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승휴의 불교 인식 변화과정과 그 성격을 종합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이승휴의 불교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불교관이 정치·역사 인식과 어떤 관계성을 지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논지 전개과정에서 정리한 고려후기 거사 불교, 즉 在家佛敎信者들의 활동이 내포한 사회적 의미를 바탕으로 이승휴의 불교관이 어떤 모습으로 표출되었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에 불교 의례가 개설되었던 목적은 불교가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점에서 벗어나 인간사의 구체적 관심사에 대응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에 수록된 「간장사기」에 실린 불교에 대한 인식은 당시 거사 불교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이승휴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둘째, 국가ㆍ사회적인 면에서 在家佛敎信者들은 財施 활동을 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승휴가 약 10년간 삼화사에서 1,000상자의 불경을 빌려 읽은 후 71세인 충렬왕 20년(1294)되던 해에 홀연히 容安堂 간판을 看藏寺로 개칭하고 승려가 주석할 밭을 희사하였다는 내용이 실린 「看藏寺記」 내용은 이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고, 이에 더하여 용안당을 간장사로 바꾸면서 이승휴는 왕실이 평안하고 번성하는 가운데 또한 국왕이 성세를 누리며 승평의 곡조가 연주되는 것을 길이 즐기도록 축원하였다는 기록은 그가 국가ㆍ사회적인 면에서 財施 활동을 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셋째, 이승휴는 삼화사 불경 열람을 마친 후 간장사를 만들고, 그가 읽은 불경 내용 또는 불서 해제와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내전록을 충렬왕 24년(1289년) 무렵에 저술하였다. 內典은 불교서적 목록을 정리한 서적으로 여겨지며, 저술한 배경은 재가불교신자로서 하여야할 사회·문화적 책무라 여기고,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과제로 여겨서이다. 넷째, 「간장사기」를 작성할 당시에는 현실 문제 해결과 역사 인식에서 불교에 의탁한 측면이 강하게 표출되었으나, 몽산덕이가 법어를 내려준 것에 대하여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전한 시, 주로 참선, 자기 수양과 관련한 내용을 통해 몽산덕 이와 교류한 이승휴는 그와의 교류 이후 참선과 화두를 기저로 한 불교 인식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이승휴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에 기반하여 종교적인 실천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였고, 이를 통해 그의 불교관은 고려 후기 在家佛 敎信者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맥을 같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척의 불교문화는 선덕여왕 11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聖蹟을 찾던 중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를 처음으로 창건하여 현재 삼화사의 시초가 되었다는 삼화사사적, 이 후 선종이 전국적으로 퍼진 통 일기에 범일국사가 강릉의 굴산사를 세운 이래 삼척지역에도 불적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는 유입, 전파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불교문화의 전래 이후 고려시대 말까지 호국불교로 크게 발전하였고, 강원도의 사찰의 불교는 더욱 신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강원도에 분포하는 불교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아 전반적으로 불교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글은 강원도 삼척시·동해시·태백시를 중심으로 문헌조사를 통해 폐사지의 현황을 살펴보고, 현지조사를 통해 사지가 유존하거나 출토된 석조물, 와편 등을 함께 검토하였다. 문헌기록과 현지조사를 통해 삼척·동해·태백 내에서 폐사지는 현재 총 61개가 확인되었다. 삼척 34개소, 동해 11개소, 태백 16개소이며, 연구소에서 확인한 폐사지는 삼척 4개소, 동해 3개소, 태백 5개소이다. 현재 삼척지역의 폐사지는 완전히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사지로 추 정되거나 구전되는 곳을 확인한 결과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자연재해 및 현상변경으로 등으로 인하여 명확히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는 곳들이 요소에서 확인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폐사지 조사를 통하여 시·발굴된 유적은 흥전리사지, 지상사지, 본적사지 등이 있다. 