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수산시험장에서 1932년 동해 해양조사에 따른 해류도를 사용하였다. 8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지구 온난화로 동해의 해류도 바뀌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사부함대의 항로를 중심으로 동해의 해류를 알아보고자 직접 고안한 해류병에 이사부해류병이라 명명하고, 2014년부터 2020년까지 해류병 2,020개를 투하하여 57개를 회수하여 동해 해류의 흐름을 알아보았다. 이사부 장군이 505년 실직 군주로 부임하여 ‘왜 7년 동안이나 실직에 있었을까?’ 이사부 장군은 하슬라에 입성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의 잔존 세력들이 남아있어 하슬라로 갈 수 없어 적의 후방을 급습하는 수륙양동작전을 계획하면서 전선을 만들었다. 이사부함대는 실직항에서 만들어져 강릉 안인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으로 고구려 군사를 물리치고 우산국 정벌 준비를 하였다. 이사부 장군은 목우사자의 계책으로 우산국을 정벌하고, 이사부함대는 우산국 복속으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신라 수군 진영인 울산항으로 가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본고에서 해류병 실험을 통하여 이사부항로에서 해류가 어떻게 이동하는지와 이사부가 수륙양동작전을 감행한 흔적들을 찾아보고, 이사부함대가 이동한 경로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토 균형 발전과 해양력 강화 차원에서 동해의 중심인 삼척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동해문화재과 신설과 동해해양유물전시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
서기 500년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고, 지방 행정구역을 주 · 군 체제로 정비하며, 국호를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신라(新羅)’로 정했다. 망라사방이란 신라의 국력을 사방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신라는 망라사방의 국가비전을 가지고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특히 동해안으로 진출하면서 우산국과 충돌하였으나, 512년 우산국을 복속함으로서 동해의 제해 권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 관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복속 기사를 가지고, ‘한국의 독도영유 권에 대한 역사적 권원(歷史的 權原)’을 주장한다. 역사적 권원이란 역사적으로 권리의 원천이 된다는 의미이다. 즉 이사부가 우산국을 신라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것 (fact)이 한국영토라는 권리주장의 시작이며 증거라는 것이다. 우산국 복속에 성공한 이사부는 그 후 병부령이 되어 한강유역과 대가야 정벌을 주도했고, 국사를 편찬하는 등의 과업을 수행하며, 신라가 사방으로 발전하여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이사부는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인물이며, 남해의 이순신, 서해의 장보고와 함께 동해의 이사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국의 3대 해양영웅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은 수도권 내 최초의 독도 박물관, 독도 가상 체험관 및 초·중·고 교과서와 연계된 입체 교과서라는 핵심기능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독도체험관은 현재 교육부 위탁 독도전시관 신규 구축사업, 서울시교육청과의 연 결 등을 진행하면서 독도 교육과 홍보를 진행하고 있다. ‘독도의 자연과 역사의 소통’이라는 전시 주제 아래 독도체험관은 다양한 기능을 겸비한 개념의 전사관으로 탄생했다. 독도 관련 역사 자료를 수립·보존·연구 하고 전시하는 박물간의 기능, 독도의 자연과 역사 등을 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 하여 경험할 수 있는 체험관으로서의 기능, 초중고 교육 내용과 연계되어 학습할 수 있는 입체 교과서로서의 기능이었다. 독도체험관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각 수행되어 오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독도영토주권에 대한 교육과 홍보에 시너지 효과를 주었다. 이사부 독도기념관은 도서, 학술연구자료, 유물 등 각 자료를 하나의 기관으로 집약해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서비스하는 통합형 전시관을 예정 하고 있다. 삼척을 넘어 전국의 독도, 삼국사 관련시설을 아우르는 거점 역할 수 행하는 것이다. 이사부 독도기념관은 이사부와 독도 라키비움을 추구할 예정이다. 라키비움은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의 합성어로, 도서관과 기록관 그리고 박물관이 3가지 기능을 모두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글에서는 상고기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동해안 진출, 悉直谷國과 悉直國의 실체, 또 중고기 신라의 동북방 진출과 悉直州 설치, 異斯夫의 해양활동과 于山國 정벌군의 출항지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척의 실직국이 안강의 음즙벌국 인근에 실직곡국이라는 변진과의 무역중계지를 운영하다가 영토분쟁이 생겨 상실하였다. 하지만 음즙벌국은 신라의 공격을 받 아 멸망하였고, 영일만 일대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러자 실직국은 해상활동과 함께 영일만 일대를 활용하고자 신라에 자진 항복하였다.
