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통일 후 신라에서 설치한 국가 祭場 중 삼척에 설치된 것은 북쪽 태백산에서 中祀를 지내기 위해 설치한 祭場, 四海 중 悉直郡 영역 내에 위치한 非禮山 에 설치된 北海 祭場이 있었다. 수도를 제외한 지방에 중사를 지낸 제장이 2곳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신라 입장에서 정치ㆍ군사ㆍ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백산에 中祀를 설치한 이유는 신라 입장에서 본다면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낙동강 발원지가 되어 경상남북도 지역의 농경지를 형성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물을 끊임없이 제공하기에 그 덕이 매우 커서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四海 祭場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北海 비례산은 오늘날 삼척 시인 실직군에 소재한다고 소개하였다. 현재 신라시대 북해의 제장인 비례산은 삼척의 어디인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더구나 동해, 서해, 남해의 제장은 海邊인데 반해, 북해 비례산만 산인 까닭에 더욱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북해 비례산의 위치 를 추정하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는데, 일단 다른 해안지역의 제장과는 달리 山이 라는 점과 삼척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제사를 지낸 산이라면 신령이 좌정할 만한 공간적 특징을 지니면서, 용왕제를 지낼 수 있는 여건 또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삼척 비례산에서 행한 제사는 용왕을 위하여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고, 이에 비례산 이 어디인가를 추정함에 있어 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지금까지 축적된 삼척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유물과 묘제[무 덤]을 정리·분석하여 이 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양상을 파악하고, 문헌자료를 함께 검토하여 삼국시대 이전에 삼척을 중심으로 형성·발전해 나갔던 실직국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함에 그 목적을 두었다.
삼척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양상은 ‘중도유형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예[동예]의 문 화양상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척지역 내 철기시대 주거지는 해안사구 지대에 집중적으로 입지하며, 凸자형·呂자형·(장)방형의 평면형태를 띠고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양한 노(爐), 바닥 점토다짐, 벽체마감시설 등과 화재로 인해 폐기된 집자리가 다수 확인된다.
주거지 유적 내에서는 중도식토기[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와 함께 외래계토 기[영남계·낙랑계토기]와 이를 모방한 새로운 토기양상도 확인된다. 그리고 진· 변한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량의 옥장신구와 청동세환[소환] 등이 출토된다. 이러한 문화적 양상을 볼 때,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는 주변지역의 정치세력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면서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재지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 으로 보인다.
한편 삼척지역을 포함한 강원 영동지역 내에서는 철기시대 묘제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실직국이 삼한의 정치체와는 달리 옥저의 지상식 목곽 묘의 장례문화를 공유하여 지상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흔적이 남아있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와 삼척지역 내 주거지와 신라고분을 살펴본 결과,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와 실직국은 신라가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5세기를 전후하여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점차 해체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는 신라화 과정 속에서 해체되어 갔지만, 고고학적으로 영동지역 최대의 마을유적인 동해 송정동유적에서 다양한 외래계유물과 철기생산과 관련된 단야공방지가 다수 확인되는 점, 이후 실직주가 설치되어 군사적 전략기지 [수군기지]의 역할을 담당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 역사·문화적 위상은 높게 평가된다.
본고는 삼척과 울릉도지역 고분 자료를 분석하고 문헌자료와의 비교·검토를 통해 당시 신라의 삼척과 울릉도지역 진출 시기와 과정, 그리고 복속 후 지역 정 치체의 성격과 동향, 신라의 지역 지배방식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척지역에 있었던 小國인 悉直國은 신라의 전신인 斯盧國에 의해 늦어도 4세 기 초반에는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신라는 5세기 중엽 경 지방 간접지배의 일환으로 중심세력인 갈야산 집단과 중·소 세력인 추암동·구호동 집단에게 위세품을 차등 지급함으로써 갈등관계를 조장하여 지방 세력의 발전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 따른 폐단으로 울진 봉평비에 보이는 남미지촌의 중앙에 대한 반란과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 변장의 살해 사건 등이 나타났다. 신라는 6세기 초에 세력 이탈의 조짐이 가장 강했던 삼척지역에 최초로 悉直州를 설치하여 地方官을 파견하였다. 이에 신라는 지방 중심세력과 갈등관계에 있던 추암 동 집단을 이용함으로써 서서히 직접지배 권역을 넓혀 나갔으며 6세기 초엽은 물론 중엽까지 추암동에만 위세품이 나타남은 그러한 연유이다. 이와 더불어 불안정한 대외적 여건으로 인해 동해안지역은 6세기 중엽까지도 완전한 직접지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6세기 후엽이 되면 동해안 방면은 완전히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게 된다. 이에 고고자료 상으로도 더 이상 간접지배의 위세품은 나타나지 않으며 중심 세력은 추암동 집단으로 일축된다. 7세기대는 지방 최하위 촌락에까지 중앙의 지방관이 파견되어 직접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울릉도에서 확인된 신라고분 연대의 상한은 향토사료관 소장품을 참조하면 6세기 초·중엽으로 신라의 울릉도 정복 시점과 대체로 일치하며, 존속시기는 고분출토 인화문 토기 등을 참고하면 대략 10세기까지이다. 신라는 당시 주변국과의 교 섭 및 견제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마련하기 위해 울릉도를 정복하였고, 그 후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지배를 실시하였다. 이에 지역민의 반발과 반신라적인 정서를 차단하기 위해 지방관 아래에 각 촌락마다 촌주를 두었을 것이며, 섬 내 분포하는 적석봉토의 횡구식석실묘를 비롯하여 신라 토기 및 각종의 위세품들이 이 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분이 파괴되거나 도굴되어 당시 지역정치체의 존재 양태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한계가 있었다.