그 중 최근 흥전리사지가 시·발 굴조를 통하여 건물지, 석축, 탑지 등을 확인하였고, ‘국통’명 비편, 청동제 장식, 철제 초두 등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종합정비계획을 수반한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진다면 인근의 폐사지와 비교연구는 물론 강원도의 불 교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원도 삼척은 해양과 육지가 만나는 해안가 지역이다. 해양은 육지와 함께 삼척 역사를 형성해온 어엿한 활동 공간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근대시기 삼척에서의 해상 이동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지역 정체성 형성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근대시기 삼척지역은 2등도로를 중심으로 도로가 수선 정비되었으나 험로여서 자동차 수송이 원활치 않았다. 철도는 1940년대 들어 광물수송 간선 구축 방침에 따라 부설된 탓에 생활 교통과는 거리가 멀어 상대적으로 해상 교통과 해양 이용이 삼척지역에 요긴하였다. 근대시기 신문에 실린 해상 이동 관련 신문기사와 구술자료, 자전적인 글 등을 자료로 삼아 해상을 통한 삼척지역의 인적 교류와 물류 이동 양상을 나누어 살펴 보았다. 해양 활동 공간과 그에 연계된 항포구가 근대 삼척의 정체성 형성에 아래 와 같은 특징이 있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근대 시기 삼척에 있어서 해양은 일회적 단순한 교류를 넘어 연속적으로 동해안의 연안 도시 및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 긴밀하게 접촉이 이루어진 활동 공간이었다. 부산~원산 해로 기항지로서 인적 및 물류는 분명한 목적 아래 이동 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둘째, ‘신흥 삼척’ ‘물화의 집산지 삼척’ ‘공도 삼척’으로 요약되는 일제 말기 삼척의 이미지가 형성된 데는 활발한 해상 이동과 군수물자 집결처로서 정라항1)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항포구 기능에서 파급되는 영향이 컸다. 셋째, 근대 시기 삼척의 항포구와 해양은 지역민 생업과 관련된 중요한 터전이었으며, 무동력선 운영과 원근해 어업, 해조류 채취 경험을 축적하였다. 넷째, 삼척의 해상 국방 요충지적 성격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항을 통한 군수물자 반출, 식량 공급 등 강화되었으며 이 같은 군사적 성격은 해방 직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미군정청 국방국은 동해안 최북방 해군기지로 삼척을 설정하였다. 다섯째, 항포구 어촌이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삼척포진성 유적 파괴와 오십천 수로 변경, 집단 이주로 인한 거주 불안, 헐값의 토지판매, 외지인과 노동자 유입으 로 인한 사건사고, 공장 안전사고, 축항설비 미비 해상 사고 등의 문제를 표출하였다. 여섯째, 삼척의 각 항포구는 육로교통이 제대로 연계되지 않아 물산의 집산지는 되었으나 배급처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여 거점도시로 확대되지 못하였다. 도시 형성에 필요한 각종 기반시설을 지역민에게 전가시킨 일제의 식민 통치 결과 삼척읍내~정라항간 도로조차 완비되지 못할 정도로 한계를 노정하였다. 삼척을 해항도시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해양은 근대 삼척의 역사 경제 교통 항구 군사 등에 영향을 끼쳤으며, 정라항은 시대성을 대변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해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강원도 영동지방 최남단의 삼척지역은 남쪽으로는 경북 울진군, 봉화군과 접하고 있어 경북 북부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중간 연결지점의 문화전파 경로로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으며, 석조미술 역시 이와 관련하여 형성·발전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석탑은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태백 본적사지 삼층석탑, 삼척 흥전리사지 삼층석탑, 삼척 대평리사지 석탑 등 4기가 확인되는데, 비교적 적은 수량만 남아 있지만 9세기 신라석탑의 결구구조와 양식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화사 삼층석탑의 별석 탑신받침, 흥전리사지 석탑의 삼중기단, 표면 장엄공 등은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 흐름 속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특징으로 삼척지역이 9세기 신라석탑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흥전리사지가 위치한 도계 읍은 경북 북부와 강원지역을 연결해주는 곳으로 당시 중요 교통로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다양한 석조미술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 불교문 화 발달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석탑을 통해 본 삼척지역의 불교문화는 경북 북부와 강원지역을 연결해주는 중간적 위치이지만, 불교문화의 발전 양상은 강원 남부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영역을 확대한 과정을 지리적 조건이나 육로 ․ 해로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이다. 