실직국이 항복한 이후 신라는 이 지역을 재지세력이 독립성을 유지한 채 통치 하는 간접지배 방식으로 계속 통치하다가, 5세기 말에 직접지배단계에 들어갔으며, 505년(지증왕 6) 실직주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삼척지역은 신라의 동해안 북변으로 진출의 중요한 군사적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중고기에 이르러 동북방으로 진출은 동해안 연근해 해로를 최대한 활용 하여 북방의 거점 확보에 노력하면서, 동시에 육로로 진격하여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육해 양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군주에 임명되자 중앙 정부에 선박 이용의 중요성을 건의하여 관련 제도를 정하게 하였다. 또 지증왕대 낙동강유역 금관가야 지역을 점령한 공로로 받은 가야계 사람들을 동북방 지역으로 사민시켜, 그들이 보유한 선진 해양기술을 접합시키고, 실직지역에서 군대를 양성 하여 수군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512년 하슬라군주로 옮긴 뒤 우산국을 정복 하였다. 우산국 정벌군의 주력 부대가 출항한 곳은 삼척지역이다.
결국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그곳의 토산물 수취와 동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경제적 부를 확보하였고, 그 결과 정치군사적 영웅이란 명망과 함께 곧이어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기념관은 특정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시대, 현장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며, 잊고 있던 기억과 만나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추모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특정 역사적 대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념관에서의 교육기능은 더욱 중시된다. 기념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크게 전시관을 안내하고 관람을 지원하는 교육서비스부터 대상과 주제 등에 따라 강의, 체험활동, 답사 등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프로그램, 기념관이라는 물리적으로 벗어나 기념 대상의 학습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아웃리치(outreach) 프로그램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현재 대표적인 역사 교육기관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독립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방문자 유형 및 내‧외부 환경을 고려하여 기관의 특성에 맞게 교육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사부기념관은 해양인물 이사부를 통해 우리나라의 동해 개척과 독도수호의 역사를 알리고, 국민들의 영토의식 함양을 위해 강원도 삼척에 만들어질 공간이다. 이사부기념관이 국민이 즐겨 찾는 역사학습공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관의 설립목적에 따라 관람객이 기억하고 학습해야 하는 목표와 내용을 명확히 정해야 한다. 더불어 이사부기념관을 방문할 관람객 유형과 수, 즉 수요를 예측하 고 이에 맞춘 이사부기념관만의 교육서비스와 프로그램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활성화되고 있는 기념관들의 현황을 참고하여 중장기적인 차원 에서 운영 전략이 마련되어야 하며 전시 및 교육시설과 전문 인력, 예산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사부기념관이 영토 수호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역사교육기관이자 관람객이 즐겨 찾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기관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부 장군은 신라의 옛 영토를 탈환하기 위하여 육로로 진격하였고, 실직성을 탈환하여 지증왕 6년(505) 실직군주가 되었다. 실직군주로서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을 잠시 멈추고 실직에서 이사부 함대를 제작하였다. 이사부 함 대는 실직의 오십천 하류 정라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동해안 전체를 보아도 이만한 조건을 갖춘 자연항은 없었다. 정라진 건너불은 우산국과 거리가 가깝고 정 동방향이며 송림으로 싸여있어 파도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였다. 또한 인근에서 선박재료를 오십천 강물을 이용하여 쉽게 옮길 수 있으며 배후도시인 실직 성과 실직 제일의 갑자평야가 있었다.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사부 장군은 북진정책을 잠시 멈추고 왜구의 피해를 막고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산국 정벌을 먼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지증왕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이사부장군의 전략인지 알 수 없지만, 우산국을 복속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의 피해도 막을 수 있었으며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신라 가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500년 전 울릉도로 간다는 것은 명령과 유망, 표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이사부가 지혜 많은 젊은이고, 우산국 정복이 신라의 숙원사업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삼국시대의 선박 발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확인하기 어렵지만, 과연 이사부 전선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선에는 돛을 달았을까? 