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lla’s Expansion to Eastern Coast and Usanguk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과 우산국
이 글은 4〜6세기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 과정을 검토하면서, 특히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에 2세기 초 悉直谷國과 音汁伐國의 ‘爭疆’ 기사는 삼척의 悉直國과는 무관한 기록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실직곡국의 명칭에 ‘谷’이 들어가 있음에 비해, 삼척 실직국 관련 기사는 들판을 의미하는 ‘原’ 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에 주목한 결과이다. 따라서 신라의 동해안 방면 진출은 4세기 신라 토기가 출토하는 포항·영덕·울진 일원에 대한 고고 자료와, 4세기 후반으로 보이는 강릉 일원의 신라 토기 출토 상황을 주목하였다.
특히 4세기 말 동해안 방면 何瑟羅(강릉)의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인하여, 신라가 그 지역에 1년 간 租調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기록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기록은 신라가 강릉 일원에서 토지에 기반하여 수취하는 세금인 租와 지방 특산 물에 해당하는 調를 거두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 삼척·강릉 지 역이 신라의 완전한 행정적 직접 지배 아래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상황은 근래 강릉 안현동 고분군과 하시동 고분군의 편년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안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신라로 하여금 5세기 중반 삼척·강릉 일원을 둘러싼 고구려와의 각축을 무난히 극복하고, 6세기 중반 황초령·마운령 지역까지 진출이 가능하게 하였다. 진흥왕은 568년에 황초령과 마운령을 순수하였다. 그 해에 比列忽 州(안변)가 達忽州(고성)로 移置됨으로써 신라의 북방 영토가 위축된 것으로 이해 하여 왔다. 그러나 황초령과 마운령의 순수비는 진흥왕의 巡狩 몇 년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달홀주로의 州治 이동을 영토의 위축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異斯夫의 于山國 정벌이 이루어졌다. 실직주와 하슬라주 軍主 를 역임한 이사부는 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4세기 후반 신라가 삼척·강릉 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신라는 우월적 지위에서 우산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사부의 정벌은 우산국의 驕慢에 대한 ‘治罪’의 의미로 이루어진 군사적 무력 시위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신라는 우산국 특산물인 水牛[물 개]를 공납으로 징수할 수 있었으며, 이는 후일 唐과의 교류에서 신라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In this paper, I reviewed the process of Shill’s expansion to the eastern coast from the fourth to the sixth century, and particularly, explored the meaning of Isabu’s conquering Usanguk. The record of ‘janggang(爭疆)’ of Siljikgokguk and Eumjeupbeolguk in the early second century was considered irrelevant to the record of Siljikguk of Samcheok. This was because whereas Siljikgukgok has a character ‘谷, gok’ in its name, the records on Samcheok Siljikguk contain ‘原, won’, meaning a field. Therefore, as for the expansion of Shilla to the eastern coast, I focused on the archeological references on Pohang, Yeongdeok and Uljin, where Shilla potteries of fourth century were excavated, and excavations of Shilla potteries in Gangreung from the late fourth century.
Especially the record in the late fourth century that Shilla exempted Haseulla (Gangreung) from ‘租調, jojo (grain tax)’ for 1 year after the area suffered from severe drought and damage from locusts exhibits much significance. This reveals that Shilla had been collecting ‘租, jo’, a tax based on land and ‘調, jo’, a regional indigenous product from the Gangreung region, proving that, at that time, those regions, Samcheok and Gangreung, were completely under the control of shilla administratively. This is also directly related to the recent chronological issues arisen between the ancient tombs from Anhyeon-dong and Hasi-dong, Gangreung.
Such situation enabled Shilla to easily overcome the fierce competition on and around Samcheok and Gangreung in the fifth century against Goguryeo and advance toward the regions of Hwangchoryeong and Ma’unryeong by the mid-sixth century, where in 568AD, King Jinheung reconnoitered. It was considered that the northern territory of Shilla was contracted that year as Biryeolholju (Anbyeon) was absorbed to Dalholju (Goseong), but it is considerde that Campaign Monuments of Hwangchoryeong and Ma’unryeong were built a few years after King Jinheung travelled these areas. Therefore, the transition to Dalholju does not necessarily need to be interpreted a contraction in territory.
In the midst, Isabu went on a conquest of Usanguk. In 512AD, Isabu, who held the positions of monarch in Siljikju and Haseullaju, conquered Usanguk. In the late fourth century, after the expansion was made to the Samcheok and Gangreung regions, It seems like Shilla traded with Usanguk in a dominant position. Therefore the conquest carried out by Isabu is regarded as a retribution by military force against Usanguk’s arrogance. Through it, Shilla was able to collect seals, a regional indigenous product of Usanguk, as a tributary payment which were utilized in the future trading with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