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친 축성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축성 사업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었는데 1기는 북방개척으로 시작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 진출과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과정에서 축성이 이루어졌고 윤관이 개척한 9진을 여진에게 반환하기까지 약 200년의 기 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먼저 왕건의 북진 정책에 따라 서경을 서도로 정하여 축성하고 서 경의 주변으로 진성이나 주현성을 배치하는 과정과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축 성, 그리고 동여진을 제압하기 위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동해연안의 축성, 그리고 9진 개척 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이것은 태조가 북방개척을 위하여 변경 지역의 요해처에 진성[鎭城]을 설치한 후에 주성 [州城]을 설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의 전 쟁을 치르게 되면서 축조된 성곽들은 대부분 흥화도(영삭진성, 태주성, 신도성, 가주성)·흥 교도(용강현성, 함종현성, 진국성, 안북부성, 진국성, 안정진성, 영청진성, 박주성) ·운중도 (운남현성, 성주성, 연주성, 운주성, 안수진성, 흥덕진성, 위화진) 등의 역로를 따라 위치하고 있어 거란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노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보조에 남은 성곽 축조 기사 중 동일한 성곽을 축조한 기사가 겹치는 것은 지역 의 사정에 따라 주성, 진성 등을 축성하였고 단순히 하나의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조선 전기 지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른 다면 평지성이나 산성으로 나누어 볼 소지도 다분하다고 하겠다. 2기는 금과 100년 간의 평화 시기 다음에 이어진 대몽항쟁기에 축조된 성곽이 축조된 시 기이다. 대몽항쟁은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해도에 축성한 강화중성과 외성, 진도 용장성, 장도토성 등은 고려의 토성 축조 전통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 다. 아울러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몽항쟁은 주현성을 중심으 로 치러졌고 이것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몽골 기병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대산험 지에 위치한 산성[주현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몽항쟁이 주현 성에서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관점이 아닌 것은 주현성과 산성이라는 구분 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북계와 동계의 방어군성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므로 몽 골과의 전장은 처음부터 산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산성이 대형화되었다 는 것도 고려 주현성의 둘레는 조선 읍성보다는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고 군관민이 함께 입 보하여 항쟁하려 한 전략적 결정에 따라 산성의 둘레도 따라서 커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3기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맞아 연해주군의 군현성을 수축하거나 산성을 축조하여 방 어한 시기에 해당되며 대몽항쟁기 이래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 려말 산성의 축조는 왜구가 해로를 장악하여 조운선도 약탈하는 지경에 몽골 침입 때와는 달리 해도입보라는 대책은 무용하게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몽항쟁기에 둘레 1,000보 이상의 대형 석축 산성이 아니라 500보 내외의 석축성으로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것은 대규모로 장기간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군과는 달리 소규모로 자주 침공하였던 왜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침공이 시작된 경인년(1350)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우왕3년(1377) 에 지방 산성 보수기사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성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평지 에 위치한 군현성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우왕3년경부터는 산성을 수축하 여 입보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축성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경인년 이후 수축이 이루어진 군현성은 대부분 평지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때 수축된 군현성은 조선시대 들어 읍성으 로 편입되면서 읍성의 축조가 고려말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운용하였던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산석성인데 석축을 강조한 것은 고려시대 토축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여 석축성으로 축조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산성에 물이 부족하거나 물이 없다고 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 입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축조하였거나 일시적인 입보를 위하여 수축하였다가 조선전기까 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읍석성 중에는 조선시대 들어 축조한 읍성과 고려말에 석축으 로 개축한 이후 읍성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고려의 군현성으로 축조된 것을 조선시대 들어 읍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정에 따라 편입한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고려때 축조된 읍토성과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축조한 