이사부 장군도 이 문제로 선박 기술자들과 많은 토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신라 전선은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사부 전선은 신라 전선 최초로 돛을 달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목우사자를 계획할 이사부 장군이라면 당연히 비밀병기인 전선 제작에 다른 나라의 최신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산국을 정벌하기 까지 6~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부 장군은 실직에서 전선을 만든 후, 하슬라를 탈환하여 국경을 넓히고 하슬라 군주가 되었다. 그 후 군사와 군비를 보충하여 실직의 군사와 함께 512년 6월, 이사부 전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가서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은 우산국을 복속하여 공물을 얻는 것 보다,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들의 침략을 근절 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남해의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의 불패 신화와 거북선의 신화가 있다면, 동해의 이사부장군은 한 번의 승전으로 200년간 신라를 평온케 한 목우사자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현명한 판단과 지략이 오늘날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와 함께 12해리의 영토와 200 해리의 경제수역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 영토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흔히 512년 이후에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산국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만약 신라의 땅이 되었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의 땅으로 울릉도나 독도, 아니면 우산국의 기록이 나와야만 한다. 도리어 울릉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땅이 분명한 이상 우산국 성립부터 한국사의 영역 속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탐라국․우산국․가야 등의 역 사를 포괄하는 고대사를 그려내야 할 시점이다. 우산국이 강성해지자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우산국이 아슬라주와 실직주 등이 침범함으로써 신라지역이 큰 피해를 입음으로써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지증왕으로서는 동해안 제해권을 확보하지 않는 한 삼척, 강릉 등의 지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 결국 우산국의 정벌에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지증왕대의 우산국 정벌은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대에 이르러 함경도지역까지 진출하는 교두보의 확보라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동해안 지역의 경제력 확보, 제해권의 확보를 통해 고구려에 대한 서해안과 동해안의 양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라에 귀복하여 신라와 연합 동맹을 구축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복속국가로 존재하면서 보다 높은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우산국체제는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 시대까지 이어졌다. 11세기 초반의 동여진 해적들이 동해안을 통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동여진 해적의 내침을 막는 것이 심각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한 군사 정책을 수립하며 동해안 방면 축성과 수군, 함대 배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종 3년 이후 고려 침공에 어려움을 겪은 동여진 해적들은 이후 공격 목표를 현종 9년~13년까지 우산국, 일본으로 돌려 많은 피해를 입힌다. 동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우산국은 더 이상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주민의 대다수가 고려에 망명하여 고려 군현에 편적될 정도였고, 농기구의 지원의 명목이지만 고려의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우산국’이란 명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복속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는 출항 할 때 어떤 종교 의식을 행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기사는 없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금석문이나 자료들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종교 의식을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알기 위하여 본문에서 동해에서의 신앙 전통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시대별로 정리하였고, 현재의 민간신앙 전통에 대하여 폭넓게 살펴보았다. 