 옮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으면서도 지방 주둔 신라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단인 停(悉直停)을 곧바로 하슬라로 옮기지 않고 하서정을 무열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강릉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척에 상당기간 주둔하며 육성한 수군을 우산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목전에 두고 군주의 이동과 함께 완전히 이전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우산국으로 향하기 훨씬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삼척지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군주 명칭이 바뀌었다고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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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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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는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접점에 있으며 우리민족이 활동한 역사활동의 터는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의 해양이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지닌 곳이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접변지역은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해는 남해나 황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역사의 중심부에서 멀었으며 주체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는 일본열도 진출의 거점으로 중요한 측면이 있었으며, 신라에게는 해양진출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 및 방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신라는 소위 海陸政策을 추진하면서 동해 중부지역 및 해역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거점도시의 육성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삼척 및 강릉지역을 중요하게 여겨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세력들과 갈등을 벌이면서 자기 세력권하의 거점도시로 육성 하였다. 삼척지역은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상과 경제적 측면, 신앙 기능 등은 물론이고, 항구, 방어체제, 교통망 등의 도시구조면에서도‘海港都市’의 성격과 범주에 적합했다. 신라는 국가정책과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서 우산국을 복속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신라군이 동해를 횡단하여 독립적인 해상왕국을 공격하 고, 승리를 거두려면 강력한 해양력과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훈련된 수군병력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장기간에 걸친 전쟁준비를 추진하는 능력을 갖춘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고, 또한 대군이 발진하는 장소인 軍港의 선정과 활용은 절대적이다. 본고는 삼척이 해항도시 및 군항으로서 타당성이 높은가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에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척은 김이사부 선단의 발진기지와 군항으로서 필요한 조건들을 갖추었으며, 동해중부지역에서는 실제 출항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벌어진 전쟁의 중요도와 규모와 작전의 성격 등을 고려하고, 동해중부지역의 자연환경 및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삼척지역 만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삼척을 주력발진기지로 삼으면서 북쪽의 강릉지역 및 남쪽의 울진 등과 유기적인 연합체제를 갖추면서 역할분담을 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11,300원

<논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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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신라장군 이사부의 동해안 출항지가 새로운 논점으로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강릉출항설’과 ‘삼척출항설’이 대두되고 있다. 본 연구는 우산국을 복속한 이사부의 동해안 출항지에 대한 실체적 규명의 필요성이 시급히 요구됨에 따라, 이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방안의 일환으로서 강원 영동지방의 강릉․동해․삼척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제한하여 역사고고유적을 바탕으로 접근해 보았다. ‘강릉출항설’에 대한 검토 결과, 안목항(지금의 강릉항)은 남대천 하구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암석해안으로 구성된 규모가 매우 작은 포구이기 때문에 대규모 兵 船의 출입에는 매우 부적합한 장소로 판단된다. 또한 남대천 하류역의 일대는 주변이 모두 사구지대와 저습지로 형성된 관계로 당시 하천의 정확한 고환경을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생각된다. ‘삼척출항설’에 대한 검토 결과, 오십천 하구와 하구 남쪽에 접한 오화리산성의 구조와 지리적 입지, 산성내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에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대체로 삼국시대 5C ~ 7C대의 신라고분들이 군집을 이루고, 據點城 내지 治所 城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지역은 영동지방에서 비교적 큰 하천에 속하는 강릉 연곡천ㆍ남대천ㆍ군선천ㆍ주수천 일대, 동해 전천 일대, 삼척 오십천ㆍ마읍천ㆍ가곡천 (호산천 포함) 일대로 파악된다. 