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饔院의 分院官窯는 조선 도자기 역사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이 고도 근원적인 연구 주제이다. 분원 관요를 준거로 하여 시기구분을 비 롯한 도자 양식 연구 및 官職연구, 관요의 명칭 문제 등 여러 세부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선 왕실의 정책의 단면을 파악하고 문화와 생활 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분원 관요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주지하듯이 분원 관요는 朝鮮前期에 京畿道廣州일대에 설치되어 조선 말 민영화되기까지 조선 왕실과 궁궐 및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국가의 정책이 곧 관요의 도자기 제작 과 양식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관요를 중 심으로 왕실 및 궁궐자기가 대량생산되었고, 관요 백자 양식이 탄생했 으며, 도자기 제작 판도에도 변화가 일어 분청사기가 쇠퇴하고 백자가 성행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분원의 개념과 명칭 및 설치시기에 대한 학 계의 공통된 견해를 수렴하여 통합된 학설을 세우려는 것이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분원 관요에 대한 학술적 성과, 즉 官窯 址의 발굴과 지표조사, 특별전, 학술대회 등의 주요 성과를 연대별로 정 리했다. 아울러 전문 연구자들의 논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검토한 시대는 조선 초부터 분원 관요가 설치되고 조선 말 민영화되기 전까지 다.
학술적 성과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도자박물관(구 조선관요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해강도자 미술관을 주축으로 한 국공사립기관의 참여와 활약으로 축적되었다. 학 술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990년대와 2000년대였고 2010년대는 2015년 현재까지 다소 저조한 편이다.
광주 관요 출토의 중요한 도편은, ‘內用’명 백자편, ‘見樣’명 백자편, 기린문 청화백자편, 운룡문 청화백자편, ‘좌’ 또는 ‘우’명 백자, 각종 干支 및 숫자가 기명된 백자편, 중국 연호명 백자편, 각종 点刻銘백자편 등 이며, 이를 근거로 편년이나 도자 양식의 규명이 가능했다.
분원 관요의 개념과 명칭에 대해 학계의 주요 논저에서는, ‘司饔院이 세운 沙器製造場으로서 조선 전기부터 존재한 조선을 대표하는 최대의 관청수공업장’이라고 정의했다. 즉 분원은 사옹원이라는 관청이 세운 가 마이며, 이를 압축하면, 본원인 사옹원의 분원이다. 아울러 ‘광주 분원’, ‘광주 분원 관요’, ‘광주 沙器所’, ‘광주 燔造所’, ‘광주 磁器所’, ‘분원 번 조소’ 등이 조선시대의 명칭을 계승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찬기록에 의하면, 번조소와 자기소는 주로 광주 분원 관요에 한하여 지칭한 명칭 이었다. 이에 반해 사기소는 전국적으로 분포한 가마를 지칭할 때 두루 사용된 명칭이었다. 또한 분원의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필자가 1467년 4~12월이라는 연대를 발표하였다(본문 각주 16).
흔히 왜관요(倭館窯)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일본 쓰시마번[對 馬藩]이 경영하던 가마를 말한다. 그 당시, 쓰시마번은 왜관(倭館)에서 다기(茶器)를 만들어 권력자들에게 바쳤다. 이 글은 고관(古館)이라고 도 하는 왜관에 1639년부터 1678년까지 설치된 가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관은 지금 부산 동구 수정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에 가마가 있었는지 오랫동안 의문 속에 있었다. 근대기의 기록 등을 살펴보면, 고관 공원(古館公園) 옆자리에 있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근거로 한 현지 답사의 결과, 가마의 위치가 지금 803번지 일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가마터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이 가마는 고관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관 가마에서 제작된 유물도 역시 오래된 의문점의 하나이다. 대마도 킨세키죠[金石城] 유적에서는 576점의 다완편이 출토되었다. 하한 연대는 성의 기능이 새로운 성에 옮기게 된 1678년경이 될 것이다. 이 때, 대마도에 가마는 없고 아마도 이 파편들이 고관에서 제작되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사료에 따르면, 양산, 기장 등이 왜관요에서 일하던 사기장의 파견지 이었다. 킨세키죠에서 출토된 백자는 유태(釉胎)나 굽의 형태, 받침 등 이 양산, 기장과 상통된다. 이를 하여금, 고요에서 지방 사기장의 기술 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 활동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준 것이다.