그 결과 東海를 배경으로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또는 바다로부터 올 수 있는 나쁜 액살을 막기 위해 신라 이래 고려와 조선시대에 東海에서 용왕 을 주요 신령으로 모셔서 제사를 지냈다는 각종 기록이나 설화는 매우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재 동해안에서의 민간신앙 전통에도 영향을 미쳐 마을 단위 제의에서 바다에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삼척과 울진을 비롯하여 울릉도에서도 하위 제차로 용왕제를 지내고 있음을 폭넓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사부 장군의 출항지로 여겨지는 오십천 하구의 사직동 서낭당에서 모시는 신령은 성황ㆍ토지신과 함께 용왕을 위패 형태로 모시고 있으며, 인근의 근덕 덕산 서낭당에서도 용왕을 모신다. 이를 통해 동해안에서 용왕을 모신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그 형식은 산신이나 성황신을 협시하는 형태로 모시거나, 마을 고사를 지낼 때 하위 제차로 용왕제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 복속을 위한 작전에서의 안전과 승리를 위해 행하였을 종교의례에서 상당신으로 天神이나 山神 등을 모셨고,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하위 제차에서 용왕을 모신 용왕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 수군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어과정에서 점차 강화되었고, 이사부는 강화된 신라 수군을 거느리고 6세기 초에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의 전선들은 삼척포구를 오후에 출항하여 원시항해술시대의 안전한 대양항해술인 정방향 대양항해술에 따라 울릉도로 향했다. 이사부 해양정신의 첫째는 해양 진취적 도전정신이다. 신라 청년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항해가 있었다. 우산국 정벌 항해는 당시로서는 모험이었고 매우 특별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사부 해양정신의 둘째는 선구적 영토 개척정신이다. 신라는 6세기 지증٠법흥٠진흥왕 때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우산국과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다. 이사부는 이러한 영토 확장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이사부 해양정신의 셋째는 계보를 잇는 수군 명장의 정신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수군 명장은 이순신, 왕건, 장보고, 이사부라 할 수있다. 이사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군 명장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이사부 리더십의 첫째는 신라 수군의 기반 구축이다. 신라 수군은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작전에서 그 기반이 다져지고, 이후 발전을 거듭해 삼국통일전쟁기에 그 실력이 크게 발휘되었다. 이사부 리더십의 둘째는 출장입상의 국가운영 리더십이다. 출장입상은 전쟁터에 나가면 장수로,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으로 활약한다는 뜻이다. 이사부는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6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출장입상하며 신라 발전의 초석을 쌓았다.
이 글에서는 이사부의 신라영토확장과 우산국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몇 가지 사항을 중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우선, 이사부 관련자료를 그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보다 치밀하게 검토한 바, 그 출생년대는 이를 전하는 기사가 찾아지지 않으므로 추정하기 어렵지만, 그 사망년대에 대해서는 관련자료를 적극 검토하여, 이사부는 562년 가야 정벌과 관련된 기사 이후 그 추적이 어려우며, 당시의 나이(대략 77세)를 고려할 때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추정해 보았다. 다음으로, 『國史』의 편찬과 연관하여 그 편찬 목적과 의의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그 자 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는 논의에 동의하면서, 더 나아가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의 국가발전과 관련하여 중국문화의 수용과 그 변화 내용을 담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관련자료를 통하여 검토해 보았다. 그 증좌로 지증왕대 이후 중국과 밀접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國史』의 편찬과 연관이 있었으며, 그 결과가 『三國史記』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추론해 보았다. 그 다음으로, 신라의 영토확장과정과 우산국에서는 기왕에 신라에서 소국을 어떻게 편제하였으며, 특히, 실직과 우산국의 편제 방식이 다른 점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실직은 소국으로서 신라사회와 다양한 접촉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반해 하슬라는 실직을 거점으로 편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에 반해 우산국은 朝貢을 통한 편제 방식이 보이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례를 분석하여 이에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끝으로, 우산국 정복 관련자료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바, 지금까지 『三 國史記』관련자료만을 신뢰하여 그에 근거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三國遺事』에 보이는 기사를 중심으로 다른 의미를 부여해보았다. 그 결과 『三國史記』에 보이는 우산국 기사는 導論的 성격이 강한 의미로 해석하여, 『三國遺事』의 우산국 정복 결과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여 새로운 의견으로 제시해 보았다.