신라가 동해안 지역 중에서 가장 먼저 삼척에 군사적 전진기기의 성격을 띠는 州를 설치한 것은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동해 연안해로(해상교통로)를 독점적으로 확보 ․ 지배하여 동해안 영동지방의 진출과 북방교역의 전진기지로서 最適地가 바로 삼척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실직지원에서의 말갈세력 격파, 실직원에서의 고구려변장 살해, 실직성의 습격, 니하성 축성 등 일련의 기사를 통해서 泥河가 고구려와 말갈세력의 주요한 삼척 침입루트로 파악되며, 실직성 습격에 따른 니하성의 축조는 실직성(삼척)의 지정학적 중요성, 즉 해상루트와 관련된 핵심적인 전진기지로서 신라나 고구려 입장에서 모두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이해된다. 이사부 출항지 문제해결과 관련하여 필수적인 요건으로서 대규모의 신라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넓은 자연항포구와 그에 수반되는 군시시설로서 성곽의 존재성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수군 기능과 관련하여 신라군사가 주둔했던 신라성곽들을 제시해 보았다. 그 가운데서 하천의 하구에 가장 가까이에 소재하는 오화 리산성이 입지와 규모면에서 볼 때 예국고성을 제외한 다른 산성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압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산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삼척 오십천 하구 그리고 그에 접해 있는 오화리산성이 이사부가 우산국 정복을 위해 출항했던 당시 출항지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항포구와 유적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14,000원

<논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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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지방은 삼국시대 때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던 지역으로 동해안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동해안 지역의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영동지방은 5세기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로 남아 있다가, 6세기에 들어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는 신라가 바다 건너 우산국의 복속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2012년은 신라의 이사부가 한반도 동해안 지역에서 출항하여 우산국을 한반도의 역사로 편입한지 1,500년이 되는 해로, 역사서에 기록된 문자의 기록을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그 실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항하였던 출항지를 분석하기 위해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 울진군의 과거 및 현재의 항포구를 대상으로 자연환경 및 GIS 입지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출항지를 분석하였다.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출항지의 정확한 항만입지를 분석하기 위해 기존 연구자들의 해수면 복원 자료를 중심으로 6세기(512년)경의 해수면을 복원하였다. 연구자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복원결과 6세기경의 해수면은 현재의 해수면보다 약 1.1m 높았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둘째, GIS를 이용한 출항지 입지분석을 위해 삼척 지역의 일반적인 지질·지형 관련 자연환경을 조사하였다. 또한 한국수산지 및 고문헌에 나타난 과거 군사관련 진(津)과 포구가 입지하였던 곳을 지도화하였으며, 최근의 항포구 등도 지도화하여 GIS 분석의 기초자료로 이용하였다. 특히, 항포구의 자연환경 분석을 통해 항 포구의 자연환경 특색을 분석하였다. 셋째, 출항지가 위치할 수 있는 입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GIS기법을 이용하여 울릉도와 동해안의 실거리 최단거리 및 동위도상 최단거리 분석을 실시 하고 버퍼링 분석 및 중첩분석, 지형경사분석을 하였다. 분석결과 덕산항, 궁촌항, 장호항, 임원항, 삼척항, 초곡항, 신남항, 호산항, 작진항, 노곡항, 비화항, 고포항, 광진항, 후진항, 월천항, 용화항, 갈남항 등 총 17개소의 항구가 최단거리 및 동위 도상 최단거리 분석에 의한 입지요인을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문헌에 기록된 진·포구는 정라진, 오분진, 후진, 광진, 고포, 노곡진, 월천진, 재산, 부호 진, 작진, 임원진, 덕산진, 부남, 대진, 신남진, 장호진, 갈산진, 초곡진, 원평, 추천 진, 분토진 등 총 21개소의 진·포구가 최단거리 및 동위도상 최단거리 분석에 의한 입지요인을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항포구를 대상으로 경사분 석한 결과, 정라진, 오분진, 고포, 월천진, 임원진, 부남, 신남진, 장호진, 갈산진, 원평, 분토진 등 11개소가 경사 5°미만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으며, 배후지의 면적이 100ha 이상인 곳은 부남, 월천진, 정라진, 오분진, 원평 등 5개 소였으며, 100ha에 육박하는 곳은 임원진과 고포 2개소로 분석되었다. 넷째, GIS기법에 의해 분석되어진 출항지 후보지와 강릉지역에 위치한 안인진에 대한 3차원 정보 분석을 통하여 가시권 분석을 실시하였다. 3차원 정보 분석을 통한 가시권 분석은 고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이를 위해 후보지의 배후산지 중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분석에 사용된 봉우리는 안인진 월대산 (해발고도 68m), 정라진 봉황산(148.8m), 오분진 고산성(90m), 고포 태봉산(150m), 부남 무명봉(163m), 월천진 무명봉(160.3m), 원평 무명봉(99m), 임원진 무명봉 (141.1m) 등 8개소이다. 분석결과 안인진의 월대산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에서 울릉도의 육안관측이 산술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사부 출항지 규명을 위한 종합분석결과, 울릉도의 육안관측이 가 능하고, 경사가 완만한 넓은 배후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울릉도와의 거리가 가까운 곳은 거의 대부분 삼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출항지는 이러한 요인들을 포함하여 대규모 군진이나 행정관청이 위치한 지역적 요인과 피항 및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수군진이 위치하였던 정라·오분진 지역이 6세기 울릉도를 복속하기 위 해 이사부 장군이 출항했을 가능성이 높은 출항지로 판단된다.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