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막고굴의 경변도 중 서방정토변은 수량이 가장 많은 경변 중 하나이다. 이 경변도는 남북조시대 등장하였고, 당대에 접어들어 수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돈황 막고굴에 현존하는 서방정토변의 종류는 약 34 종 1200폭이 현존한다. 경변도의 출현시기부터 완성시기까지는 1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요구하였다. 돈황 막고굴의 서방정토변은 구도, 양식특징, 내용 등에 기초하여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4세기중엽~6세기중엽으로 단독상과 설법도 의 예가 현존한다. 서방정토 도상은 4세기 중엽부터 출현하기 시작하며 주로 단독상에서 확인된다. 병령사 제169굴 무량수불설법도(無量壽佛 說法圖, 424年)에서 벽화로 출현하였으며, 막고굴에서는 제285굴(538年) 이 대표적이다. 제2기는 6세기 중엽~7세기 말으로 서방정토변이 출현하는 단계이다. 맥적산 제127굴 서방정토변, 소남해석굴(小南海石窟) 중굴(中窟)의 서쪽 벽면에 새겨진 관무량수불경변(觀無量壽佛經變), 소남해석굴 동굴(東窟)의 서쪽 벽의 16관 부조, 남향당산석굴(南響堂山石窟) 제1굴 전실(前室)의 동굴 문 위쪽에 조각된 서방정토변, 돈황 막고굴 수대 제393굴 서쪽 벽의 전면의 서방정토변, 초당대 19개 동굴에 그려진 서방정토변이 대표적이다. 특히 돈황석굴 초당대(618~707년)의 44개 동굴 중, 19개의 동굴에 서방정토변이 현존하고 있다. 대다수는 전체 벽면에 큰 화면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구도와 내용은 이전 시대의 북조, 수대 서방정토변을 초월하지 못하며 수대 서방정토변을 계승하고 있다. 제3기는 8세기 초이며 서방정토변이 최후로 형성된 단계이다. 돈황막고굴이 가장 대표적인데 성당시대(705~786년)에 개착된 80개의 동굴 중 20여 개의 동굴에 서방정토변이 현존한다. 대부분은 대칭적으로 “未生怨”, “十六觀”의 도상을 도해하였다. 막고굴 제217굴의 서방정토변이 가장 전형적인 예에 속하는데 북쪽벽에 표현된 서방정토변에는 “未生怨”, “十六觀”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구도형식이다. 이후 서방정토변은 주로 이러한 표현형식이 성행하였고, 송대(예를 들면 제55굴)에까지 연속되었다.
663년 白村江戰鬪이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 유민은 일본 열도의 율령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에 중용된 자도 많지만 한편에서는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이 존재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문헌 기록에 남는 近江国(滋賀県) 蒲生郡의 유적들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 남겨진 「鬼室集斯墓碑」나 石塔寺三層石塔은 동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백제 유민의 기억에 관계된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동 시대의 유적으로서 사원유적이 중요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石塔寺의 근처에 위치하는 綺田[카바타]廢寺가 백제 유민과 관계된 사원이라고 추측하였다. 이사원의 創建瓦인 「湖東式」軒瓦는 일본열도에서는 특이한 문양을 갖고 있고, 새롭게 한반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 기점이 되는 사원이 近江[오오미]国愛知[에치]郡의 軽野塔ノ塚[가루노토오노츠카]廢寺이며, 愛知郡의 유력자인 依智秦氏[에치하타우지]로 추측되고 있다. 依智秦氏는 白村江에서 활약한 朴市田来津[에치노타쿠츠]를 배출했으며 백제 유민과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 이 依智秦氏의 寺院과 綺田廢寺가 기와에서 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5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에 도래한 사람들 이 7세기에 새로운 도래인의 정착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오래된 도래인이 기술이나 지식을 갱신하기 위해 새로운 도래인의 수용에 주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白村江에 참전한 일본 열도의 호족들이 귀국 후에 사원조영을 했다는 이야기는 『日本霊異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이 備後国三谷郡(広島県)의 大領이 백제계 승려인 禅師弘済와 함께 귀국하여 三谷寺[미타니데라]를 건설한 이야기이며, 그 무대라고 생각되는 三谷寺의 수막새와 塼積基壇이 그 증거라고 생각된다. 