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story meaning of Isabu's subjection of Usan-guk
흔히 512년 이후에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산국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만약 신라의 땅이 되었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의 땅으로 울릉도나 독도, 아니면 우산국의 기록이 나와야만 한다. 도리어 울릉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땅이 분명한 이상 우산국 성립부터 한국사의 영역 속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탐라국․우산국․가야 등의 역 사를 포괄하는 고대사를 그려내야 할 시점이다. 우산국이 강성해지자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우산국이 아슬라주와 실직주 등이 침범함으로써 신라지역이 큰 피해를 입음으로써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지증왕으로서는 동해안 제해권을 확보하지 않는 한 삼척, 강릉 등의 지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 결국 우산국의 정벌에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지증왕대의 우산국 정벌은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대에 이르러 함경도지역까지 진출하는 교두보의 확보라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동해안 지역의 경제력 확보, 제해권의 확보를 통해 고구려에 대한 서해안과 동해안의 양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라에 귀복하여 신라와 연합 동맹을 구축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복속국가로 존재하면서 보다 높은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우산국체제는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 시대까지 이어졌다. 11세기 초반의 동여진 해적들이 동해안을 통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동여진 해적의 내침을 막는 것이 심각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한 군사 정책을 수립하며 동해안 방면 축성과 수군, 함대 배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종 3년 이후 고려 침공에 어려움을 겪은 동여진 해적들은 이후 공격 목표를 현종 9년~13년까지 우산국, 일본으로 돌려 많은 피해를 입힌다. 동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우산국은 더 이상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주민의 대다수가 고려에 망명하여 고려 군현에 편적될 정도였고, 농기구의 지원의 명목이지만 고려의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우산국’이란 명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They often say that Ulleungdo and Dokdo became territory of Silla since 512. Considering the record of 'the kingdom of Woosan promised to offer local products every year', the kingdom of Woosan was not incorporated into Silla's territory. If it had become the land of Silla, record of Ulleungdo, Dokdo or Woosan kingdom had to appear as Silla's territory in 『Samguk Sagi』 Jiriji. As far as it is historically clear that Ulleungdo is our land, it is more persuasive to include establishment of the Woosan kingdom into Korean history for explanation. It is the high time to describe ancient history covering that of Tamraguk, Woosan kingdom and Gaya.
As the Woosan kingdom became strong, it invaded Aseullaju and Siljikjju instead of rendering tribute to Silla; and, Silla got a great damage and therefore, it seems that Isabu started conquest of the Woosan kingdom. Silla's King Jijeung must have judged that he could not stably maintain Samcheok and Gangneung area without securing maritime power of the eastern coast and therefore, he must have go on a conquest of the Woosan kingdom.
From the viewpoint of securing a bridgehead to advance even to Hamgyeongdo area during the King Beopheung and Jinheung period, it is understood that conquest of the Woosan kingdom during the King Jijeung had a special meaning. Through securing economical power and a bridgehead in the eastern coast area, it was possible for Silla to conduct a demonstration operation against Goguryeo in the western and eastern coast.
Being subjected to Silla, establishing alliance with Silla and existing as a subjected country to render tribute, the Woosan kingdom accepted more advanced culture of Silla and the kingdom system continued up to Goryeo age passing through Husamguk.
In the early 11th century, Dongyeojin pirates started to invade Goryeo through the eastern cost. Recognizing that it was serious to prevent invasion of Dongyeojin pirates, Goryeo established military policy and concentrated on an establishment of fortification in the eastern coast as well as arrangement of the naval forces and the fleet. That's why Dongyeojin pirates who met difficulties in invasion to Goryeo since the 3rd year of King Hyeonjong and they cahnged their attack target to the kingdom of Woosan and Japan to cause great ldamage during the 9th to 13th year of King Hyeonjong. Due to invasion of Dongyeojin, the kingdom of Woosan could no more stand on its own feet, most residents fled the country to Goryeo, the kingdom was most incorporated into Goryeo gunhyeon, and therefore, it had to accept Goryeo's officials under the name of support of farming tools. In such process, the name of 'Woosan kingdom' disappeared from the stage of history without any more appea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