특히 동해안 해로의 중심으로 삼척의 역사적 위상을 주목하였다. 신라는 소지마립간 9년(487)에 왕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친 官道를 수리하였 다. 이미 1세기 중반∼2세기 초반에 탈해이사금이 등장하고 음즙벌국을 정복하면서 동로와 북로가 개설되었다. 신라는 당시에 실직곡국을 정복하면서 북로를 신라의 영역을 확대하는 주요 통로로 중시하였다. 지증마립간 6년(505)에 수로와 해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운송과 교역, 군사 활동의 이점을 높이려는 방안으로 ‘舟楫之利’가 제정되었다. 동시에 삼척과 흥해, 영 천 등지에 12곳의 성을 쌓은 뒤에 실직을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신라는 6세기에 해로의 정비와 관련하여 삼척을 강조하였다. 동해의 해안선은 육로로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灣이 잘 형성되지 않 았기에 큰 항구가 발달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양양, 강릉, 삼척, 흥해, 영일, 포항 등지에는 하천 유역에 제법 넓은 평지에 형성되었다. 삼척은 바닷가에 연접하였으면서도 오십천을 통해 낙동강 상류는 물론 남한강 상류로 가는 육상교통로를 갖추었으며, 넓지는 않지만 오십천의 하구를 군항이나 수군 양성 기지로 쓸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 따라 지증마립간은 삼척에 주를 두고 이사부를 주둔시 켰다. 지증마립간 13년(512)에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그는 지도로왕 때 沿 邊의 관리를 맡아 내륙수로는 물론 해로에도 익숙하였고, 연안 해로는 물론 원양 해로에도 익숙하였다. 그는 왕경과 가까워 기밀을 유지하기에 편리하면서 선박 제 작에 필요한 수림이 울창하였던 흥해 일대에 주목하여 선박의 제조와 수군의 양성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연안 해로를 따라 선박과 수군 등 인적․물적 자원을 운송하여 삼척을 동해안 최대 군항으로 활용하였다. 그런 다음에 원양 해로를 이용 하여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은 신라의 동해안 인식을 확고하게 하였다. 신라 왕실은 삼척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인식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삼국통일 전후에 왕실과 緣故된 의상과 원효, 진표 등은 낙산사와 고성군을 찾았다. 그들은 무열왕 5년에 삼척에 설치한 北鎭에서 연안 해로를 따라 북상하였다. 신라 말에 헌강왕은 일본의 사신 파견과 관련하여 울산 일대의 항구와 포구에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신라 北邊의 상황과 관련하여 삼척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것은 삼화사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당시 왕실과 결연한 해인사 승려 決言은 860년 쯤에 삼척 삼화사 철불 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의 해인사 승려들은 헌강 왕은 물론 정강왕이 주관한 선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佛事를 주도하였다. 자연히 신라 왕실은 삼화사를 통해서 삼척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삼척은 동해안 일대의 여러 군현 가운데 신라의 영역 확대는 물론 신라 국가의 안녕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끊임없이 주목되었던 곳이었다.
이 글은 나말려초 崛山門을 개창한 梵日선사와 삼척지역과의 관련성과 그 의미를 살펴본 사례 연구이다. 굴산문과 범일, 그리고 삼척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삼척은 범일이 三和寺를 포섭하면서, 범일 당시부터 그 세력권에 속하였다. 그 후 굴산문이 세력을 확대하는 거점지로 기능하였고, 굴산문은 영동과 동해안 일대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성을 토대로 범일은 삼척지역의 불교문화를 꽃 피운 神僧으로써 존숭받았다. 강릉지역에서 범일이 神的인 존재로 ‘大關嶺 國師城隍神’으로 모셔졌던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삼척지역의 삼화사, 天恩寺, 靈隱寺, 新興寺 등에서 ‘범일국사 창건설화’가 창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삼화사를 제외한 사찰은 범일 혹은 굴산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범일 창건설화’는 범일과 굴산문을 염두에 두면고 조선시대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동지역을 중심으로 범일과 굴산문의 영향력과 위상이 높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