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서성 오대산 불광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독특한 모습의 6각 묘탑이 남아 있다. 각 구성 양식은 구체적인 시대를 비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그 조성 배경과 사상적 의미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37년 기록 사진에 남아 있는 조사탑 이층 탑신 직령창 위에 그려진 액방(인방)과 인자 보간(인자형 두공, 인자 화반)의 모습은 남조 중기의 무덤 돌문의 아치형 문미에 표현된 인자 대공의 양식과 유사한데 이를 계승하여 회화적으로 변용된 모습이 당나라 장안의 황족과 귀족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들과 조사탑의 것을 비교해 보면 8세기 초부터 형태가 유사하며 개원 연간의 것과는 동일한 양식이라 판단된다. 기단부와 평좌 양식도 8세기 전반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불광사 조사탑의 인자 보간 양식은 당나라 시대의 변화를 거친 것으로 결국 조사탑은 8세기 전반기에 서안, 혹은 중앙 정권의 지원 아래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를 토대로 기존의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해 보면 동대전과 조사탑이 있는 사찰의 영역은 오대산과 불광사에 대한 고종과 측천무후의 정치적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으며 조사탑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해탈선사의 법손인 업장에 의해 8세기 전반 경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토착신 나가는 중국에 전해지면서 용으로 번역되고, 기존의 용과 결합되면서 불교 미술에 표현이 됐다. 실제 존재하는 생명인 인도의 나가는 중국과 동북아시아에서 재현되지 않았다. 동남아에서 나가는 토착신으로서의 뱀 신앙에 더해져 다양하게 변모되었고, 힌두교 신화 속의 나가와 토착신 나가가 융합하기도 했다. 나가는 물과 관련이 깊어서 화재나 수재 (水災)를 막기 위한 비보(裨補)를 목적으로 건물에 조각됐다. 중국과 동남아의 건축물에 용 과 나가가 표현된 것은 같은 맥락에서, 같은 속성을 지닌 영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의 미한다. 동남아시아의 나가와 중국의 용은 물과 관련된 속성, 인간에게 위협적인 반신(半神) 과 같은 존재, 종교와 신화의 세계에서 하급 신격(神格)으로 간주되는 공통점이 있다.
본 연구는 동남아시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나가 위의 붓다(Buddha on Nāga)’ 도상이 서사부조에서 아이콘으로 확립되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나가 위의 붓다 도상은 붓다가 똬 리를 튼 뱀의 몸통 위에 앉은 채로 머리 뒤로는 뱀의 머리 7개를 광배처럼 갖고 있는 모습을 지칭한다. 이 도상은 붓다가 보드가야에서의 성도 후 선정에 들었을 때 거센 폭풍우가 몰아 치자 무찰린다(Muchalinda)라는 이름의 나가, 즉 뱀이 나타나 붓다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고 붓다의 머리 위로 자신의 머리를 펼쳐 보호하였다는 불전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나가 위의 붓다는 2~3세기 무렵 남인도에서 부조로 먼저 만들어졌다. 남인도에서 만들 어진 나가 위의 붓다 부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헌의 묘사와 달리 뱀이 붓다의 몸을 감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붓다가 뱀의 몸통 위에 앉은 것으로 만들어진 점이다. 이는 조각을 만드 는 데 있어 붓다라는 존재를 명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며 불교도들에게 시각적으로 더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나가 위의 붓다 도상은 7세기 보드가야에서 독립상으로도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인 도상은 앞서 본 남인도 부조들과 동일하다. 일찍이 많은 불전고사들이 부조로 만들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이 도상이 독립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보드가야가 7세기에 이르러 성지로서 높은 명성과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순례자들을 위한 더 많은 기념물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성도와 더불어 나가 무찰린다 고사 역시 보드가야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 중 하나로 주목을 받아 독립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특히 나가 위의 붓다 도상은 인도에서 먼저 만들어졌지만 인도보다는 이웃 동남아에서 더 욱 큰 인기를 얻고 붓다의 대표적인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7~8세기 무렵의 드바라바티 미 술에서도 다양한 나가 위의 붓다 부조가 발견되며, 특히 10세기 이후 크메르 미술에서는 뱀의 모습이 일관된 형태로 고정되고 장엄도 더욱 정교해지기에 이른다. 