비슷한 사례는 각지에 더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문헌에 의해 판명된 사례로는 但馬国朝来郡(兵庫県)의 神直이 대 신라 전쟁에 종군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에 대해, 현지의 法興寺廢寺에서는 역시 한반도의 특색을 갖는 수막새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사례들은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비슷한 사례는 더 많이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7세기 후엽은 일본 열도에서 사원 조영이 급속히 진행된 시기이고, 새로운 기술자의 증대가 전망되기 때문이며, 중앙의 大寺와는 다른 기와를 창건 시에 이용한 사원의 대부분은 이런 새로 도래한 승려와 기술자를 받아들인 것으로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백제 멸망에 의한 새로운 도래인의 활동이 중앙 정부 이외에도 인정되며, 일본 열도의 문명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9세기는 불교조각의 지역적 차이와 민중화가 가속화된 시대였다. 본고에서는 2009~12년에 사천성문물고고연구원 등과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천불암 마애 중에 9세기에 유행했던 미타정인을 취한 아미타상과 성승상에 주목했다. 불공이 한역한 밀교경궤에 설해진 미타정인상(像)은 협강에서 17건이 확인되나 그 안에서 밀교적인 성격은 찾아볼 수 없고, 삼불 혹은 사불병좌감에서 종래의 전법륜인상을 대신하여 아미타불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돈황벽화에서는 9세기에도 미타정인의 작례를 찾아볼 수 없기에 지역 간의 차이를 엿 볼 수있다. 천불암의 중심구(区)인 제91호감은 승가・보지・만회라는 삼성승상으로, 9세기에 일본 승려 엔닌이 같은 주제의 단감상을 가져왔다는 사료를 가지고 유추하면, 특히 수난구제(水難救済)와 행로안전(行路安全)이라는 이점을 바라고 청의강 기슭의 낭떠러지에 이를 조각했다고 간주된다. 현세이익적인 영험력에 대한 민중의 요청에 응했던 이러한 조상 주제의 유행은 그 배경에 토번이나 남조의 침공이 반복되었던 9세기 사천지역의 사회적 불안이 깔려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18세기 중국회화사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양주화단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휘상들의 문화적 성향과 경제적 영향력이 당시 그림시장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 商幇가운데 휘상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문사적 향유를 중시하는 경제성향에 관해 문헌을 통해 고찰하였다. 아울러 연관 작품들의 비교 분석을 시도하였다. 강남부자를 대표했던 안휘출신 상인들, 이른바 휘상들은 세 명이 상인이면 한명은 유학을 공부할 만큼 문풍이 만연했던 문헌국 출신들로서 賈而好儒란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 유교적 사회제도에서 천한신분의 상인계층에 속하면서도 문사의 풍격을 숭상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은 휘상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과 자부심은 안휘지역의 문화적 정서로부터 배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타의 상방보다 本鄕의식속에 각인된 地緣중시의 결속력도 남달랐던 휘상들은 소금이나 쌀. 차 등외에도 고향의 특산품인 서화와 문방용품을 취급하였다. 일찍부터 서화상품에 조예가 있었던 휘상들은 명대 중. 후반기부터 서화와 고동품 소장에 참여하는 한편 예술시장에 무리로 움직이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휘상들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 화단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안휘와 지형적으로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양주에서이다. 16세기를 전후하여 양주에 진출했던 휘상들은 청초부터 소금사업으로 축적한 막대한 자금을 문화 사업과 서화시장에 유입시켜 양주화단의 새로운 변화와 활성화에 본격적으로 기여하였다. 그 결과 상류지식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문인화를 현실적이고 대중적인 시장상품으로 전환시켜 서화시장의 유통구조에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였다. 