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history and relics of Inje Hangye mountain fortress
한계산성에 대해서는 그간 정확한 규모나 상성, 하성의 구조와 접근로, 기타 내부 건물지나 부대시설물지에 대한 현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못하였는데, 지난 2010년부터 필자가 조사하여 새롭게 확인된 사항은 대략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상성과 하성의 구분이 명확하게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종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막연하게 천제단 근처가 상성이라고만 여겨져 왔으나 이번 조사에서 상성의 구조와 위치가 명확해 지게 되었다. 둘째는 하성의 새로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하성내에서는 계곡부 동측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계곡 반대편에도 여러 건물지와 바위그늘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셋째는 상성내에서 새로운 유물 출토지를 찾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상성내에서의 유물은 대부분 대궐터에서 수습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여러 곳에서 새로운 유물이 채집되었다. 넷째는 산성 원성(元城)과 별개로 축조된 돈후(墩堠) 시설물이 2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통로에 대한 근접 감시는 물론 일시적인 차단을 통한 지연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는 산성으로의 다섯가지 출입로가 정확하게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출입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사항인 바, 이번 연구를 통하여 산성으로의 접근로가 명확하게 파악되게 되었다. 한계산성은 초축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중세시기 활용에 대한 명확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몽항전(對蒙抗戰)의 마지막 단계에서 승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259년(고종 46) 몽고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고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를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부내륙 지역이 몽고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서 승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당시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한계산성을 확장하면서 크게 개축한 것은 바로 대몽고전에서 승전하였다고 하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한계산성은 중세시기 험지위주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성곽의 확장, 별설의 돈후(墩堠) 시설물 축조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There has been no definition information on Hangye mountain fortress including accurate size, upper fortress and lower fortress structure, entrance route, internal building site and subsidiary facility site. The below has been figured out through this study. Firstly, the distinction between the upper fortress and the lower fortress has been clearly clarified. There was no accurate understanding and distinction between the upper and lower fortresses in existing records. Thus, it was conjectured that the upper fortress might be the one near Cheonjedan. But, this study made clear structure and location of the upper fortress. Secondly, the new building site of the lower fortress was confirmed. In the existing lower fortress, building site was found in the east of valley area. But, this investigation found that there were various building sites and stone shadow dwellings at the opposite side of the valley. Thirdly, a new relic excavation site was found in the upper fortress. Majority relics in the existing upper fortress were collected at the palace site. But, new relics were collected from various places in this investigation. Fourthly, Donhu (defense facilities made outside the fortress to monitor attackers and to prevent them temporarily) facilities were found at two sites apart from Wonseong mountain fortress. These facilities were established to make a close monitoring of traffic route and to take delay of attack by means of temporary blocking. Fifthly, accurate entrance route to the mountain fortress was figured out. The entrance route in relation with the use of mountain fortress is very important, and this study makes it clear. While the initial construction period of Hangye mountain fortress was still a matter of conjecture, there is an apparent record of use in the 13th century. In particular, this is a historic place to win over the Mongolian invasion by Goryeo at the final stage. Thanks to the victory of this battle, the central inland of the country could escape from the plunder of the Mongolian troops. When there was a severe military tension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in Goryeo because of the Anti-Won Dynasty policy, Hangye mountain fortress was expanded and hugely renovated, which was directly related to the victory of the battle against the Mongolian troops. Besides such historic meaning, Hangye mountain fortress is a typical case of a mountain fortress built at a rugged mountain in the middle ages, which demonstrat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medical mountain fortress such as expansion of existing fortress wall and construction of Donhu facili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