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불교조각의 주제와 도상 -사천성 협강 천불암 마애를 중심으로-
9세기는 불교조각의 지역적 차이와 민중화가 가속화된 시대였다. 본고에서는 2009~12년에 사천성문물고고연구원 등과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천불암 마애 중에 9세기에 유행했던 미타정인을 취한 아미타상과 성승상에 주목했다. 불공이 한역한 밀교경궤에 설해진 미타정인상(像)은 협강에서 17건이 확인되나 그 안에서 밀교적인 성격은 찾아볼 수 없고, 삼불 혹은 사불병좌감에서 종래의 전법륜인상을 대신하여 아미타불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돈황벽화에서는 9세기에도 미타정인의 작례를 찾아볼 수 없기에 지역 간의 차이를 엿 볼 수있다. 천불암의 중심구(区)인 제91호감은 승가・보지・만회라는 삼성승상으로, 9세기에 일본 승려 엔닌이 같은 주제의 단감상을 가져왔다는 사료를 가지고 유추하면, 특히 수난구제(水難救済)와 행로안전(行路安全)이라는 이점을 바라고 청의강 기슭의 낭떠러지에 이를 조각했다고 간주된다. 현세이익적인 영험력에 대한 민중의 요청에 응했던 이러한 조상 주제의 유행은 그 배경에 토번이나 남조의 침공이 반복되었던 9세기 사천지역의 사회적 불안이 깔려있는 것이다.
九世紀には仏教彫刻の地域的差異と民衆化が加速した。小稿では 2009~12年に四川省文物考古研究院等との共同調査を実施した夾江千仏岩摩崖のうち、九世紀に流行した弥陀定印の阿弥陀像と、聖僧像に注目する。不空訳の密教経軌に説かれる弥陀定印の像は夾江では合計17件確認できるが、それらに密教的性格は無く、三仏または四仏並坐龕における阿弥陀仏の形式として、従来の転法輪印像に 替って採用されている。一方、敦煌石窟では九世紀でも弥陀定印の 例は見られず、地域間の相違が認められる。千仏岩の中心区の91号龕は僧伽・宝誌・萬迴の三聖僧像で、九世紀に日本僧円仁が 同主題の檀龕像を将来した史料から類推すると、特に水難救済、行路安全の利益が期待されて青衣江の崖に彫刻されたと考えられる。現世利益的霊験力に対する民衆の要請に応じたこうした造像主題の流行は、吐蕃や南詔の侵攻が繰り返された九世紀の四川地域の社会的不安を背景にし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