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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만은(晩隱) 이규원(李奎遠)은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성오(星五)이다. 1851년 19세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고 되면서 함경도(咸鏡道) 단천부사(端川府使), 경기도(京畿道)의 통진부사(通津府使) 등 지방관(地方官)을 지냈다. 1881년 일본인이 울릉도(鬱陵島)에서 벌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되어 울릉도를 수토(搜討)하였다. 9일간의 조사를 통해 『울릉도외도』와 『울릉도내도』지도를 그려 고종에게 바쳤다. 그의 치적(治積)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제주목사로서도 역사의 한페이지를 남겼다. 1891년 8월 찰리사(察理使) 겸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명된 이규원은 제주의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일본인들의 어업을 금지하고 민생 안전에 주력하였다. 1894년에는 군무아문대신(軍務衙門大臣)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1900년에는 함경북도(咸鏡北道) 관찰사(觀 察使)를 지내기도 하였다. 1910년에는 그에게 장희(莊僖)라는 시호를 내렸다. 즉 무력으로 중후함을 간직하는 것이 장(莊)이고, 소심하게 공순하고 삼가는 것이 희(僖)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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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은 19세기 60년대부터 외세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와 병인양요, 미국과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또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제일 먼저 울릉도·독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울릉도에 일본인을 보내 벌목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이것은 1881년 울릉도 수토에서 보고되었다. 수토사들이 울릉도를 순찰할 때 일본인들이 나무를 베어 원산과 부산으로 옮기려 하였고 이 사실을 들은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관찰사로 파견하여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이규원은 울릉도 상황과 「울릉도내도」, 「울릉도외도」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후 조선은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도장(島長)을 두어 울릉도를 관리하였고, 군을 설치해 지방관제에 편입하고 관할 구역을 울릉도 전체와 독도를 포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고종의 관방정책으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집권하면서 1870년대 초부터 국경 방어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관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국경지역인 동래, 의주, 황해지역 방어와 이양선의 출몰 등에 대비하여 조치를 강구하였다. 또한 고종의 울릉도 관방정책은 전국 관방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를 개척하고자 하는 그의 영토수호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울릉도는 버려진 섬이 아니라 비웠던 섬이고, 주민을 이주하여 단계적으로 울릉도를 개척하였고, 군청을 설치하는 등 고종의 정책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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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7.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기상이변으로 재해에 대해 예측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에는 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1662년 부사 허목이 쓴 『陟州誌』 에는 17세기 중기 삼척 기후에 대한 일면이 서술되어 있고, 또 沈宜昇이 쓴 『삼척군지』에는 삼척의 기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삼척지역은 이상기후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러한 자연재해는 농업생산과 식량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 『陟州先生案』은 다른 지방의 읍 선생안과는 달리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러므로 본 글은 『陟州先生案』을 통해 삼척지역에 대한 자연 재해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자연재해에 대한 府使·民의 대응도 검토하였다.
        6,6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