이는 토지와 물을 관장하는 신인 뱀에 대한 오랜 신앙이 동남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호신인 뱀에 대한 토착 신앙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붓다를 보호하는 뱀의 이야기가 동남아에서 특히 인기를 얻게 되어 나가 위의 붓다가 붓다를 나타내는 지배적인 도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1950년대 이래 발굴하기 시작한 당 벽화묘는 대다수가 陝西關中의 西安市郊와 부근의 禮 泉縣, 乾縣, 長安縣, 三原縣, 富平縣과 咸陽市郊에 집중 분포한다. 山西 太原, 寧夏 高原, 新疆 吐魯番 등지에서도 당묘 벽화가 출토되었다. 당대는 중국 고분벽화의 발달에서 가장 전성기에 해당하나 고분 내의 벽화의 주제나 구성은 인물화 중심으로 주로 현실세계를 반영하여 비교적 단순하며 사신을 제외하고 천상세계의 묘사는 드문 편이다. 당묘는 또한 부장용의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하며 북조 도용보다 진전된 세련된 표현과 기법을 보여준다. 한대 곽거병묘에 시 초가 보이는 陵墓 神道의 조각상들은 남북조를 거쳐 당에 이르면 대형화․정형화한다. 본 논문은 영하 고원수당묘와 염지당묘를 사례로 선택하여 소그드의 昭武九姓 가운데 하나인 史氏姓과 何氏姓의 소그드묘장을 고찰하여 두 지역의 묘장의 구조와 벽화 제재, 부장품에 나타난 특징을 통하여 해당 시기의 묘장에 드러난 문화적 변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당대는 축적된 연유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한 삼채도기 문화를 꽃피운 시기였다. 당대의 연유도기는 이전의 단색 연유기술과 달리 다양한 색상의 구현이 가능했으며, 세 가지 색 이상을 혼용하기도 하여 시각적인 화려함이 극대화되었다. 소위 당삼채라는 당대의 대표적 연유도기는 7세기 중반 盛唐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주로 부장품인 明器로 활용되었으나 출토 상황에 의하면 일상생활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당대의 연유도기는 화북 및 화남 등 여러 窯場에서 생산되었으며, 중국 내 소비와 함 께 동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로까지 널리 수출되어 활발한 소비가 이루어졌다. 본 연구에서 당대의 주력 생산품이었던 당대 연유도기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수출에 관한 그간 학계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관련 논제들을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간 동아 시아에 비해 덜 주목되었던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출토 사례를 중심으로 해외 전파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먼저 여러 발굴 성과를 토대로 살펴보면, 당대 厚葬문화 덕에 初唐부터 이미 삼채 도용이 대규모로 생산되었고, 이는 황족묘나 고관대작 분묘 출토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섬서 서안의 中堡村이나 하남성의 張思忠夫婦墓 등의 출토 예를 통해, 無官職이거나 중상급의 평민계층 사이까지 폭넓게 향유되었음을 알 수 있어 이는 당대의 전형적 부장문 화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안녹산의 난(755~763) 이후, 화려한 당삼채의 생산이 종식되고 대 신 백유녹채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는 성당기의 삼채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채유 도기로 성당시기 당삼채는 부장용 명기의 성격이 강했으나, 9세기 백유녹채도기는 실용기에 가깝다. 그런데 이 백유녹채도기의 제작을 촉구한 역사적 배경은 바로 8세기 후반 이후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진 서아시아, 즉 이슬람제국과의 교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9세기 폭발 적으로 증가한 이슬람과의 도자무역은 결과적으로 이슬람 시장과 영향력에 대한 당나라의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된다. 이는 단순히 동방의 연유 도기가 이슬람권에 수출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기호를 중국 측이 수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