조례는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의 사무를 규율하기 위하여 지방 의회의 의결을 거쳐 자율적으로 제정하는 규범을 말한다. 여기에서 과연 삼척시 의회가 “이사부의 날 제정” 조례를 제정할 수 있는지, 제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내용과 효력을 가진 조례까지 가능한 것인지는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여야 하지만, 그 출발점은 조례의 법적 성격과 국내법 질서와의 조화에 관한 논의라 하겠다. 기본적으로 조례 위임입법설은 조례제정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된 권한으로 보는 것이다. 헌법, 법률, 법률의 수권에 의해 명령 및 조례가 제정되는 것으로 조례는 명령과 같이 위임입법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조례 자주입법설은 고유권설의 당연한 결론이기도 하지만 자치권을 국가로부터 전래된 권한으로 이해하는 입장 안에서도 행정권의 일부가 아니라 통치권이 위임된 것으로 본다면 이에 의한 조례제정을 위임입법으로 볼 필요가 없게 된다. 삼척시 의회가 제정하게 될 이사부의 날 조례 제정과 관련 유사 선례로는 일본 ‘죽도의 날’ 제정 현 조례, 마산시 의회의 대마도의 날 조례, 경상북도 독도의 달 조례, 울릉군 의회의 울릉군민의 날에 관한 조례가 있다. 비록 지난 18대 국회에서 폐기되기는 하였지만 독도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안, 독도의 날 제정에 관한 청원 등의 선례도 있다. 마지막으로 울릉군 독도명예주민증 발급 규칙과 같이 상위규범에 따른 규칙 제정의 선례로 살펴보았다. 조례 초안에서 제1조는 조례의 목적과 정의, 적용범위 등의 내용으로 구성하였 다. 제2조는 이사부의 날 지정일에 관련 양력 8월 3일로 의견을 합치하였다. 제3 조에서는 각종 기념 행사와 의식, 지적재산권 및 권리와 의무 등 다양한 법률 관련 문제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초안을 규정했다. 비록 지난 제18대 국회에서 의원 입법안 2건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의 중 임기만료로 폐기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사부의 날’ 제정에 관한 삼척시 의회의 조례 제정은 조례의 자치입법 성격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유사한 선례를 비교 검토해 볼 때에도 삼척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조례제정은 어떠한 무리를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삼척시가 다년간 추진해 온 ‘동해’를 아우르는 이사부의 선양사업의 취지와 역사적으로 이사부에 의한 우 산국(울릉도와 독도) 복속 1,500년이 갖는 역사적 상징성과 시의 적절성을 고려할 때 삼척시 의회 주도의 조례 제정의 의미는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끝으로 만일 시간적 여건으로 인해 필요한 경유 지방자치단체의 장에 의한 ‘규칙’ 제정으로도 이사부의 날 또는 이사부 축전 등 입법안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이사부의 우산국 편입 1500주년은 우리에게 있어 동북아시대 해양국가로서 한반도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기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남해안을 호령했던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서해안과 남해안을 기점으로 해상무역을 개척한 장보고에 비해 동해안의 이사부장군의 국가적인 인물선양은 초보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선양사업은 국가적인 정책으로 추진되어왔다. 축제만 하더라도 통영의 한산대첩축제, 진도의 명랑해전축제, 여수의 거북선축제, 출생지인 충남 아산의 성웅 이순신축제 등 많은 축제들이 있어왔다. 현재 삼척에서의 이사부의 선양사업은 단기적인 1회성 축제에만 머무르고 있어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의 조성과 프로그램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사부 기념관의 조성 등 의미 있는 선양사업이 준비되고 있지만 상시성에 초점을 두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사부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문화콘텐츠의 접근방법인 이야기 (story), 상징(symbol), 스펙터클(spectacle)의 3요소를 적절하게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사부의 날을 어떻게 기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기억과 추모를 넘어서 미래 지향적인 방향을 가져야 할 것이며 기념사업에 대한 제도화 및 법제화를 통해 지자체와 정부에서 이사부 정신의 전국화 및 기념사업의 안정화도 동시에 가져와야 할 것이다. 특정일이 아닌 이사부 출항의 근거지였던 삼척에 오면 상시 이사부를 만날 수 있는 공간과 시설,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할 것이며 될 수 있으면 이사부의 날을 전후로 한 축제시기를 조정하여 기념사업에 대한 파급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김이사부는 신라사와 민족사에서 의미깊은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켜 동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신라의 해양력을 강화시켜 삼국을 통일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21세기는 강대국들 간의 해양력 경쟁이 불가피하다. 한국 및 중국 러시아 일본은 동해에서 갈등과 충돌이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사부는 역사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미래의 인물 내지 정책 모델로서 삼을 필요가 있다. 기념일을 제정하려면 몇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첫째, 김이사부의 행위, 신라의 정책과 사상성, 동해와 울릉도의 실질적인 위상과 정신성 등을 반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김이사부를 군사적 영웅으로만 해석하거나 부각시키지 말고 정치가로서 부각시키는 관점이 필요하다. 셋째, 김이사부의 우산국복속을 현재적 의미, 미래적 가치를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으로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기념일은 역사기록을 존중하여 음력 6월에 해당하는 7월 하순또는 8월 초순이 바람직하고, 한민족의 사상성과 민속, 미래가치를 지향해서 3일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척의 이사부 축제는 지역적 연고가 있던 이사부라는 역사인물을 현대의 축제의 소재로 활용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부각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독도를 비롯한 영토수호의 역사인물임을 드러냄으로써 범지역적 축제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창출해 내었다. 이 연구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우륵의 12기에 나타난 사자연행과 이사부의 목사자 전투는 진흥왕 이전 신라사회에 사자문화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통용된 사자연행예술은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존재했다. 