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시대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지역에는 공산성(公山城)을 중심으로 시내 전역에 20여 개소의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없어 축성 시기라든가 축성 목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공산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막연하게나마 웅진시대 백제 왕도의 방비체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최근들어 산성의 조사 사례가 증가하고, 백제산성은 물론이거니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산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공주지역에 남아 있는 산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백제시대 왕도 방비체제와 관련시켜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인산성은 공주시 이인면(利仁面) 용성리(龍城里)에 자리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된 산성임이 분명한데, 해발 230m의 성재산 정상부에 삼태기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축성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믿어진다. 게다가 성내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백제기와로 볼 수 있는 것과 통일신라시대 기와로 볼 수 있는 것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인산성의 성격은 그 명칭에 잘 나타나 있다. ‘이인산성’처럼 ‘군현명+성’과 같은 형태의 산성들은 모두가 그 지역의 치성(治城)을 뜻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예를 들어 밀양 추화산성(推火山城)은 추화군(推火郡)의 치성(治城)이었고, 광양 마로산성(馬老山城)은 마로현의 치성(治城) 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이인산성은 이인지역의 치성(治城)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이인지역에는 군현(郡縣)이 설치된 적이 없고, 대신 부곡(部曲)이 설치되어 있었던 만큼 이인부곡(利仁部曲)의 치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이인산성의 삼태기형 평면형태는 이인산성이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무언가 치성(治城)의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이인부곡성(利仁部曲城)이었다고 생각된다.
성곽의 축조는 당대의 토목기술과 관념(정치상황과 국가간의 관계)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들은 유사한 축조수법과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양상은 창녕지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녕지역 성곽 중 낙동강 연안에 축성된 성곽에 대한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확인한 속성들을 분석한 결과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성곽들은 5세기에서 6세기 초반경 재지세력에 의해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성곽들의 특징 및 성격은 첫째, 낙동강과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축조된 성곽들은 200m 이하의 소형인데 반해, 창녕지역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지점의 성산산성과 웅곡리산성, 그리고 낙동강 중류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점의 구진산성은 대체로 400~600m로 대형에 속하지만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신라산성 중 규모가 소형인 산성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소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는 성곽의 규모로 보아 낙동강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낙동강 연안 성곽의 축조수법은 토성과 석성으로 나누어지며, 토성의 비율이 높다. 토성의 정확한 축조수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 시기에 축조된 다른 토성들의 축조 수법을 감안할 때 순수판축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성의 경우 허튼층쌓기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암괴가 노두된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음으로써 공력을 줄였다.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신라성곽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기의 내용으로 보아 낙동강 연안에 축조된 성곽들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련된 지역에 축성된 신라성곽의 특징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근거 역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성곽들이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왕조의 석축 산성에서 조사된 성벽을 관통하는 배수장치에 대한 기왕의 연구를 보충하였다. 조사된 사례가 3개소에서 12개소 이상으로 증가된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를 반영하여 형식적 구분을 다시 하였다. 성곽에서의 배수장치로서의 수문은 교량형(橋梁形)과 암거형(暗渠形), 누조(漏槽)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글에서는 특히 성벽 통과형 암거형식을 다루고, 그 시설된 숫자에 따라 단구식(單口式)과 다구식(多口式)을 구분하였다. 다구식은 성내의 수위 변화에 대비하여 수위(水位)에 따른 배수가 가능하게 만든 것들이다. 종래 출수구(出水口) 외면의 형태에 따라 형태를 구분하였던 점을 고쳐서 입수구와 출수구를 잇는 수로의 횡단면 형태에 따라 오각형, 사다리꼴, 사각형에 추가하여 삼각형의 유형이 있음을 새로 추가하였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방형 단면의 것들이며, 이런 형태는 신라 하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는 반면, 나머지 형태는 신라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축조되었다. 이들 여러 형태 가운데 단면 사각형은 중세와 근세의 산성까지 가장 오랫동안 시설되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기장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축조수법이 정형화된 형식으로 정리되기 이전에 축조되어 고려시대 성곽 축조수법과 조선의 읍성축조수법이 혼합되어 성곽축성사에 있어 읍성축조수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장읍성에서 확인되는 사직선기단의 축조는 과거 고려시대말까지 계속 축조된 판축토성(版築土城)의 기단부 축조방식을 읍성축조에 적용한 결과로 고려 판축토성에서 조선시대 석축성인 연해읍성의 축조로 이어지는 흐름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기장읍성 동벽 체성부에서 확인되는 세장방형 외벽면석 축조수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읍성의 장대석 입수적 축조수법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기장읍성 남벽과 동벽 체성부 기저부 축조수법은 김해읍성, 웅천읍성, 동래읍성, 고성읍성 등에서 확인되는 지대석 설치 이전에 바닥에 판석을 이용하여 바닥면의 수평을 맞추어 정리된 구조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축조수법이 사용되기 이전 시기에 축조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장읍성은 사직선기단축조수법, 체성부 세장방형 외벽면석의 사용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성곽축조수법과 조선시대 연해읍성 축조수법이 혼용된 과도기적 읍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坡州 烏頭山城은 臨津江과 漢江이 합류되는 位置에 있다. 서해에서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水路의 關門에 해당하는 군사 · 지리적 요충지이다. 또한 주변의 山城 가운데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三面이 바다로 둘러 싸여 적을 防禦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烏頭山城은 이와 같은 입지조건으로 인해 百濟 關彌\城으로 比定되어왔다. 關彌\城은 『三國史記』와 「廣開土王陵碑」에 백제와 고구려의 激戰地로 기록되었으나, 金富軾은 『三國史記』기록에 존재하지만 그 위치를 알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關彌\城 위치비정은 삼국 시대사를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많은 학자들이 기록을 통해 關彌\城을 찾으려 하고 있다. 오두산성은 『輿圖備誌』와 『大東地志』에서 처음으로 古山子 金正浩에 의해 백제관미성으로 비정된 이후로 역사지리적 관점과 역사적 정황에 의거하여 현재까지도 백제관미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백제 관미성을 江華島 및 喬桐島 隣近과 禮成江 인근지역으로 위치비정하는 見解도 說得力을 가지고 있다. 오두산성은 廣域 地表\調査의 一環 혹은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다가, 2007년도에 (財)韓白文化財硏究院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로 처음으로 산성의 전체적인 현황을 확인하였다. 조사결과 外城과 內城의 二重構\造로써, 추정 水口址 및 門址 2개소, 建物址 7개소, 우물 1개소, 산성 밖 遺物散布址 1개소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수습된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어졌음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로 標式되는 遺物과 遺構\는 확인되지 않았다. 烏頭山城이 백제 關彌\城으로 비정되기 위해서는 백제 및 고구려로 標式되는 遺物과 遺構가 다양하게 출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산성 전체에 대한 연차발굴이 진행되어 백제와 고구려와 관련된 많은 고고학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파주 오두산성이 백제 관미성이라는 견해는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서는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백제 관미성에 대한 江華島 및 喬桐島 隣近과 禮成江 인근지역 위치비정 역시 기록과 역사적 정황,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