분청사기를 모방한 파편도 있는데, 당시 일본 다른 가마에서도 분청 사기를 모방하였다. 1610년대 이후에는 고관 가마나 일본 가마나 마찬 가지로 ‘원전(原典)’에 충실하려는 의도가 높았다. 그러나 쓰시마번만 말 그대로 ‘원전’, 즉 가마 자리나 사기장까지 ‘원전’을 지향하는 것이 가 능하였던 셈이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시마번이 부산에서 가마를 운영하던 이유는 바로 다른 일본 藩과 달리 권력자에게 ‘원전’을 내세워 이익을 얻으려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를 梅甁이라 한다면 조 선시대 백자는 龍樽이라 할 수 있다. 청화로 그린 용준은 조선의 개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儀禮와 관련 器皿制式이 정립되는 첫 단계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기본 골격을 준수하면서 시종일관 하였다. 따라서 청화용준을 조선백자의 상징이며 중심적 존재라고 하는 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에 연구 경향은 17세기에 청화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假畵와 鐵畵재료인 石間硃를 썼고 또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 되었 다는 전제 아래 ‘철화백자의 시대’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 조형의 중심을 이끌며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청화용준이 일백년 가까이 단절되었고 다시 18세기에 새롭게 구성한 조형체계로 재등장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 중, 후기 백자의 전개에서 조형정신의 계승은 물론 조선사회 를 구성하는 지적 엘리트들의 일정한 美意識을 규명하는데 심각한 장 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임진란 이후 광해군11년(1619)에 와서 어렵게 청화를 구하여 용준 제작이 가능해졌고 이후 왕실의 雙龍樽제작은 19세기까지 지속 되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중기, 후기 청화백자 쌍용준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여섯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 의 성격을 분석했으며, 여기서 分院窯址出土철화용준의 절대편년 자 료를 대입하여 분류 기준의 당위성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사용주체도 달랐고 명분도 분명히 달랐다. 철화는 청화와 함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다른 조 형의장을 계승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 인 계급사회의 정착을 추구했던 조선의 司饔院分院에서 정통성을 갖 는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기능으로 17세기 동안 독자적 철화 백자의 조형체계를 확립했고 곧 이어 간소화 쇠퇴하면서 지방 民窯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대표격인 용준의 조형체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백자 의 근간을 밝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조선 전 기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樽은 17세기 전기를 지나면서 한 가지로 통합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화백자 쌍용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제작 주체였던 사대부들의 관심이 제왕의 쌍용준에 있었을 가능성 이 높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이 용준에 용 그림 대신 四君子와 花鳥, 山水, 人物, 魚 蟹, 十長生등 새로운 그림들을 敎化와 祈福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그려 넣었다. 따라서 용 그림 주변에서 莊嚴을 상징했던 당초, 여의두, 劍形 蓮瓣같은 종속문양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신하로서 사대부 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 上品畵樽가운데 검형연판문대를 갖춘 예가 박병래선생 기증품 <白磁靑畵山水文樽>(높 이 38.1)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제작 분위기를 설명해 주고 있다.
석정 한익환은 1970년 중반 혜곡 최순우의 감식안에 힘입어 전승도자 계승자로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게는 항상 전승도자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그는 전승을 위해 연구를 거듭한 요업공학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는 일반적으로 도예가들이 행하는 기형의 연구 보다는 흙의 실험을 통한 도자기 색의 연구에 더 집중하였다. 1940년대 부터 도자기 기술의 바탕이 되는 공부를 시작한 석정 한익환은 1950년 강원도 홍천의 전통가마에 파견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전통자기의 제작 기법을 배웠고 그 후 현대도자기 공장의 연구실에서 도자기 색을 만들 어내는 조합사의 길을 걸었다. 최고의 색깔 조합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전통도자기 제작을 위해 독립적인 가마를 운영하였으나 결혼과 함께 잠 시 중단하였다. 그러나 전통 도자기 제작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결 국 1960년대 후반에 산곡요를 만들었다. 이 시절부터 그는 백토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고 1975년 백토 광산이 있는 경기도 용인의 고안리로 가마를 이전하고 ‘익요’시기를 맞이하였다. 이시기에 그는 조 선백자의 백색 연구를 완성하면서 ‘앞으로 기술이 발달하여 나의 백자 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고까지 말하면서 최고의 백 색을 가진 백자로 발전시켰다.
특히 1981년부터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재현과 답습 에서 벗어나 더 좋은 백자색을 만들어 보라’고 한 최순우 관장의 말에 의해 전통 방식의 도자 기술과 현대식 도자 실험을 통한 색의 개발에 몰두하였다.
전승도자를 현대화, 대중화하는 연구를 시작하면서 한익환 백자는 대부분 순백자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한 익환 백자는 오히려 조선 백자의 색을 전승한 백색을 완성한 후 그가 만들어낸 백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백색은 한익환이 만든 태토의 백색에서 나오는 색을 기본으로 유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한익환의 백자는 수입이나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태토가 아 니라 옛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한국의 흙을 기본으로 계승 발전시켜 조 선관요백자 색을 넘어선 백자이다.
그가 전승도자의 현대화를 연구하면서 입버릇처럼 ‘반광택’이라고 주 장하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옛 도자를 전승하는데 필수 조건이었다.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전통 도자색은 광택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바다 속 뻘에서 나온 청자의 경우 새로 만든 청자처럼 광택이 난다. 이는 진공 상태의 도자의 경우 옛 도자라고 하여도 한익환이 말하는 정도의 반광택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익환이 말하는 반광택은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전통 자기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 도자의 ‘계승’은 완벽한 색의 ‘재현’이므로 그는 자신의 도자에 세월의 흔적까지 나타내려 했던 전승 장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