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와 홉긴스
제랄드 맨리 홉킨스 (1844-1889)와 윌리암 버틀러 예이츠(1865-1939)를 전적으로 다루어 비교분석한 논문은 극히 드물다. 다만 홉킨스와 예이츠 아버지 화가 존 예이츠와의 만남에 대한 언급을 한 논문은 특히 홉킨스 써클의 학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다. 이 두 시인은 직접적인 시와 시론의 영향을 서로 받은 적은 없다. 1886년 홉킨스가 예이츠의 “두 거인”이라는 정치시를 읽고서 생생한 이미저리와 멋진 시행을 발견할 수 있다고는 했으나 아직 미숙한 알레고리라고 한 적이 있고, 홉킨스가 캐터린 타이난과 예이츠 아버지와 만났을 때에 존 예이츠가 자신의 아들인 윌리암 예이츠가 쓴 “모사다”라는 시를 보여주자,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는 점이 두사람의 만남의 전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홉킨스가 예이츠를 존 예이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고, 예이츠는 홉킨스를 민감하고, 수다스런 학자로 기억했다고 한다는 점만이 유일한 두 사람의 “접속”일 뿐이다. 전기적인 사실로 볼 때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시인에게,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자아형성 과정에는 묘한 유사성과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예이츠의 Unity of Being과 홉킨스의 inscape와 instress에 근거한 selving process가 이 두 시인의 창작과정을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예이츠와 홉킨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존재와 생성을 인식하고 그 들의 시에 구현해 나갔는가를 추적하는데 그 주요 목적을 둔다. 예이츠는 “존재의 합일”의 구조를 인간의 육체에 유추하여 시각화하여 “다이몬적인,” “가이어” 적인 이중원추의 작용으로 구심적으로 존재와 앎에 대한 이해를 해나갔으며, 홉킨스는 인간의 육체의 “인스케이프”를 치환시켜 언어적으로 자기화 과정을 통해 “인스트레 스”에 의해 충전된 변화무쌍한 자아를 생성해 나가는 원심적인 접근방법을 취했다. 사실상 이 두 시인은 분신과도 같이 존재와 생성의 문제를 다루어 자신들의 시적자아의 순수성에 도달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이츠의 가이어를 홉킨스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영역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영역의 혼성적 상태와 대비시켜 논의할 때, 두 시인이 유추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대화를 그들의 시론과 시를 통해 나누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