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는 신라이래 고려시대까지 군현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피현 (本彼縣, 신라)·신안현(新安縣, 757)·벽진군(碧珍郡, 후삼국)·경산부(京山府, 940)·광 평군(廣平郡, 981)·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 1295)·성주목(星州牧, 1308)·경산부(京 山府, 1310)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1401년(태종 1) 태종의 태실(胎室)이 조성되면서 다시 성주목(星州牧)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몇 차례 현(縣)으로 강격(降格)을 거듭하다가, 1745 년(영조 21)에 다시 성주목으로 환원되었다가 1895년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23부제(府 制)를 실시할 때에 성주군이 되었다. 이후 이웃 지역과 몇자례의 면(面)·리(里)의 행정 분리 조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주는 신라시대 때에는 그만큼의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성주읍 지역에 있던 신안현(新 安縣)은 성산군(星山郡) 소속 4개 영현(領縣)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일대의 지역 중심지는 현 성주읍 지역이 아니라, 옛 성산군의 치소가 있던 낙동강변의 현 경북 고령군 성 산면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경산부와 조선시대 성주목으로 경상도의 상주, 진주 와 함께 3대 목(牧)의 하나로 번영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성주목이 지녔던 지역적 위상은 이 미 고려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성주는 고려시대 이후 한말까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성주 ‘6이(李)’와 함께 성주배씨(裵氏)와 성주도씨(都氏)가 유명하다. 성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여섯 이씨 가문은 모두 다른 시조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이총언(李悤言)의 등장 이후 성주 지역에서는 이씨 성을 칭한 가문들 사이에 세력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여 겨진다. 이총언(李悤言)·이능일(李能一)·이장경(李長庚)·이조년(李兆年)·이승경(李承 慶)·이승휴(李承休)·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숭인(李崇仁)·배극렴(裵克 廉)·도길부(都吉敷)와 조선시대 인물인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이진상(李震相)· 김창숙(金昌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성주 가암리와 동포리, 봉정리, 어산리, 용봉리 등에서 토기 및 자기산포 지가 지표상 확인되었으며, 성주읍 예산리 동방사지 칠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0호) 과 가천면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 수륜면 백운리 석탑부재, 가천면 창천리 청명사 석불좌 상과 같은 불교 관련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성주 시비실, 예산리와 기성리, 학산리, 대성리 그리고 성산 옥성리 유적에서 이루어졌다.
본고는 성주지역에 분포한 선사∼삼국시대 유적에 대해 정리하고, 지역 내 삼국시대 고 분의 편년과 성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성주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그 시작은 구석기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성주읍과 선남면 일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다수 출 토, 채집되었고, 지역을 관류하는 이천(伊川), 백천(白川), 신천(新川) 등의 소하천 유역에 형 성된 하안단구상에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지역 내에서 확인된 바가 없지만, 성주와 인접한 김천지역의 송 죽리유적을 비롯하여 합천, 거창 등지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확인되는 것을 토대로 성 주지역 내에서도 신석기시대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낙동강 및 지역 내 소하천 등지에 입석, 지석묘, 유물산포지 등 53개소 정도가 보고되어 있고, 성주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모두 165여기 이며, 입석은 6기이다.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유적도 지역 내에서 다수가 조사되었는데, 특히 백전·예산리유 적은 원삼국시대 전기에 목관묘를 축조하고 철기를 사용한 세력이 당시 성주지역 내에서 성 장,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대외교류 등을 통해 철기류와 같은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삼국시대가 되면 지역 내 3대 고총고분군인 성산동고분군, 수죽·용각리고분군, 명 천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많은 수의 고분군이 조영되는데, 60여개소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지 역 내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성산동고분군 내에서는 22호분, 48호분, 수죽·용각리고분 군에서는 수죽리고분군Ⅱ 30호분, 353호분, 명천리고분군 내에서는 6호분 등이 최근 발굴 조사되었고, 성산성과 할미산성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도 최근 실시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한 조사가 지역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성주지역 내 삼국시대 고분에 대한 편년은 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성산동고분군을 중 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지역색이 강한 성주양식 토기가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낙동강 이동지역까지 확인되며, 대형의 판석조 석곽 역시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낙동강 