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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척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의 동해안 교통로를 살펴본 것이다. 동해안 교통로는 선사시대에 이미 개설되었다. 선사인은 동해안을 따라 백두산 일대의 흑요석을 동해안 중부 지역인 지금의 고성, 양양, 양구 등지로 운반하였다. 그 뒤 신라는 1세기 초반부터 2세기 후반까지 포항과 삼척 일대에 자리한 소국을 점령하면서 동해안 남부의 교통로를 중부까지 개설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지방 지배를 위해서 운용하였던 동해안 북부의 교통로를 장악하면서 동해안 북부 지역의 진출을 꾀하였다. 그 결과 6~7세기에 신라는 전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면서 점차 동해안 교통로의 효율적인 운용을 도모하였다. 신라의 동해안 교통로는 수도 왕경에서 지금의 포항-영덕-울진-삼척-강릉-양 양-고성-안변-이원으로 연결되는 北路였다. 다만 초기에 동해안을 따라 영역을 확대하면서 특별히 삼척을 주목하였기에, 북로의 중심지로 삼척을 고려하였다. 삼척이 속한 명주는 곡성군, 야성군, 유린군, 울진군, 나성군, 삼척군, 수성군, 고성군, 금양군 등으로 편제되었는데, 동해안과 바로 접해 있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고려할 때, 백두대간의 서쪽에 자리한 곡성군, 나성군 등까지도 명주 관내에 포함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지금의 강원과 경북 내륙 지방을 남북으로 이으면서 삭정군과 정천군에 이르는 관도인 ‘삭주로’와 동해안 교통로를 잇고자 하였기 때문 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태백과 정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삼척은 주목되었다. 삼척은 양양, 강릉, 흥해, 영일 등지와 함께 동해안 일대에서 비교적 넓은 평지가 분포한 곳이다. 특히 바닷가에 연접하였으면서도 오십천 유역의 들판과 함께 오십천을 통해서 낙동강 상류는 물론 남한강 상류로 진출할 수 있었다. 신라 말에 궁예는 원주에서 주천, 영월, 평창을 거쳐 울진으로 나아가 영역을 확대하였다. 당시 원주에서 울진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는 자연지리적 조건을 고려할 때, 정선으로 나아가 백복령을 넘은 뒤, 삼척을 거쳐 울진에 이르는 길이었다. 궁예가 삼척을 거쳐 울진에 이른 것은 당시 동해안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북진이 삼척에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삼척을 아우른 뒤 강릉을 점령하고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신라의 동해안 교통로에서 삼척은 동해안 교통로를 제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낙동강과 남한강 상류를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인적 ․ 물적 자원을 유통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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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영역을 확대한 과정을 지리적 조건이나 육로 ․ 해로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이다. 특히 동해안 해로의 중심으로 삼척의 역사적 위상을 주목하였다. 신라는 소지마립간 9년(487)에 왕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친 官道를 수리하였 다. 이미 1세기 중반∼2세기 초반에 탈해이사금이 등장하고 음즙벌국을 정복하면서 동로와 북로가 개설되었다. 신라는 당시에 실직곡국을 정복하면서 북로를 신라의 영역을 확대하는 주요 통로로 중시하였다. 지증마립간 6년(505)에 수로와 해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운송과 교역, 군사 활동의 이점을 높이려는 방안으로 ‘舟楫之利’가 제정되었다. 동시에 삼척과 흥해, 영 천 등지에 12곳의 성을 쌓은 뒤에 실직을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신라는 6세기에 해로의 정비와 관련하여 삼척을 강조하였다. 동해의 해안선은 육로로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灣이 잘 형성되지 않 았기에 큰 항구가 발달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양양, 강릉, 삼척, 흥해, 영일, 포항 등지에는 하천 유역에 제법 넓은 평지에 형성되었다. 삼척은 바닷가에 연접하였으면서도 오십천을 통해 낙동강 상류는 물론 남한강 상류로 가는 육상교통로를 갖추었으며, 넓지는 않지만 오십천의 하구를 군항이나 수군 양성 기지로 쓸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 따라 지증마립간은 삼척에 주를 두고 이사부를 주둔시 켰다. 지증마립간 13년(512)에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그는 지도로왕 때 沿 邊의 관리를 맡아 내륙수로는 물론 해로에도 익숙하였고, 연안 해로는 물론 원양 해로에도 익숙하였다. 그는 왕경과 가까워 기밀을 유지하기에 편리하면서 선박 제 작에 필요한 수림이 울창하였던 흥해 일대에 주목하여 선박의 제조와 수군의 양성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연안 해로를 따라 선박과 수군 등 인적․물적 자원을 운송하여 삼척을 동해안 최대 군항으로 활용하였다. 