따라서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서 사용한 목사자는 당대에 신라에 유통된 외래문화였으며, 이후 사자는 여러 연행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둘째,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서는 사자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이 이용되었다. 이것은 이사부의 해군부대가 우산국 전투에서 목사자의 전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하여야 했기 때문에, 고정형 목각양식으로는 우산국 사람들을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부의 목사자는 고정형 목각양식이 아니라, 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사부는 삼척 강릉지방의 지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 강릉단오제에 모셔졌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삼척 오분동 마을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이렇듯 1500년 전 역사인물 이사부는 지금까지 삼척 지역에서 신격화 되어 숭앙받는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사부 축제는 삼척 지역의 지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축제의 이념적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삼척시는 이사부 축제를 국가의 외교문제와 연관시킴으로써 국가와 연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울릉도를 생활권으로 하고 있는 독도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2005년 일본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재정으로 고조된 한일 외교문제와 연관된다. 따라서 삼척시는 축제에서 이사부의 소재를 독도 및 해양에 확장시킴으로써 축제향유 계층을 국민으로 확장시켰으며, 더불어 국가차원의 지원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축제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삼척시의 이사부 축제는 기존의 지역 역사인물을 발굴하여 연결시킨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투영된 자치단체의 축제화는 이사부를 포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취지 아래 다양한 국가사업과 연계함으로써 지역의 문화기반을 마련하게 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문화콘텐츠 가운데 한국 전체나 특정 지역과 연계되어 있으며, 이미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거나 확보할 필요가 있는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특히 해양 인물과 관련해서 대표적인 것은 ‘이사부(異斯夫)’와 ‘장보고(張 保皐)’ 관련 문화콘텐츠다. 이사부는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울릉도 독도와 관련해서 주목을 받고 있고,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데서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해양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순수한 창작으로만 완성하는 문화콘텐츠와 다르다. 바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와의 거리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이기에 해양 인 물을 대상으로 한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성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해양 인물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나 형상화에는 학술적 결과물에 의해서만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의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도를 확보하는가도 중요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해양 인물을 어떻게 문화콘텐츠로 개발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며, 문화콘텐츠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필자는 그 해답을 스토리텔링에서 찾고 싶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내용과 기술, 매체를 아우르는 일종의 서사방식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문화콘텐츠의 개발로 해양 인물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대중들과의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양 인물 관련 연구자와 지방자치단체, 지역민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국가발전에 있어서 해양진출은 대륙진출보다 위험성은 있으나, 그 진취성과 개방성으로 영향력이 크다. 이러한 사실은 Rome, Saracen의 역사와 Portugal, Spain, Netherland 그리고 영구에 의해서 이룩된 대서양시대를 볼 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도 백제가 일찍 서해로 진출하여 해양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처음으로 나타냈다. 신라의 경우 한반도의 동남부에 편재되어 있어 해양진출이 어려웠고, 더구나 왜구의 계속된 침입으로 유일한 탈출구인 동해로의 진출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5세기에 이르러 신라는 국가적 성장은 가능했으나 고구려(광개토왕 장수왕)의 남하로 내륙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동해안으로의 북진을 통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하가 약화되면서 신라는 한강유역으로의 진출과 동시에 동해안으로의 진출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이 우산국 정벌이며, 이를 계기로 왜국의 침범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신라의 첫 번째의 해외진출이었다. 그 후 신라통일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대당 접근으로 당을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없었다. 신라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은 9세기 후반 이후였다. 나 당 양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해적의 횡포가 증가되면서 제2의 해외진출의 필요성에서 장보고의 활동 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산동반도뿐 아니라, 강소성, 절강성 일대에 신라의 활동으로 드디어 해양개척 무역입국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후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해외진출이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에 제3의 해양진출로 독도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다.
