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복속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는 출항 할 때 어떤 종교 의식을 행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기사는 없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금석문이나 자료들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종교 의식을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알기 위하여 본문에서 동해에서의 신앙 전통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시대별로 정리하였고, 현재의 민간신앙 전통에 대하여 폭넓게 살펴보았다. 그 결과 東海를 배경으로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또는 바다로부터 올 수 있는 나쁜 액살을 막기 위해 신라 이래 고려와 조선시대에 東海에서 용왕 을 주요 신령으로 모셔서 제사를 지냈다는 각종 기록이나 설화는 매우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재 동해안에서의 민간신앙 전통에도 영향을 미쳐 마을 단위 제의에서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삼척과 울진을 비롯하여 울릉도에서도 하위 제차로 용왕제를 지내고 있음을 폭넓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사부 장군의 출항지로 여겨지는 오십천 하구의 사직동 서낭당에서 모시는 신령은 성황ㆍ토지신과 함께 용왕을 위패 형태로 모시고 있으며, 인근의 근덕 덕산 서낭당에서도 용왕을 모신다. 이를 통해 동해안에서 용왕을 모신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그 형식은 산신이나 성황신을 협시하는 형태로 모시거나, 마을 고사를 지낼 때 하위 제차로 용왕제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 복속을 위한 작전에서의 안전과 승리를 위해 행하였을 종교의례에서 상당신으로 天神이나 山神 등을 모셨고,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하위 제차에서 용왕을 모신 용왕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흔히 512년 이후에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산국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만약 신라의 땅이 되었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의 땅으로 울릉도나 독도, 아니면 우산국의 기록이 나와야만 한다. 도리어 울릉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땅이 분명한 이상 우산국 성립부터 한국사의 영역 속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탐라국․우산국․가야 등의 역 사를 포괄하는 고대사를 그려내야 할 시점이다. 우산국이 강성해지자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우산국이 아슬라주와 실직주 등이 침범함으로써 신라지역이 큰 피해를 입음으로써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지증왕으로서는 동해안 제해권을 확보하지 않는 한 삼척, 강릉 등의 지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 결국 우산국의 정벌에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지증왕대의 우산국 정벌은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대에 이르러 함경도지역까지 진출하는 교두보의 확보라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동해안 지역의 경제력 확보, 제해권의 확보를 통해 고구려에 대한 서해안과 동해안의 양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라에 귀복하여 신라와 연합 동맹을 구축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복속국가로 존재하면서 보다 높은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우산국체제는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 시대까지 이어졌다. 11세기 초반의 동여진 해적들이 동해안을 통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동여진 해적의 내침을 막는 것이 심각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한 군사 정책을 수립하며 동해안 방면 축성과 수군, 함대 배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종 3년 이후 고려 침공에 어려움을 겪은 동여진 해적들은 이후 공격 목표를 현종 9년~13년까지 우산국, 일본으로 돌려 많은 피해를 입힌다. 동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우산국은 더 이상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주민의 대다수가 고려에 망명하여 고려 군현에 편적될 정도였고, 농기구의 지원의 명목이지만 고려의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우산국’이란 명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중·근세 삼척은 대관령을 넘어 한반도 중부 지역과 통하는 도로망과 동해안의 해안 도로를 따로 한반도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망, 그리고 바닷길의 해운 교통을 통해서 삼척 이외의 지역과 인적·물적 교류를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척은 신라가 지증왕 때 동해안을 따라 도로를 만들면서 일찍이 주를 두었고, 이곳에 이사부를 주둔시켜 우산국을 정벌했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 지역의 물류와 인적 이동의 중심지로 기반을 잡았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수도 신라를 중심으로 도로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삼척이 동해안 도로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 수도가 개경으로 바뀌면서 전국의 도로가 개경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해안의 도로상 중심지는 삼척보다는 위쪽에 위치한 강릉이 더 중요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도가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되어 역시 전국의 도로망이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동해안의 경우에는 대관령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강릉이 대도호부가 되어 동해안의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삼척은 강릉과 평해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 의 중앙에서 고대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척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의 동해안 교통로를 살펴본 것이다. 동해안 교통로는 선사시대에 이미 개설되었다. 선사인은 동해안을 따라 백두산 일대의 흑요석을 동해안 중부 지역인 지금의 고성, 양양, 양구 등지로 운반하였다. 그 뒤 신라는 1세기 초반부터 2세기 후반까지 포항과 삼척 일대에 자리한 소국을 점령하면서 동해안 남부의 교통로를 중부까지 개설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지방 지배를 위해서 운용하였던 동해안 북부의 교통로를 장악하면서 동해안 북부 지역의 진출을 꾀하였다. 그 결과 6~7세기에 신라는 전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면서 점차 동해안 교통로의 효율적인 운용을 도모하였다. 