특히 양주화단에 그림의 상품화가 본격화 되면서 작품가격 공개와 작품 값 흥정 같은 파격적인 현상들이 성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휘상들의 본향에 대한 각별한 자부심은 초일하고 분방한 안휘지역 화파의 화풍들을 자연스럽게 양주화단으로 전이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또한 안휘인들의 문화적 욕구 가운데 문사 숭상의 성향과 서화에 대한 조예는 양주지역에 서화소장과 감상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에 관심이 높았던 휘상들의 심미 취향은 대중적 성향의 서화상품화와 그림시장의 흥행을 조장하여 화가들로 하여금 창신에 대한 독특한 표현방식을 가시화시키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정치적 의미를 비교적 잘 나타내는 초기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는 이당(李唐)에 의해 그 체계가 세워지고 소조(蕭照) 등의 제자를 통해 더욱 발전하였다. 본 연구는 이당의 직제자인 소조가 고종(高宗, 1107∼1187)의 하명을 받아, 조훈(曹勳, 1098∼1174)이 지은 서응고사(瑞應故事) 를 토대로, <서응도(瑞應圖)>를 제작했다는 명대(明代) 장축(張丑)의 청하서화방(淸河書畵舫) 등의 문헌들을 근거로, 회화의 정치적 역할을 재조명한 것이다. “서응(瑞應)”이란 임금의 어진정치가 하늘을 감응시켜 나타내는 길한 징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소조는 서응고사(瑞應故事) 의 내용을 최소4권 이상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서응도 시리즈” 중, 본 연구에서 시각자료로 참고한 작품은 2009년 중국가덕춘계(中国嘉德春季)경매에 출품되었던 전(傳) 소조의 <서응도(瑞應圖)>이다.<서응도(瑞應圖)>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가 하늘의 뜻이고 민심 또한 고종에게 있음을 12가지의 일화를 통해 나타내고 각 장면과 장면 사이에, 그에 해당하는 설명을 삽입시켰다. 12가지 일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① 탄육금광 (誕育金光) ⑦ 황라척장 (黄罗掷將)② 현인몽신 (顯仁夢神) ⑧ 추사퇴사 (追師退舍)③ 기사거낭 (騎射舉囊) ⑨ 사중대 (射中臺)④ 금영출사 (金營出使) ⑩ 사중백토 (射中白兔)⑤ 사성우호 (四聖佑護) ⑪ 대하빙합 (大河冰合)⑥ 자주갈묘 (磁州竭廟) ⑫ 탈포견몽 (脱袍見夢) 한편, <서응도(瑞應圖)> 제작을 하명할 당시는, 고종이 남송을 건국한 전후의 시기로, 국가의 존립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금국(金國)의 계속되는 공격뿐만 아니라, 금국의 포로로 있던 선황(先皇)인 흠종(欽宗, 1100∼1156) 세력들과의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고종에게 황권강화 정책은 매우 시급한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은 황권계승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부황(父皇)인 휘종(徽宗, 1082∼1135)을 최 측근에서 모셨던 조훈에 게 ‘고종의 황권 계승이 하늘의 뜻임’을 확고히 하는 서응고사 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정책의 파급력을 더욱 신속히 넓히기 위해 그림의 시너지 효과를 이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소조에게 하명한 <서응도> 제작이다. 따라서 치밀한 구도와 전개 방식으로 제작한 <서응도>는 황제로서의 자격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인상깊게 나타냄으로써, 회화의 정치적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은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시절 제작한 화첩이다. 영조 18년(1742) 10월 보름날, 임술년을 맞아 경기도관찰사 홍경보가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 중에 삭녕 우화정으로 경기도 관내 최고의 시인 연천현감 신유한과 최고의 화가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들여 연천의 웅연까지 뱃놀이를 즐겼고, 정선은 이 이벤트를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두 점으로 그렸다. 그림의 제목대로 삭녕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장면과 웅연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는 장면을 각각 담은 것이다. 이 모임은 같은 임술년(1082)에 가졌던 북송대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660년 전의 고사(故事)를 추모하여 재연한 행사였던 셈이다. 이를 밝힌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 ‘의적벽부(擬赤壁賦)’ 일부, 그리고 정선의 발문(跋文)을 합하여 꾸민 서화첩이 《연강임술첩》이다. 기존에 알려져 있던 화첩본 이외에 새로이 2011년 11월 필자가 참여한 동산방화랑 기획전에 또 다른 《연강임술첩》이 공개되었다. 