이사부 테마파크의 기본 구상은 독도라는 우리의 해양영토와 동해(東海)에 대한 범국민적인 교육현장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다. 이 시대 우리는 왜 이사부를 깨워 동해바다에 우뚝 세우고 있는가. 이사부의 영정을 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청년 장군 이사부의 모습으로 되살렸는가. 그것은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와 동해’ 침탈야욕을 분쇄하기 위함이다.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한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해오고 있다는 역사성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 이다. 이사부 테마파크도 그러한 시대정신과 국민여망을 반영하여 주제를 ‘이사부 와 동해’로 하고, 소주제를 1)이사부와 고대해양활동 2)울릉도 독도 수호의 역사 3)독도의 생태와 수중자원 4)동해(東海) 자료관 5)한국의 해양영웅 등 5개로 설정했다. 이사부테마파크의 위치는 이사부장군이 우산국 정벌의 출항지로 삼았던 삼척시 오분항 일대로 설정했다. 오분리 고성(古城)과 그 아래의 오분항 지역, 그리고 오 십천 하구와 건너편 부지까지 주 사업대상으로 하고, 인근 맹방 장호 갈남 고포 증산 추암까지 보조사업지로 포함시켜 해양체험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구상이다. 이사부테마파크의 공간구성은 진입공간, 주제공간, 체험공간, 놀이공간, 숙박공간, 휴게공간, 주차공간, 다목적공간, 관리공간 등으로 구분했다. 진입공간에는 상징조형물 등 주제부각 및 감동적인 경관을 연출하고, 주제공간에는 이사부의 국가표준 영정을 모시는 사당(祠堂) 주제관(전시공간) 공연장 해양영웅관 야외공연장 등을 배치하며, 체험공간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 실외의 오십천 하구와 바다에서 이사부뱃길체험을 하고, 실내에서는 삼척-울릉도-독도 뱃길 답사 외에 다양한 가상현실체험을 하도록 했다. 놀이공간도 실내외로 구분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숙박공간은 수학여행단 또는 여러 동아리 등 단체관람객들이 사용 하는 공간으로 했으며, 휴게공간에는 기념품점, 음식점, 찻집 등을, 다목적공간은 심포지엄 강의 소규모 그룹활동과 이벤트를 겸할 수 있게 했다. 테마파크는 놀이시설과 같은 하드웨어적인 요소와 함께 소프트웨어적 부분인 쇼이벤트로 구성되는데, 테마파크는 사실상 ‘이벤트랜드’라고 불릴 만큼 이벤트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 주제에 충실하면서도 관람객들에게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이벤트 프로그램이므로 삼척시에서는 이벤트의 소재가 되는 이사부와 동해, 해양영웅 관련한 학술적인 성과물과 함께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사부의 해양개척정신을 이어받아 우리의 해양영토주권을 보다 확고히 하고 신 해양시대를 주도하는 국민교육의 장이요 인재양성의 보고(寶庫)가 될 이사부 테마파크는 마땅히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오분항과 산성(山城) 일대의 발굴과 복원, 그리고 이사부 테마파크 조성 사업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주관하고, 건립 후 운영까지 직접 수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