신라의 동해안 교통로는 수도 왕경에서 지금의 포항-영덕-울진-삼척-강릉-양 양-고성-안변-이원으로 연결되는 北路였다. 다만 초기에 동해안을 따라 영역을 확대하면서 특별히 삼척을 주목하였기에, 북로의 중심지로 삼척을 고려하였다. 삼척이 속한 명주는 곡성군, 야성군, 유린군, 울진군, 나성군, 삼척군, 수성군, 고성군, 금양군 등으로 편제되었는데, 동해안과 바로 접해 있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고려할 때, 백두대간의 서쪽에 자리한 곡성군, 나성군 등까지도 명주 관내에 포함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지금의 강원과 경북 내륙 지방을 남북으로 이으면서 삭정군과 정천군에 이르는 관도인 ‘삭주로’와 동해안 교통로를 잇고자 하였기 때문 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태백과 정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삼척은 주목되었다. 삼척은 양양, 강릉, 흥해, 영일 등지와 함께 동해안 일대에서 비교적 넓은 평지가 분포한 곳이다. 특히 바닷가에 연접하였으면서도 오십천 유역의 들판과 함께 오십천을 통해서 낙동강 상류는 물론 남한강 상류로 진출할 수 있었다. 신라 말에 궁예는 원주에서 주천, 영월, 평창을 거쳐 울진으로 나아가 영역을 확대하였다. 당시 원주에서 울진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는 자연지리적 조건을 고려할 때, 정선으로 나아가 백복령을 넘은 뒤, 삼척을 거쳐 울진에 이르는 길이었다. 궁예가 삼척을 거쳐 울진에 이른 것은 당시 동해안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북진이 삼척에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삼척을 아우른 뒤 강릉을 점령하고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신라의 동해안 교통로에서 삼척은 동해안 교통로를 제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낙동강과 남한강 상류를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인적 ․ 물적 자원을 유통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이 글은 삼척이 동해안의 교통 요지였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삼척은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아 농산물은 풍부하지 못하였지만, 해산물과 광산물 자원은 풍부하였다. 강원 남부 지역의 탄광은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기초 에너지를 공급해 왔다.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삼척의 시멘트 생산은 기본 동력이 되었다. 삼척의 부족한 농산물을 풍부한 해산물과 광산물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필수적이었다. 물자의 교환과 사람의 이동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전제되어야 했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육로와 해로는 근대 이후 더욱 확장되어 나갔다. 삼척은 군사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삼척이 포항과 함께 동해안 방어를 위한 기지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물류 측면에서 보면 삼척은 부산↔원산 구간의 기항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삼척은 지리적으로 한반 도와 일본, 러시아를 잇는 동북아 물류의 거점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일찍부터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남북 분단 이후 그 길이 끊기고 말았다. 앞 으로 삼척이 이른바 통일시대를 대비하고자 한다면, 과거에 삼척이 부산↔원산 구간의 기항지로서 담당했던 역할에 대하여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사부 장군은 신라의 옛 영토를 탈환하기 위하여 육로로 진격하였고, 실직성을 탈환하여 지증왕 6년(505) 실직군주가 되었다. 실직군주로서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을 잠시 멈추고 실직에서 이사부 함대를 제작하였다. 이사부 함 대는 실직의 오십천 하류 정라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동해안 전체를 보아도 이만한 조건을 갖춘 자연항은 없었다. 정라진 건너불은 우산국과 거리가 가깝고 정 동방향이며 송림으로 싸여있어 파도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였다. 또한 인근에서 선박재료를 오십천 강물을 이용하여 쉽게 옮길 수 있으며 배후도시인 실직 성과 실직 제일의 갑자평야가 있었다.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사부 장군은 북진정책을 잠시 멈추고 왜구의 피해를 막고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산국 정벌을 먼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지증왕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이사부장군의 전략인지 알 수 없지만, 우산국을 복속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의 피해도 막을 수 있었으며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신라 가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500년 전 울릉도로 간다는 것은 명령과 유망, 표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이사부가 지혜 많은 젊은이고, 우산국 정복이 신라의 숙원사업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삼국시대의 선박 발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확인하기 어렵지만, 과연 이사부 전선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선에는 돛을 달았을까? 이사부 장군도 이 문제로 선박 기술자들과 많은 토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신라 전선은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사부 전선은 신라 전선 최초로 돛을 달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목우사자를 계획할 이사부 장군이라면 당연히 비밀병기인 전선 제작에 다른 나라의 최신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산국을 정벌하기 까지 6~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부 장군은 실직에서 전선을 만든 후, 하슬라를 탈환하여 국경을 넓히고 하슬라 군주가 되었다. 그 후 군사와 군비를 보충하여 실직의 군사와 함께 512년 6월, 이사부 전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가서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은 우산국을 복속하여 공물을 얻는 것 보다,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들의 침략을 근절 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남해의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의 불패 신화와 거북선의 신화가 있다면, 동해의 이사부장군은 한 번의 승전으로 200년간 신라를 평온케 한 목우사자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현명한 판단과 지략이 오늘날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와 함께 12해리의 영토와 200 해리의 경제수역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 영토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