이 글은 4〜6세기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 과정을 검토하면서, 특히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에 2세기 초 悉直谷國과 音汁伐國의 ‘爭疆’ 기사는 삼척의 悉直國과는 무관한 기록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실직곡국의 명칭에 ‘谷’이 들어가 있음에 비해, 삼척 실직국 관련 기사는 들판을 의미하는 ‘原’ 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에 주목한 결과이다. 따라서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은 4세기 신라 토기가 출토하는 포항·영덕·울진 일원에 대한 고고 자료와, 4세기 후반으로 보이는 강릉 일원의 신라 토기 출토 상황을 주목하였다.
특히 4세기 말 동해안 방면 何瑟羅(강릉)의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인하여, 신라가 그 지역에 1년 간 租調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기록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기록은 신라가 강릉 일원에서 토지에 기반하여 수취하는 세금인 租와 지방 특산 물에 해당하는 調를 거두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 삼척·강릉 지 역이 신라의 완전한 행정적 직접 지배 아래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상황은 근래 강릉 안현동 고분군과 하시동 고분군의 편년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안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신라로 하여금 5세기 중반 삼척·강릉 일원을 둘러싼 고구려와의 각축을 무난히 극복하고, 6세기 중반 황초령·마운령 지역까지 진출이 가능하게 하였다. 진흥왕은 568년에 황초령과 마운령을 순수하였다. 그 해에 比列忽 州(안변)가 達忽州(고성)로 移置됨으로써 신라의 북방 영토가 위축된 것으로 이해 하여 왔다. 그러나 황초령과 마운령의 순수비는 진흥왕의 巡狩 몇 년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달홀주로의 州治 이동을 영토의 위축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異斯夫의 于山國 정벌이 이루어졌다. 실직주와 하슬라주 軍主 를 역임한 이사부는 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4세기 후반 신라가 삼척·강릉 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신라는 우월적 지위에서 우산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사부의 정벌은 우산국의 驕慢에 대한 ‘治罪’의 의미로 이루어진 군사적 무력 시위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신라는 우산국 특산물인 水牛[물 개]를 공납으로 징수할 수 있었으며, 이는 후일 唐과의 교류에서 신라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 글은 삼척을 가로지르는 오십천 하구의 남쪽 곶(산)에 입지한 오화리산성의 신라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고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밝히는 작업을 하였다. 고고자료로는 산성에서 수습된 신라토기를 분석하고, 할석 이 피복된 토루 성벽 축조 방식을 찾아 오화리산성을 5~6세기의 신라성으로 추 정하였다. 문헌자료로는 오화리산성 주변에 신라계 지명과 채록 자료를 찾아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이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으로 추정되므로, 이 성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실직(주)성[悉直(州)城]으로 볼 수 있으며, 「울진봉평신라비」의 실지도사(悉支道使), 실지군주(悉支軍主)가 주둔하였던 성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이 성의 신라사적 의미는 강 하구의 바닷가 곶(산)에 입지한 점에서 최 근 발견조사된 강릉 경포호 옆 강문동 신라토성과 통하고 있어 신라의 동해안 연 안항해(沿岸航海)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결국 오화리산성 일대는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연안항해를 위한 중간 기항지(중간거점)로 기능하다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하면서 신라의 방어 거점 기능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역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통일신라시대 때 오화리산성 일대를 북해(北海) 중사(中 祀) 비례산(非禮山)의 무대로 정하였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