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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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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33 (2025년 9월) 4

1.
2025.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읍성을 중심으로 구축된 방어체제가 한계를 드러내 자 산성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과 맺은 정축약조로 인해 산성 수축의 대상지가 하삼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외방산성의 수·개축은 조선 후기 산성 축성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본 연구에서는 하삼도 지역의 산성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주요 산성의 조사성과를 검토하고 중앙의 산성과 비교하 여 살펴봄으로써 조선 후기 산성 축성법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산성이 외성·중성 등을 포함한 복합적인 구조를 보이며, 대형화 되는 특징이 있다. 성벽은 병자호란 이후 수축된 남한산성의 사례처럼 허튼층쌓기에 쐐 기돌을 이용하여 틈을 보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또한 1711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은 입지에 따라 성벽의 높이를 달리하고, 마름돌 층지어쌓기, 다듬돌 바른층쌓기법 등이 도 입되는데, 이후 일부 지방의 산성 축성에도 적용되었다. 수성 체계에도 변화가 나타나 화기의 사용에 대응한 방어시설로 총안과 포루가 새롭 게 도입되었다. 총안은 여장 상면에 자연석을 활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포루는 치성과 결 합되거나 조망이 유리한 지점의 성벽 안쪽에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의 사례와 같이 용도 (甬道)와 같이 길게 이어진 치(雉)에 포루를 결합한 형태도 보인다. 조선 후기 산성의 축성법을 검토한 결과 외방산성은 중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입지, 전략적 가치, 사회적 상황 등에 따라 적절한 축성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추가 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조선 후기 산성의 축성법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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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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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 영진보성 중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체성의 축조방법을 확인할 수 있 는 23개의 성곽으로 외벽부(지대석, 기단석 쌓기방법)와 내벽부 축조방법에 대한 형식 을 설정 및 조합하여 유형을 분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출토유물과 문헌기록을 통해 수 축을 감안한 각 유형의 시간성을 파악한 논문이다. 그 결과, 기단석은 눕혀쌓기(Ⅰ)→섞어쌓기(Ⅱ)→세워쌓기(Ⅲ)→막쌓기(Ⅳ), 내벽부는 석축계단식(A)→석축다짐식(B)→토사다짐식(C), 지대석은 1단(a)→2단(b)→퇴화과정(c) 으로 변화한다는 대체적인 시간의 경향성이 확인되었다. 시기설정은 유형이 집중적으 로 출현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ⅠAa·ⅠBa·ⅡAa(1기)→ⅢBb·ⅢBa·ⅢCa(2기)→Ⅳ Ca(3기)→ⅣCc·ⅠBc(4기)유형으로 변화하는 대체적인 시간성을 보인다. 1기는 15세기 초에 해당하며, 고려시대 축성방법의 전통이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승 되면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수군의 성곽은 확인되지 않는다. 2기 는 15세기 후반~17세기 중반에 해당하나,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절대적으로 집중 되어 있다. 이는 본격적인 축성 논의와 삼포왜란을 거치면서 축성사업이 의욕적으로 진 행된 결과로 생각된다. 3기는 17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이전 시기와 달리 기단석 쌓기방 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는 기단석 쌓기방법 Ⅳ형식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를 상한으로 한다. 4기는 17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한다. 이 시기 에는 기단석 쌓기방법 Ⅰ·Ⅳ형식과 내벽 축조방법 B·C형식 등 많은 형식이 동시에 확인 되어 기준이 없어 보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지대석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따라서 영진보성 축조에 있어 1기는 조선건국(태조 1년, 1392)부터 15세기 전반, 2기 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 3기는 17세기 전반, 4기는 17세기 후반 이후로 설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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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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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성의 축성법은 군사적 상황과 외부 충격, 그리고 외래 성제의 수용과 변용 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 말 대몽항쟁기의 경험을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대규모 입보용 산성을 수축하였으나, 1429년(세종 11) 이후 읍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 환되면서 산성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조선은 다시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하였다. 명나라의 『기 효신서』가 전래되어 포루, 여장, 현안 등 새로운 축성 개념이 도입되었으나, 전시 상황의 제약으로 제한적 적용에 머물렀다. 조선 후기에는 병자호란에서의 홍이포 충격을 계기 로 성벽의 대형화·입방체화가 이루어졌으며, 포혈·돈대·총안의 표준화, 읍치의 산성 내 조성 등 구조적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축성법의 변화에는 중국 성제의 규식화와 일본 왜성의 곡륜형 옹성·완경사 성 벽·다중 성벽 구조가 영향을 주었으나, 조선은 이를 전통 기술과 융합하여 독자적 양식 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조선 산성은 단순한 방어시설을 넘어, 위기 대응과 외래 성제의 창의적 변용을 보여주는 복합적 군사 건축유산으로 평가된다.
7,000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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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거창 지역의 성지(城址)와 거열산성(사적) 및 분산성을 검토한 바탕에서 거열성과 거열주 만흥사산성을 비정하고 그 성격을 규명해 보았다. 거열성은 거열(거 타) 지역의 중심적인 성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거창의 중심지에 위치한 고대 산성인 분산성이 그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곳은 가야 때부터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으로 판 단되며, 여기에 성이 축조되어 거열성이라고 지칭되었을 것이다. 거열주 만흥사산성은 건흥산성, 즉 거열산성 2차성에 비정된다. 거열산성 1차성은 6 세기 중엽부터 군사 시설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을 거열성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는 당과의 전쟁 도중에 여기에 새로 만흥사산성을 축조하였다. 신라 는 가야 지역을 차지한 뒤 한강 유역과 같이 본격적으로 축성하지 못하였는데, 그 결과 백제에게 이 지역을 내주기도 하였다. 문무왕 13년(673) 만흥사산성의 축조는 당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기존에 뚫렸던 함양-거창-고령 루트를 보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 다고 판단된다. 본고에서는 문헌에 나오는 거열성과 거열주 만흥사산성을 일관성 있게 비정하고자 하였다. 그 논리는 단순한데 거열성과 거열주 만흥사산성은 마치 한산성(이성산성)과 한산주 주장성(남한산성)이 다른 것처럼 다르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문헌에 나 오는 성을 성지(城址)에 비정하는 것이 좀 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며, 이를 통해 고대 성의 성격과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6,6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