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의 고고학적 실체규명은 한국고고학의 중요한 미해결 과제의 하나이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진행중인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우산국의 실체에 대한 외연을 좁혀가고 있으나 향후 조사연구를 통하여 해결해야할 핵심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울릉도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모든 유적과 유물은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이후에 해당하는 신라고분과 신라토기 등이며, 당연히 존재했던 요지와 취락주거지 등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목표지향적이고 체계적인 학술 조사가 시행되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현재까지 이사부정복이전의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로 거론된 바 있는 추정고인돌과 타제어망추와 지석 및 무믄토기편 들만으로는 신라복속 이전시기의 고고학적 해석이 어려우며, 따라서 신라복속이전시기에 해당하는 선사시대와 5세기대까지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는 조사는 우산국연구의 필수불가결한 과제로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고분들도 울타리로 구획한 극소수외에는 대부분 방치되어 있으며, 일주도로와 활주로건설에 따른 위락지개발과 경작지 확대과정에서 급속도로 파괴인멸될 처지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고분들의 보호대책은 우산국의 고고학적 규명을 위한 조사와 병행해서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유관행정기관과 조사연구자와 긴밀하고 항시적인 협조가 이루어 져야한다. 울릉도의 유적보존과 고고학적 연구는 우산국의 실체를 규명하는 학술적 의의뿐만 아니라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시비를 종식시키는 총체적인 작업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시기적으로 시급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파악된 토기산포지를 중심으로 주거지나 요지 등의 지하유구를 찾기위한 체계적이고 연차적인 시발굴을 실시하여 신라복속이전의 독자적인 유적과 유물을 찾아내고 이를 근거로 우산국의 성격과 형성과정 및 주민 등 총체적인 고고학적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실직국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新羅本紀 婆娑尼師今 23년조에 등장한다. 이후 실직국은 단편적인 기록과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상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초기기록은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으므로 실직국과 관련기록 역시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다만 실직국 관련 기록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압축하여 정리하였을 가능성은 높다. 여기에서는 파사니사금 23년조의 기록을 이 같은 입장에서 분석하여 실직국의 정체와 역사적 위상을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영동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면 신라가 동해안 일대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동해안을 통한 교역과 교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4세기 이후 영남일대에서 급증하는 북방계 문물은 동해안을 통한 교류를 상상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신라가 영동지역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동해안의 어느 소국이 동해안 연안해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소국이 바로 실직국으로 추정된다. 사로국이 실직국을 병합하였다는 기록은 3세기 후반경 실직국이 가지고 있었던 동해안 해상권을 차지하였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실직국이 영동지방에서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실직국의 지리적 위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일대는 영동지역에서 기항지로서의 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실직국은 이를 바탕으로 동해안 연안해로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 동해안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집단은 濊國과 悉直國으로서, 이들은 濊[東濊]계의 일원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금까지 실직국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적, 역사고고학적, 순수고고학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직국의 실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합리적 이해는 현재 충분하지 않다. 본 연구는 삼척·동해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제한하여 최근까지 조사된 철기시대 유적·유물을 검토하여 실직국의 문화 양상과 그 변천과정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실직국 관련 철기시대 유적들은 영동지방에서와 같이 해안사구지대에 입지하는 呂자형·凸자형 주거지와 중도식토기를 공반하고 있어, 소위 中島類型文化를 공유하는 동예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직국 관련 철기시대 주거지들은 대체로 呂자형·凸자형 주거지가 시기적으로 선행하고, (장)방형계 주거지가 후행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일부 凸자형 주거지와 (장)방형계 주거지가 늦은 시기까지 함께 공존하는 양상도 파악된다. 실직국 관련 유적 중, 동해 송정동유적은 지금까지 영동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마을유적으로 확인된 점, 최고의 위계를 상징하는 유물과 주변지역(한군현, 진한, 변한, 마한 등)과의 활발한 대외교섭 행위를 시사하는 외래적인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점, 철기생산과 직접 관련된 공방지가 존재하는 점 등에서 실직국과 관련된 강력한 집단세력이 거주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실직국의 장례문화는 종족상으로 보아 옥저와 같은 가족장을 위한 지상식 대형목곽묘를 공유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오늘날까지 지상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직국에 거주했던 예의 종족들이 남긴 물질문화를 통해서, 실직국은 적어도 기원 1세기부터 기원 4세기 무렵까지 동예사회의 공통적인 물질문화를 유지하였으며, 한군현과 진변한 등 주변 세력과의 대외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까지 확인된 실직국 관련 고고자료를 통해서, 실직국은 대체로 강릉의 예국사회와 같이 대동소이한 문화변동의 단계를 거쳐 전통문화가 점차 해체되면서, 신라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신라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직국은 적어도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에 신라문물이 유입되고 확산되면서 이후 토착문화를 대신하여 신라 영역화에 따른 신라문화권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 수군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어과정에서 점차 강화되었고, 이사부는 강화된 신라 수군을 거느리고 6세기 초에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의 전선들은 삼척포구를 오후에 출항하여 원시항해술시대의 안전한 대양항해술인 정방향 대양항해술에 따라 울릉도로 향했다. 이사부 해양정신의 첫째는 해양 진취적 도전정신이다. 신라 청년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항해가 있었다. 우산국 정벌 항해는 당시로서는 모험이었고 매우 특별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사부 해양정신의 둘째는 선구적 영토 개척정신이다. 신라는 6세기 지증٠법흥٠진흥왕 때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우산국과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다. 이사부는 이러한 영토 확장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이사부 해양정신의 셋째는 계보를 잇는 수군 명장의 정신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수군 명장은 이순신, 왕건, 장보고, 이사부라 할 수있다. 이사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군 명장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이사부 리더십의 첫째는 신라 수군의 기반 구축이다. 신라 수군은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작전에서 그 기반이 다져지고, 이후 발전을 거듭해 삼국통일전쟁기에 그 실력이 크게 발휘되었다. 이사부 리더십의 둘째는 출장입상의 국가운영 리더십이다. 출장입상은 전쟁터에 나가면 장수로,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으로 활약한다는 뜻이다. 이사부는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6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출장입상하며 신라 발전의 초석을 쌓았다.
본 논문에서는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유와 우산국이 신라에 歸服한 이후 신라의 우산국 통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라는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정치체인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유는 지증왕이 그 전 시기와는 다른 지배체제 정비를 통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산국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인 측면 역시 정벌 이유의 하나였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가지어피≒해표피=반어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우산국 정벌은 신라의 실직․하슬라 지역에 대한 진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국이 신라에 귀복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통치 역시 실직․하슬라 지역 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일찍부터 실직․하슬라 지역을 지배하였고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직․하슬라, 명주 지역은 신라 하대 김주원과 그 후손에 의해 일정 정도 지배되었다. 우산국은 신라에 귀복된 이후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신라에 토산물을 바쳤다. 이것은 신라와 탐라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국은 신라 멸망 전에 고려에 귀복하였는데, 이것은 명주 지역의 정세 변동과 연동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라 하대 어느 시기부터 우산국은 명주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의 통치력은 우산국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