중상류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친 축성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축성 사업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었는데 1기는 북방개척으로 시작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 진출과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과정에서 축성이 이루어졌고 윤관이 개척한 9진을 여진에게 반환하기까지 약 200년의 기 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먼저 왕건의 북진 정책에 따라 서경을 서도로 정하여 축성하고 서 경의 주변으로 진성이나 주현성을 배치하는 과정과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축 성, 그리고 동여진을 제압하기 위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동해연안의 축성, 그리고 9진 개척 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이것은 태조가 북방개척을 위하여 변경 지역의 요해처에 진성[鎭城]을 설치한 후에 주성 [州城]을 설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의 전 쟁을 치르게 되면서 축조된 성곽들은 대부분 흥화도(영삭진성, 태주성, 신도성, 가주성)·흥 교도(용강현성, 함종현성, 진국성, 안북부성, 진국성, 안정진성, 영청진성, 박주성) ·운중도 (운남현성, 성주성, 연주성, 운주성, 안수진성, 흥덕진성, 위화진) 등의 역로를 따라 위치하고 있어 거란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노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보조에 남은 성곽 축조 기사 중 동일한 성곽을 축조한 기사가 겹치는 것은 지역 의 사정에 따라 주성, 진성 등을 축성하였고 단순히 하나의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조선 전기 지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른 다면 평지성이나 산성으로 나누어 볼 소지도 다분하다고 하겠다. 2기는 금과 100년 간의 평화 시기 다음에 이어진 대몽항쟁기에 축조된 성곽이 축조된 시 기이다. 대몽항쟁은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해도에 축성한 강화중성과 외성, 진도 용장성, 장도토성 등은 고려의 토성 축조 전통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 다. 아울러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몽항쟁은 주현성을 중심으 로 치러졌고 이것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몽골 기병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대산험 지에 위치한 산성[주현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몽항쟁이 주현 성에서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관점이 아닌 것은 주현성과 산성이라는 구분 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북계와 동계의 방어군성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므로 몽 골과의 전장은 처음부터 산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산성이 대형화되었다 는 것도 고려 주현성의 둘레는 조선 읍성보다는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고 군관민이 함께 입 보하여 항쟁하려 한 전략적 결정에 따라 산성의 둘레도 따라서 커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3기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맞아 연해주군의 군현성을 수축하거나 산성을 축조하여 방 어한 시기에 해당되며 대몽항쟁기 이래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 려말 산성의 축조는 왜구가 해로를 장악하여 조운선도 약탈하는 지경에 몽골 침입 때와는 달리 해도입보라는 대책은 무용하게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몽항쟁기에 둘레 1,000보 이상의 대형 석축 산성이 아니라 500보 내외의 석축성으로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것은 대규모로 장기간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군과는 달리 소규모로 자주 침공하였던 왜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침공이 시작된 경인년(1350)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우왕3년(1377) 에 지방 산성 보수기사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성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평지 에 위치한 군현성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우왕3년경부터는 산성을 수축하 여 입보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축성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경인년 이후 수축이 이루어진 군현성은 대부분 평지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때 수축된 군현성은 조선시대 들어 읍성으 로 편입되면서 읍성의 축조가 고려말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운용하였던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산석성인데 석축을 강조한 것은 고려시대 토축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여 석축성으로 축조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산성에 물이 부족하거나 물이 없다고 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 입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축조하였거나 일시적인 입보를 위하여 수축하였다가 조선전기까 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읍석성 중에는 조선시대 들어 축조한 읍성과 고려말에 석축으 로 개축한 이후 읍성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고려의 