산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군현에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읍성이 보이지 않거나 산성 또는 고적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고려말의 성곽 수축과 조선 개국 이후의 읍성 축조 정책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장도유적은 통일신라 장보고의 해상유적으로 알려져 있고 장기간에 걸친 발굴조사를 거 쳐 당시에 축조된 토성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를 검토한 결과 828년 청해진 설치 에 따라 축조되었다고 보고된 장도토성(청해진성)의 기단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부분 10~12세기경으로 편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도토성의 축조 시기는 당연히 출토유물이 폐기되고 난 다음 시기인 12세기 이후로 판단되고 9세기 전반에 폐지되는 청해진유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장도토성은 토성 기단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축조시기가 12세기 이전으로 소급 될 수 없고 2~3차에 걸친 수측흔과 상감청자도 출토되고 있는 고고학적 상황도 장보고 관 련 유적이 될 수 없다. 또한 장도토성은 내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4기의 방형 치(雉)가 부 가되어 있는 점, 섬 앞으로 원목렬을 설치하고 우물을 보호하는 시설을 설치한 것은 항몽시 기 항파두성의 구조와도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항몽 시기에 송징장군이 완도를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전까지는 마을마다 송징장군의 제사를 지냈는데 장군을 주벽에 모신 사당이 장도에 남아 있었던 것, 장도 인근 에 위치한 법화사에 사역을 두르는 담장이 축조된 배경과 장도토성의 축조시기와 구조 등을 감안하면 고려의 항몽유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장도토성 내부에는 장도토성 축조 이전에 이미 건물지와 수혈, 매납유구 등이 조성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기를 주종으로 하는 다양한 제사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시기 는 9세기 후반 이후가 중심시기가 된다. 이것은 장도가 삼국사기 제사조에 기록된 중사 처 중의 하나로 기록된 조음도일 가능성이 높고 고려 전기까지 계속하여 제사가 이루어진 것으 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장도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사처였다가 고려의 대몽항쟁기에는 섬 을 둘러 토성이 축조된 것으로 장도에는 성격을 달리하는 두 시기의 유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Following a 5.8 magnitude earthquake on September 12, 2016 in Gyeongju Province, a magnitude 5.4 earthquake occurred in the northern region of Pohang City on November 15, 2017 in South Korea. Only 7.9 % of the building structures are earthquake-resistant, according to the recent survey conducted by the government agencies in October 2017. In this paper, the linear analysis seismic performance evaluation procedure of the existing school structures presented in the revised methodology(Seismic Performance Evaluation Procedure and Rehabilitation Manual for School Facilities) was introduced. In this paper, the linear analysis evaluation procedure presented in the revised methodology was introduced and the seismic performance index of the example structure was evaluated using the linear analysis evaluation procedure. The seismic retrofit was verified by the linear and nonlinear dynamic analyses using Perform 3D. The analysis results show that the dissipated inelastic energy is concentrated on the retrofitted shear wall and the maximum inter-story drift of the stadium model structure with damping system satisfies the requirement of the current code.
그라운드 앵커는 토목이나 건축의 구조물을 지반에 정착 또는 안정시키기 위하여 고강도의 강재로 연결하고 그 강재에 높은 긴장력을 도입하여 구조물에 구속력 또는 선행하중을 가하기 위한 효과적인 공법이다.
그라운드 앵커의 시험은 설계조건의 만족여부를 실증하거나 설계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실시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시험은 인발적성시험(Performance Test)과 크리프시험(Extended Creep Test) 등이 있으며 이중 크리프시험은 앵커설치 후 시간의 경과에 따른 하중감소를 예측할 수 있으며 장기거동에 대해 안전성확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다.
영구앵커를 지보공으로 하는 합벽식 옹벽 현장에서 영구앵커에 대한 시험을 실시한 결과 부분시료만 채취되는 심한풍화상태의 지반에 설치된 시험앵커 3공에 대해 인발적성시험을 실시한 결과 탄소성 한계곡선 내에 실측 변위가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나 앵커력 확보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라운드의 인발특성에 대한 연구도 최근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모형 락앵커의 반복하중 시험을 통하여 반복하중이 정적극한하중의 약 50% 미만으로 작용할 경우 락앵커의 안정성에 대한 영향은 거의 없음을 제시하였다.
또한, 건설 현장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그라운드 앵커의 거동특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계측기를 부착한 앵커를 화강풍화토에 설치하고 인발시험을 수행하여 지반과의 마찰계수, 크리프 변형율, 하중감도 특성을 평가하였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풍화암 지반에서의 극한강도와 크리프 변형 등을 파악하고 단기 크리프를 분석하여 앵커 거동특성의 예측방안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