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삼척과 울릉지역에 불교가 어느 시기에 전파되었고 정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글이다. 삼척지역은 4~5세기에 신라의 문화가 전파되고 505년에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부임하면서 신라에 복속되지만 이 시기의 문헌기록이나 불교유적 또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삼척지역에서 가장 시기가 이른 자료는 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가 삼화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된 것이 없다. 이후의 유적으로 흥전리절터와 삼화사, 영은사, 지상사가 있다. 유물로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된 7세기 중엽 작품인 금동보살입상과 8세기에 작품인 금동여래입상, 삼화사의 철불과 3층석탑, 지상 사의 철불 등이 있다. 특히 흥전리사지의 3층석탑과 석등재 그리고 「國統」이 새겨진 비문 그리고 최근에 공개된 「梵雄官衙之印」은 삼척지역의 불교세력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로보면 삼척지역의 불교는 적어도 7세기 중엽 이전에는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8세기에는 정착되고 9세기에는 신라불교가 정착단계를 지나 확산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울릉지역의 불교 전래는 이사부가 울릉도를 복속하는 512년 이전에 불교가 전래 또는 일부의 계층에서는 인식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사자라는 동물이 현재와 같이 당시에도 존재하지 않는 동물임에도 울릉주민이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는 것은 불교의 호법신장 역할을 하는 사자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후 울릉지역에서 확인되는 유물로 8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내륙에서 제작되어 울릉지역에서 수습된 소형금동불과 불상 대좌 편 등이 있어서 적어도 이 시기에 불교가 정착하였으며, 의종 11년인 1157년에는 절터와 범종 석탑 등이 있다는 것은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로 보면 삼척과 울릉지역은 적어도 6세기에는 불교가 전파되어 8세기에는 정착과 확산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척은 고려와 조선시대 춘천과 강릉, 원주 등과 함께 강원의 핵심지역으로 일찍부터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삼척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 가운데 청자 문화와 직접 관련된 유적은 생산유적과 생활유적, 분묘유적 등이 있다. 生産遺蹟은 12세기 중반∼13세기 전반에 康津 製瓷技術의 영향을 받아 운영되었던 내미로리 청자요지가 발굴조사되었는데, 器種과 釉胎, 燔法, 文樣 등이 좋지 않아 지방에서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던 가마임을 알 수 있다. 生活遺蹟은 삼척의 치소였던 삼척도호부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삼척도호부에서는 양질의 청자가 출토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영동지역에서 차지하였던 삼척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地上寺址에서는 수량은 많지 않지만 신라 하대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도자기와 함께 중국 越州窯 청자가 확인되어 사찰의 운영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천은사 경내의 이승휴 유허지에서 출토된 청자는 내미노리 청자요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되어 대량 생산 체제로 운영되었던 지방 요지와 주변 소비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墳墓遺蹟은 동해 삼화동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상류층에서 사용한 고품격의 고려 청자와 宋代 백자를 비롯하여 조질의 고려 백자가 확인되어 품질과 기종에 따라 그릇의 용도가 분담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청자들은 삼척 지역의 부족한 역사를 보완하는데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앞으로 유적에 대한 조사 연구가 더욱 많이 진행되었으면 한다.
조선후기 강원도 삼척영장(三陟營將)은 1672년(현종 13) 신설되어 1895년까지 (고종 32) 존속하였다. 삼척영장은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파견된 영장으로, 토포사 (討捕使)와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삼척영장 약 221인의 왕대 별 수는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영조대가 60인으로 가장 많았고, 고종대가 42인으로 두 번째였다. 삼척영장의 재임기간은 15개월 이상 및 10개월 이상 15개월 미만이 각각 65인이었고, 10개월 미만이 56인이었다. 아울러 8명은 재임 기간을 알 수 없었고, 삼척영장에 임명된 후 부임하지 않은 경우도 27인이나 되었다. 영장은 정조 대 『대전통편』에 의하면 정3품 절충(折衝) 이상의 자급을 이미 받은 상태에서 영장이 된 경우는 10삭 후에, 영장이 되면서 새로 절충을 받은 경우에는 15삭 후에 직책을 옮길 수 있었다. 삼척영장 221인 중 160인은 교체사유를 알 수 있었는데, 부임하지 않고 교체된 27인의 사유는 ‘11인은 부모가 75세 이상, 9인은 부모나 본인의 병이 중함, 7인은 상환(相換)·내천(內遷)·유임 등’이었다. 부임한 삼척영장 133인의 교체사유는 ‘94인(내천 86인, 외천 8인)은 벼슬자리 옮김, 38인은 직무수행 잘못, 1인은 본인의 병’ 등이었다. 삼척영장은 영동 9개 읍의 군병 조련과 점검 등을 전담하였다. 아울러 강원도 영동에 도적이 매우 많으나 토포사인 춘천부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삼척영장은 1673년 토포사를 겸임했었는데, 치도(治盜)와 관련하여 영장의 상벌(賞罰)이 결정되었으므로 양민(良民)을 도적으로 몰아버리는 폐단 등이 발생하였다. 삼척영장은 수군첨절제사도 겸임하면서 바다 방어도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삼척영장의 해방(海防) 기능은 다른 영장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특히 삼척영장은 1694년(숙종 20)부터 월송만 호와 교대로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이 되어,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인에게 확실히 알리면서 그들의 불법적인 어로행위나 벌목 등을 차단한 점이 주목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기상이변으로 재해에 대해 예측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에는 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1662년 부사 허목이 쓴 『陟州誌』 에는 17세기 중기 삼척 기후에 대한 일면이 서술되어 있고, 또 沈宜昇이 쓴 『삼척군지』에는 삼척의 기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삼척지역은 이상기후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러한 자연재해는 농업생산과 식량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
『陟州先生案』은 다른 지방의 읍 선생안과는 달리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러므로 본 글은 『陟州先生案』을 통해 삼척지역에 대한 자연 재해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자연재해에 대한 府使·民의 대응도 검토하였다.
기념관은 특정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시대, 현장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며, 잊고 있던 기억과 만나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추모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특정 역사적 대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념관에서의 교육기능은 더욱 중시된다. 기념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크게 전시관을 안내하고 관람을 지원하는 교육서비스부터 대상과 주제 등에 따라 강의, 체험활동, 답사 등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프로그램, 기념관이라는 물리적으로 벗어나 기념 대상의 학습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아웃리치(outreach) 프로그램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현재 대표적인 역사 교육기관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독립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방문자 유형 및 내‧외부 환경을 고려하여 기관의 특성에 맞게 교육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사부기념관은 해양인물 이사부를 통해 우리나라의 동해 개척과 독도수호의 역사를 알리고, 국민들의 영토의식 함양을 위해 강원도 삼척에 만들어질 공간이다. 이사부기념관이 국민이 즐겨 찾는 역사학습공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관의 설립목적에 따라 관람객이 기억하고 학습해야 하는 목표와 내용을 명확히 정해야 한다. 더불어 이사부기념관을 방문할 관람객 유형과 수, 즉 수요를 예측하 고 이에 맞춘 이사부기념관만의 교육서비스와 프로그램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활성화되고 있는 기념관들의 현황을 참고하여 중장기적인 차원 에서 운영 전략이 마련되어야 하며 전시 및 교육시설과 전문 인력, 예산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사부기념관이 영토 수호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역사교육기관이자 관람객이 즐겨 찾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기관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