군현성으로 축조된 것을 조선시대 들어 읍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정에 따라 편입한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고려때 축조된 읍토성과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축조한 산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군현에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읍성이 보이지 않거나 산성 또는 고적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고려말의 성곽 수축과 조선 개국 이후의 읍성 축조 정책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현재 성주지역에는 고대산성으로 알려진 성산성, 용각산성, 성주 할미산성 등이 있고, 고 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성곽으로는 성주읍성, 가야산성, 독용산성 등이 있다. 성주지역이 가야의 고지로서 대가야와 경계를 함께하였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성곽을 가 야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가야 성곽의 축조수법과 안정된 토층에서 가야의 출토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한 보다 신중하게 검토한 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자료로 제공되 어야 할 것이다. 성주지역 고대산성과 인근지역 고분은 서로 간에 시기 차이가 있다. 이들 고대산성은 신라가 진출한 시기와 유적의 입지, 축성 목적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주체 및 산성의 성격, 구체적인 축성시기 등을 밝히려면 체성벽과 성문, 집수 지, 성내 건물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고려시대 경산부(京山府)의 중심지로 보고 있는 성산성과 성주고읍성의 관계, 그리고 조 선시대 성주읍성의 옛 동문지 기록과 평지 토성의 증축 가능성 문제, 고려시대 토성의 범위 확인과 조선시대 성곽과의 중첩관계 등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사용 척도에 대한 고증, 그리고 고려시대 축조된 토성과 조선시대 증축 또는 중 종 15년(1520)에 개축된 석성과의 범위 관계도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입보용산성은 몽골 침입과 관련되어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최근에는 그 시기가 나말 여초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가야산성과 독용산성은 평지에서 멀리 떨어진 험 산대성(險山大城)이다. 가야산성 내에서 조선 전기 및 그 이전 시기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 으며, 독용산성 남문지 하부에서 토축 성벽이 확인되어 이들 산성은 축조시기가 고려시대까 지 소급될 수 있는 전형적인 입보용 산성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산성에 대한 발굴조 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구체적인 입보용산성의 초축 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성산성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55,780㎡, 둘레 는 약 2,000m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테뫼식 산성으로 알려져 있고 1963년에 사적으로 지 정되었다가 1966년 12월에 사적 해제되어 현재는 공군 00부대 대공방위를 위한 군사시설 이 위치하고 있다. 성산성에 대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있었지만, 그 성격과 축조시기 등 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고지도와 고문헌에 따르면, 성산성은 산성이 아닌 봉수가 있는 것으로 표기된 자료는 다 수가 존재한다. 성산성은 최소한 조선시대에는 그 존재적 가치가 없는 상태이거나, 그 존재 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여 활용가치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668년 경산(지 금의 성산)에 관련된 사찬지인 경산지에 의하면, 성산봉수대 꼭대기에 옛 성터와 절터가 남아 있으며, 저수지도 있다고 기록한 것이 유일하다. 성산성에 대한 조사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1917년 일제강점기 일본학자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사적 제91호로 지정될 당시인 1963년의 조사내용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명 확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으며, 1966년 지정해제 당시의 문화재위원회의 실태조사 내용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2008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부분적으로 시ㆍ발굴조사 등이 이루어져 성주 성산 성의 체성 일부 등이 조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사를 담당한 연구조사기관에서 성주 성 산성의 체성 둘레를 추정하여 제시한 바 있다. 여러 문화재 전문조사기관에서 시행한 지표조사 결과 추정한 성산성의 평면은 부정형의 다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산성 특히 치소성(治所城)의 평면 형태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성산성은 군부대가 이미 오랜 기간 주둔하여 상당한 지형 훼손이 이루어져 축조 당시의 둘레와 진행 방향을 추정하기가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그리고 각종 지표조사와 각종 시(발)굴조사에서 상당한 양의 기와편과 도기편, 일부 청자편 도 수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최근의 조사에서는 건물지와 함께 막새기와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상황을 볼 때 성산성이 치소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치소성이 산 위에 있는지 또는 산 아래에 있는지에 대하여 이미 상당한 논쟁이 있지만 고려시대 전체를 일괄하여 단정 짓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성주 