그런 다음에 원양 해로를 이용 하여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은 신라의 동해안 인식을 확고하게 하였다. 신라 왕실은 삼척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인식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삼국통일 전후에 왕실과 緣故된 의상과 원효, 진표 등은 낙산사와 고성군을 찾았다. 그들은 무열왕 5년에 삼척에 설치한 北鎭에서 연안 해로를 따라 북상하였다. 신라 말에 헌강왕은 일본의 사신 파견과 관련하여 울산 일대의 항구와 포구에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신라 北邊의 상황과 관련하여 삼척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것은 삼화사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당시 왕실과 결연한 해인사 승려 決言은 860년 쯤에 삼척 삼화사 철불 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의 해인사 승려들은 헌강 왕은 물론 정강왕이 주관한 선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佛事를 주도하였다. 자연히 신라 왕실은 삼화사를 통해서 삼척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삼척은 동해안 일대의 여러 군현 가운데 신라의 영역 확대는 물론 신라 국가의 안녕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끊임없이 주목되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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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5.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화사 창건 내역과 노사나불상 조성의 내용, 그리고 불상 조성의 불교사적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다만 불상의 양식을 중 심으로 고찰한 기존 연구와 달리 명문에 기록된 결언의 행적, 사상 경향을 통해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의 정치적인 입장을 주로 살폈다. 삼화사는 대체로 후삼국통일 이후에 왕건이 범일의 遺墟에 전각을 세우고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범일이 터를 닦기 이전에 이미 삼화사는 지금의 자리보다는 바다에 가까운 계곡 아래쪽에 자리 하였다. 삼화사 옛 터에는 석탑 1기와 함께 철불 2구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1구의 철불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삼화사 적광전에 봉안된 노사나불상이다. 이 불상은 ‘말법이 시작된 지 300여 년’에 조성되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이나 염거화상 승탑의 명문과 관련하여 볼 때, 제작 시기는 대체로 860년 쯤일 것이다. 없어진 1구의 철불은 9세기에 전국적으로 비로자나불상 제작이 성행하였음을 고려하면, 비로자나불상일 것으로 짐작된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결언이 주관하였다. 결언은 삼화사 노사나 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설행한 뒤, 다시 숭복사 노사나불상을 제작하는 불사에 참여하는 등 주로 노사나불상 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숭복사 노사나불상의 제작은 경문왕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도 경문왕 의 교서에 의해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곧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에는 즉위 직후 위상을 부각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경문왕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 되었다. 결언은 해인사 승려였다. 헌강왕과 정강왕 때 해인사에서는 지엄과 의상을 추모 하는 법회를 개최하면서 60권 󰡔화엄경󰡕과 80권 󰡔화엄경󰡕을 사경하는 화엄불사를 설행하였다. 결언은 현준과 함께 이 불사를 주관하였다. 결언은 성기론적 화엄사 상을 가졌지만, 유식 논리에도 유념하였으며 실천 논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결언 이 융섭적인 화엄사상을 강조하면서 노사나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삼화사 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화엄사상을 통해 당시 불교계를 아우르려는 경문왕계 왕실의 입장이 반영되었다. 경문왕계 왕실은 노사나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당시를 말세로 인식하는 민심을 위무하고, 굴산 문과 같은 선종산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결국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9세기 중반 이후에 경문왕계 왕실이 명주 일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삼척 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던 정치적 의도와 밀접히 관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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