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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지금까지 축적된 삼척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유물과 묘제[무 덤]을 정리·분석하여 이 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양상을 파악하고, 문헌자료를 함께 검토하여 삼국시대 이전에 삼척을 중심으로 형성·발전해 나갔던 실직국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함에 그 목적을 두었다. 삼척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양상은 ‘중도유형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예[동예]의 문 화양상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척지역 내 철기시대 주거지는 해안사구 지대에 집중적으로 입지하며, 凸자형·呂자형·(장)방형의 평면형태를 띠고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양한 노(爐), 바닥 점토다짐, 벽체마감시설 등과 화재로 인해 폐기된 집자리가 다수 확인된다. 주거지 유적 내에서는 중도식토기[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와 함께 외래계토 기[영남계·낙랑계토기]와 이를 모방한 새로운 토기양상도 확인된다. 그리고 진· 변한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량의 옥장신구와 청동세환[소환] 등이 출토된다. 이러한 문화적 양상을 볼 때,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는 주변지역의 정치세력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면서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재지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 으로 보인다. 한편 삼척지역을 포함한 강원 영동지역 내에서는 철기시대 묘제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실직국이 삼한의 정치체와는 달리 옥저의 지상식 목곽 묘의 장례문화를 공유하여 지상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흔적이 남아있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와 삼척지역 내 주거지와 신라고분을 살펴본 결과,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와 실직국은 신라가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5세기를 전후하여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점차 해체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는 신라화 과정 속에서 해체되어 갔지만, 고고학적으로 영동지역 최대의 마을유적인 동해 송정동유적에서 다양한 외래계유물과 철기생산과 관련된 단야공방지가 다수 확인되는 점, 이후 실직주가 설치되어 군사적 전략기지 [수군기지]의 역할을 담당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 역사·문화적 위상은 높게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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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사료의 重層性을 전제로 실직국의 복속 과정과 이에 대한 신라의 지배 형태 변화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실직국의 복속을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조는 󰡔삼국유사󰡕 왕력 지마이질금조와 저본을 달리해 작성되었다. 그 저본의 찬자는 실직국과 음즙 벌국 사이의 분쟁, 그리고 사로국의 중재에 대한 자료를 소재로 실직국의 항복 과정까지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 정리했다. 파사대의 정복기사는 탈해대·지마대의 대외확장을 강조한 기사와 저본을 달리해 重層的으로 봉합되었다. 파사 23년조는 대외확장에서 파사이사금의 업적을 중시한 저본에 토대를 두었다. 왕력 지마이질금조는 신라본기 파사23년조보다 상대적 신뢰도가 높지만, 절대적 신뢰도를 담보하지 않는다. 실직국은 옥계, 하장, 원덕 일대를 지배했다고 전하는데, 실제 지배 범위는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동해시 송정동 일대에도 大邑落이 존재했을 것이다. 실직국은 동해안 교통로와 영서 방향 교통로의 결절지라는 입지조건, 동예와 진한의 중간적 위치 등을 기반으로 주변 邑落을 통제했고, 음즙벌국과 동해안의 교역로를 두고서 경쟁했다. 3세기 후반∼말경 동해안의 교역 에서 사로국이 금관국에 대해 우위를 보이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이 주도하는 교역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중엽부터 사로국과 고구려의 교섭이 본격화하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에 복속했다. 실직국 干層은 공납을 바치고 기항지 이용권을 제공하는 대신, 읍락 간층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실직국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일부 간층은 자치권의 일부를 유지했다. 실직 지역은 何瑟羅城에 비해 방어기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5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남한강 상류 방면으로부터 압박해 오면서 悉直城의 據點城 기능은 강화되었고, 간층의 자치권은 약화되었다. 실직성 주변의 읍락들은 5 세기 후반경 村으로 편성되었다. 5세기 말 이후 신라는 거점성별로 전략적 기능과 옛 소국에 대한 지배기능을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실직성이 다수 거점성에 대한 관리 기능을 부여받아 505년에 悉直州가 설치되었다. 6세기 초까지 유력 간층을 대상으로 복수의 干群 外位와 非干 외위가 편성되었다. 간군 외위자는 비간 외위 자의 보위와 非외위자의 협조로 道使의 통치에 협조했다. 그런데 512년 何瑟羅州 설치, 524년 이전 실직주 재설치 등에 따라 외위의 운영은 변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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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 동해안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집단은 濊國과 悉直國으로서, 이들은 濊[東濊]계의 일원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금까지 실직국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적, 역사고고학적, 순수고고학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직국의 실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합리적 이해는 현재 충분하지 않다. 본 연구는 삼척·동해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제한하여 최근까지 조사된 철기시대 유적·유물을 검토하여 실직국의 문화 양상과 그 변천과정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실직국 관련 철기시대 유적들은 영동지방에서와 같이 해안사구지대에 입지하는 呂자형·凸자형 주거지와 중도식토기를 공반하고 있어, 소위 中島類型文化를 공유하는 동예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직국 관련 철기시대 주거지들은 대체로 呂자형·凸자형 주거지가 시기적으로 선행하고, (장)방형계 주거지가 후행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일부 凸자형 주거지와 (장)방형계 주거지가 늦은 시기까지 함께 공존하는 양상도 파악된다. 실직국 관련 유적 중, 동해 송정동유적은 지금까지 영동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마을유적으로 확인된 점, 최고의 위계를 상징하는 유물과 주변지역(한군현, 진한, 변한, 마한 등)과의 활발한 대외교섭 행위를 시사하는 외래적인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점, 철기생산과 직접 관련된 공방지가 존재하는 점 등에서 실직국과 관련된 강력한 집단세력이 거주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실직국의 장례문화는 종족상으로 보아 옥저와 같은 가족장을 위한 지상식 대형목곽묘를 공유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오늘날까지 지상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직국에 거주했던 예의 종족들이 남긴 물질문화를 통해서, 실직국은 적어도 기원 1세기부터 기원 4세기 무렵까지 동예사회의 공통적인 물질문화를 유지하였으며, 한군현과 진변한 등 주변 세력과의 대외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까지 확인된 실직국 관련 고고자료를 통해서, 실직국은 대체로 강릉의 예국사회와 같이 대동소이한 문화변동의 단계를 거쳐 전통문화가 점차 해체되면서, 신라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신라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직국은 적어도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에 신라문물이 유입되고 확산되면서 이후 토착문화를 대신하여 신라 영역화에 따른 신라문화권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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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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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직국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新羅本紀 婆娑尼師今 23년조에 등장한다. 이후 실직국은 단편적인 기록과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상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초기기록은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으므로 실직국과 관련기록 역시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다만 실직국 관련 기록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압축하여 정리하였을 가능성은 높다. 여기에서는 파사니사금 23년조의 기록을 이 같은 입장에서 분석하여 실직국의 정체와 역사적 위상을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영동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면 신라가 동해안 일대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동해안을 통한 교역과 교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4세기 이후 영남일대에서 급증하는 북방계 문물은 동해안을 통한 교류를 상상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신라가 영동지역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동해안의 어느 소국이 동해안 연안해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소국이 바로 실직국으로 추정된다. 사로국이 실직국을 병합하였다는 기록은 3세기 후반경 실직국이 가지고 있었던 동해안 해상권을 차지하였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실직국이 영동지방에서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실직국의 지리적 위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일대는 영동지역에서 기항지로서의 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실직국은 이를 바탕으로 동해안 연안해로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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