성산성 정밀지표조사를 통하여 획득한 성과는 체성부 의 윤곽선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성산성의 정체성을 추정할만한 근거가 되는 문지, 건물지, 연지 등과 함께 봉수대의 위치를 함께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의 성산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현지 여건상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 지만 금번 연구에서 성산성에 관련한 현존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분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고문헌, 고지도를 한 자리에 정리하여 자료화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앞으로 성산성에 관련된 자료가 더 확보되고 연구가 지속되길 기대하면서 이러한 연구에 조 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내용이었길 바란다.
고구려 초기 왕도(王都)인 졸본의 오녀산성은 평지에 있는 중국의 도성(방어성이자 도읍 성)과는 달리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산성을 방어성이자 치소성으로 삼아서 중 국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효율성을 증명하며 국세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 왕도 연구는 일본 인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주로 많이 하였는데 그들의 연구는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4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그의 논문에서 고구려 도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의 세트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설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10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통설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근 래에 여러 한국의 신진 학자들에 의하여 세키노 다다시의 고구려 왕성의 평지성-산성 세트 론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여러 번 나왔다. 양시은(2021)은 이러한 도식화된 이론의 시작과 정착과정 및 어떻게 일본, 중국, 한국의 학자들이 이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 로 토의한 뒤,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이론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 시민을 위한 한국사 서술이나 다른 학술 논문에서는 이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 이론이 보편화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고구려의 왕도는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가 아니고, 산 성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산성을 위주로 하여 외부 침략을 방어하고 나라를 경영하였다는 것 을 다음 다섯가지 고구려 왕도의 특징을 들어 검토하고자 하였다.(1)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산성이 주로 제1차적인 왕도이었다.(2) 고구려에서 왕도로서의 산성은 토속신앙 적 성지聖地이자 성전聖殿이었다.(3)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성(木柵城)과 비교해 보 면 한 부족이 대체로 목책으로 요새화된 성 하나를 방어성이자 거주성으로 하고 나머지 인구 는 목책성 주위에 방어벽이 없는 마을에 흩어져 살다가 위험시(외부 침략이 있을 때) 목책 요 새지에 들어가 함께 농성하였다.(4) 고구려의 외국침략자에 대한 방어 전술이 청야입보淸野 入保-게릴라전술이었는데 이러한 전술에는 산성이 평지성보다 더 큰 이점이 있었다.(5) 근 래 많은 고고학적 산성의 발굴 결과는 고구려의 산성-평지성 세트 방위체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졸본에는 아예 평지 왕성이 없었고, 그 다음 고구려의 수도 두 곳(집안, 평양) 모두 왕 도가 산성에 위치해 있다가 힘이 축적되고 필요를 느꼈을 때 평지성을 쌓아 왕도의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산성이 곧 방어성이자 치소성(도성)의 역할을 하였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이란 세트이론은 받아 드릴 수 없 다. 여기에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방어성과 고구려 산성의 비교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제 옥산성은 문헌 기록에는 조선 말 거제부의 산성으로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발 굴조사 결과 신라 때 이미 축조되어 대체로 고려 시대까지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조 사에서 나타난 산성의 하부 구조는 전형적인 신라 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다음 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옥산성은 7세기에 신라가 거제도를 직접 지배하고 또 이를 통 해 거제도 서쪽 방면에서 백제와 왜의 연결을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이다. 2) 문무왕 때 거제도에 군을 설치하면서 이 성은 상군 매진이현(경덕왕 때 거제군 명진현으로 개명)으로 편제되었다. 옥산성은 통일 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 중기까지도 명진현의 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3) 조선 후기 거제현의 치소가 마침내 옛 명진현 인근에 정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는 읍성을 축조하지 않았고, 조선 말 인근 고성을 수축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전통 시대 산성을 축조한 거의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거제도의 다른 신 라 유적과 함께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