정선이 화첩의 발문에 밝힌 대로 세 화첩 가운데 두 번째가 출현한 셈이다.《연강임술첩》의 〈우화등선〉(도6)과 〈웅연계람〉(도7) 두 폭은 소동파 적벽부 관련 고사도이자 실경산수화이면서, 동시에 경기도관찰사의 선유 행사를 담은 기록화이다. 옆으로 긴 화면을 적절히 소화한 대가다운 구성방식을 보여준다. 고운 비단에 비교적 강한 먹을 쓰고 옅은 담채와 먹의 농담으로 늦가을의 정취가 살짝 감돌게 그렸다. 강변의 절벽과 암봉(岩峯)은 북종화풍인 농묵의 부벽준(斧劈皴)을, 먼 토산과 근경언덕은 피마준(披麻皴)과 태점(苔點)의 남종산수화풍을 구사했다. 남북종화풍을 조화시켜 임진강변의 풍광을 그렇게 담아낸 것이다. 겸재가 통상 현장사생을 거의 하지 않았듯이, 아마 두 점도 관아에 돌아와 기억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했을 것으로 본다. 실경그림과 실경현장을 비교하기 난감할 정도로 이상화 시켜 놓았다. ‘의취(意趣)를 살리며 외형 닮기에 소홀히 했다’는 당대 문인 이하곤(李夏坤)의 지적을 실감케 하는 진경작품이다. 그리고 좌우로 긴 풍경에 행사장면과 그 주변 등장인물이나 경물들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기록화적 성격까지 적절히 살려놓은 명작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말하는 “예술”이란 미술이나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로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은 문학이 중심이 된 운동으로, 다른 분야의 예술활동은 부수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문인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 대해서 문학과 문인들이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정도로 컸다고 볼 수 있음에도 기존 연구에서는 문학과 미술 간의 관계에 관한 고찰이 부족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문학과 미술이 어떤 관계였는가를 이른바 예술대중화논쟁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대중화논쟁이란, 프로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문학은 대중들에게 직접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주장에 대해서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가 운동의 대상을 예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지식인층과 계몽이 필요하는 대중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서 활동해야 한다고 반론하는 데에 시작된 논쟁이다. 예술대중화논쟁은 멀리 조선에도 전파되는 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으나 일본 국내에서는 문학논쟁에 그치지 않고 미술논쟁으로도 발전해 나갔다. 1928년 2월에 발표된 나카노 시게하루의 글 회화에 관한 긴급한 하나의 문제 (絵画に関する緊急なる一問題) 는 이른바 미술분야의 예술대중화론이며 이 논쟁에서는 쿠라하라보다 오카모토 토키(岡本唐貴)가 중심적인 논객이었다. 여기서 나키노가 주장한 것은 회화는 선동(煽動)을 위해 쓰여져야 하고 노동자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노동자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해 오카모토는 화면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어떤 정신성이 내포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카모토는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서도 미술의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이 부정해온 부르주아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였다. 예술대중화논쟁이 쿠라하라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술분야에 있어서도 오카모토의 주장이 힘을 가지게 되고, 원래 낫프(NAPF)에서 활동해온 화가들이 모색 중이었던 마르크스주의 미술이론을 몰아냈고 프랑스 중심의 미술이론에 좌익사상을 접목함으로서 새로운 방법론을 등장시켰다. 이로써 서양중 심적인 미술개념을 극복하자는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의 맹아적인 시도가 말살되었을 뿐더러 이론 면에서도 모순이 내포된 채 활동이 진행되었다. 또한, 오카모토의 승리로 대정기(大正期) 신흥미술운동의 핵심단체였던 “조형(造型)”이 새로운 활동장소를 찾아서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합류했는데 그 길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