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environment of the articles related to Siljikguk(悉直國) and the change of ruling system by Silla(新羅)
실직국 관련 기사의 자료환경과 신라의 지배형태 변화
본고는 사료의 重層性을 전제로 실직국의 복속 과정과 이에 대한 신라의 지배 형태 변화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실직국의 복속을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조는 삼국유사 왕력 지마이질금조와 저본을 달리해 작성되었다. 그 저본의 찬자는 실직국과 음즙 벌국 사이의 분쟁, 그리고 사로국의 중재에 대한 자료를 소재로 실직국의 항복 과정까지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 정리했다. 파사대의 정복기사는 탈해대·지마대의 대외확장을 강조한 기사와 저본을 달리해 重層的으로 봉합되었다. 파사 23년조는 대외확장에서 파사이사금의 업적을 중시한 저본에 토대를 두었다. 왕력 지마이질금조는 신라본기 파사23년조보다 상대적 신뢰도가 높지만, 절대적 신뢰도를 담보하지 않는다. 실직국은 옥계, 하장, 원덕 일대를 지배했다고 전하는데, 실제 지배 범위는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동해시 송정동 일대에도 大邑落이 존재했을 것이다. 실직국은 동해안 교통로와 영서 방향 교통로의 결절지라는 입지조건, 동예와 진한의 중간적 위치 등을 기반으로 주변 邑落을 통제했고, 음즙벌국과 동해안의 교역로를 두고서 경쟁했다. 3세기 후반∼말경 동해안의 교역 에서 사로국이 금관국에 대해 우위를 보이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이 주도하는 교역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중엽부터 사로국과 고구려의 교섭이 본격화하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에 복속했다. 실직국 干層은 공납을 바치고 기항지 이용권을 제공하는 대신, 읍락 간층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실직국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일부 간층은 자치권의 일부를 유지했다. 실직 지역은 何瑟羅城에 비해 방어기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5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남한강 상류 방면으로부터 압박해 오면서 悉直城의 據點城 기능은 강화되었고, 간층의 자치권은 약화되었다. 실직성 주변의 읍락들은 5 세기 후반경 村으로 편성되었다. 5세기 말 이후 신라는 거점성별로 전략적 기능과 옛 소국에 대한 지배기능을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실직성이 다수 거점성에 대한 관리 기능을 부여받아 505년에 悉直州가 설치되었다. 6세기 초까지 유력 간층을 대상으로 복수의 干群 外位와 非干 외위가 편성되었다. 간군 외위자는 비간 외위 자의 보위와 非외위자의 협조로 道使의 통치에 협조했다. 그런데 512년 何瑟羅州 설치, 524년 이전 실직주 재설치 등에 따라 외위의 운영은 변화했을 것이다.
This article attempts to understand the subjection process of Siljikguk and the change of ruling system by Silla. The 23th year article of ..Samguksagi(三國史記).. Sillabongi(新羅本紀) Pasa-isageum(婆娑尼師今) illustrating the subjection of Siljikguk were written based on the other text than the Jima-ijilgeum(祗磨尼叱今) article of ..Samgukyusa(三國遺事).. Wangryeok(王曆). The editor of that text even described the submission process of Siljikguk as one event based on the materials on the conflict between Siljikguk and Eumjeupbeolguk (音汁伐國) and the mediation of Saroguk(斯盧國). The 23th year article of Pasa(婆娑) is based on the text which emphasized the achievement of Pasa-isageum in foreign expansion. The Jima article of Wangryeok is relatively more reliable compared to the 23th year one of Pasa, but it does not guarantee the absolute reliability. It is said that Siljikguk governed the area of Okgye, Hajang and Wondeok. However, it is possible that the actual area had been changed. Siljikguk controlled the surrounding Eupnak(邑落) based on not only its position as nodal region of East Coast traffic route and the route toward Yeongseo(嶺西) but also its location in the middle of Dongyae(東濊) and Jinhan(辰韓). It also competed with Emjeupbeolguk for trade route of East Coast. As Saroguk became superior compared to Geumgwanguk(金官國) in terms of trade in East Coast in the late period of 3rd century, Siljikguk started to cooperate in the trade that was led by Saroguk. Since the beginning of the 4th century, Siljilguk was subjected to Saroguk as the negotiation between Saroguk and Goguryeo(高句麗) started to hit off. Gan(干) class of Siljikguk offered tribute and provided the right to use the port of call in order to preserve the right to control Gan class of Eupnak. Even after suppression of rebellion against Saroguk, some Gan class preserved the autonomy. However, as Goguryeo started to pressure from the upper part of Namhan River since the mid-5th century, the role of base of Siljik-Fortress became fortified and the autonomy of Gan class weakened. Eupnak around Siljik areas were reorganized into Chon(村) in the late 5th century. After the late 5th century, Silla adjusted function of ruling over small countries and strategic functions by each base fortress. In this process, Siljik-Fortress got managerial functions for several base fortresses and Siljik-Ju(州) was installed. Until the early 6th century, several Gan-series Woewui(外位) and None-Gan Woewui were organized for Gan-class. Gan-series woewui cooperated to the reign of Dosa(道使) with the cooperation of None-Gan Woewui and the aid of None-Woewui. However, the function of Woewui in Siljik seemed to have changed according to moving of the base of Ju(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