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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美術史學 KCI 등재 동양미술사학 Dongyang Misulsahak(Journal of Asi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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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6권 (2018년 1월)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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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據初步統計,龍門石窟唐代有紀年的觀音菩薩造像有54例,未紀 年觀音像多達140余身,筆者通過實地調查記錄,在本文中嘗試對有紀 年的觀音像展開具體的記錄和分析,結合歷史文獻和碑刻題記,歸納 出龍門石窟唐代觀音造像的特徵及形象變遷的規律,同時探討唐代觀 音造像的其他问题,進而了解唐代龍門乃至洛陽地區淨土信仰及觀音 信仰的情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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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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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통계에 따르면 용문석굴 당대 기년관음보살상은 53구가 있으며, 기년이 없는 상은 140여구가 있다. 필자는 현장조사에 의거해 기년관음 상에 대해 구체적 기록 및 분석을 진행하고, 역사문헌과 비석의 내용들 을 참고하여 용문석굴 당대 관음상의 특징 및 형상변천 규율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당대 관음상에 관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검토하여 당대 용문을 비롯하여 낙양지역의 정토신앙 및 관음신앙에 대해 살펴보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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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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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華寺十一面観音菩薩像は像高100.0センチの立像で、榧の一材による 9世紀の檀像様の一木彫成像として知られる。本像で特徴的なのは、薄い 銅版を切り抜いてつくった鬢髪や垂髪が風に靡くように表現されている点であり、 あたかもこれに呼応するかのように、同じく風に翻って反転する天衣の末端の表 現もみごとな彫技が尽くされており、おおいに注目される。このようないわゆる風動 表現については、中国唐代の画家、呉道玄の画風を踏襲した結果とする井上 正氏のみかたが定着している。 ところで本像についてはこれまでに光明皇后ゆかりの東大寺阿弥陀堂に安置 された檀像十一面観音像(非現存)、あるいは紫微中台十一面悔過所の 画像本尊(非現存)の模刻とするみかたが提出されてきた。そもそも光明皇后 の十一面観音信仰は阿弥陀信仰と結合した信仰で、8世紀に制作された東 大寺阿弥陀堂像や紫微中台画像本尊も皇后の阿弥陀信仰と密接に関連 し、『陀羅尼集経』所説の阿弥陀仏輪印法と同じ修法である同経掲載の掐 数珠印第十一の対象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そうすると法華寺像にみられる呉道 玄様の風動表現や未開敷蓮華等を造形化した光背は、阿弥陀仏の極楽浄 土に立つ十一面観音をアピールするための工夫であったと思われ、光明皇后 にまつわる説話に彩られた法華寺像も皇后の十一面観音信仰の系譜を引く像 で、もともと法華寺阿弥陀浄土院金堂に祀られていたとする先行研究は妥当と 思われる。また法華寺像の風動表現や光背の意匠は光明皇后の十一面観 音信仰の性格を伝えているとみられるから、このような特殊な表現は紫微中台画 像本尊等ですでに採用されていた表現を法華寺像が踏襲した結果と考えられ る。それゆえ従来より推定されてきたように、法華寺像はやはり光明皇后ゆかりの 十一面観音像の模刻である蓋然性が高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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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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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華寺十一面觀音菩薩像은 높이 100cm의 입상으로 한그루 의 비자나무(榧)로 된 9세기 檀像풍의 일목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본 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얇은 동판을 잘라서 鬢髮과 垂髮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같이 표현된 점인데, 마치 이와 대 응하는 것처럼 바람에 펄럭이며 뒤집힌 천의의 끝단 표현도 훌륭한 조각 기법으로 완성되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이른바 風動表現에 관해서는 중국 당대 화가 吳道玄의 화풍을 답습 한 결과라고 한 井上正의 견해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본 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光明皇后연고인 東大 寺아미타당에 안치된 檀像十一面觀音像(현존하지 않음), 혹 은 紫微中臺十一面悔過所의 畵像本尊(현존하지 않음)의 模刻 이라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원래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 신앙은 아미타신앙과 결합한 신앙으로, 8세기에 제작된 東大 寺아미타당상이나 紫微中臺畵像本尊도 황후의 아미타신앙 과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으며 陀羅尼集經에서 말하는 阿彌 陀佛輪印法과 같은 수행법인 同經에 게재된 掐數珠印제11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法華寺 像에서 보이는 吳道玄풍의 풍동표현이나 未開敷蓮華등을 조 형화 한 광배는, 아마타불의 극락정토에 서있는 십일면관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생각되는데, 光明皇后에 얽힌 설 화에 물든 法華寺像도 황후의 십일면관음신앙의 계보를 잇는 상으로 원래는 法華寺아미타정토원 금당에 모셨다고 하는 선행연구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法華寺像의 풍동표현 이나 광배 장식은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신앙의 성격을 전해 주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수한 표현은 紫微中 臺畵像本尊등에서 이미 채용된 표현을 法華寺像이 답습한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추정된 것처럼 法華寺像 은 여전히 光明皇后연고의 십일면관음상의 모각이었을 개연 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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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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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5-16세기 베트남 청화백자를 제작한 가마의 형태분석과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도자를 분석하여 베트 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기존 논문에서는 중국 청화백자와의 유사성에 초점이 맞춰져 이 부분이 미비하였다. 이 부분을 보강 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와 현지 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베트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화백자는 생활용품이자 고가의 무역품이었다. 15-16세기에 베트남은 국내 도자 제작 수준의 발전과 명 해금정책의 배경으로 청화백자를 동남아시아, 류큐, 터키, 이슬람 지역권 등으로 수출하였다. 각국으로 수출된 청화백자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는 가마에서 주로 생산되었으 며, 북부 지역의 가마가 중국의 가마 형태를 모방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청화백자 생산지인 쭈더우(Chu Đậu) 지역의 가마 형 태를 조사한 결과로는 중국의 용요와 만두요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베 트남 지형에 맞게 재해석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명이나 조선에서는 여성이 도자 제작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톱카피 사라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모란문천구병>이나 16세기 쭈더우 지역과 근접한 곳에 거주한 도공의 아내인 응우옌 티 딘(Nguyễn Thị Đỉnh)이 도자를 제작했다는 흔 적이 남아있어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완성된 청화백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수많은 동물 기형을 만들고 정병(켄디)라는 특수 기형을 제작하였다. 베트남 청화백자는 중국처럼 용이나 봉황과 같이 상상 속의 동물을 사용 하기도 하였지만 베트남의 자연환경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동물인 코끼리, 앵무새, 복어, 물소 등을 기형이나 문양에 활용한 독 특함을 선보였다. 특수 기형인 정병(켄디)도 동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 던 형태와 다르게 주구가 보다 길며 손잡이가 없고 높이가 낮은 형태로 상당수 생산되었다. 이를 통해 베트남 청화백자가 중국 도자를 모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중국의 양식을 수용하면서 점차 베트남 특유의 미감을 담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도자 수출, 제작법, 도자 형식 등을 통 해 베트남 청화백자만의 의의도 함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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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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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및 미국, 유럽을 통해 전기, 철도 등의 기반 산업뿐만 아니라 복식, 음식, 서양식 건물 등 실생활과 밀접한 문화체계 들을 받아들였으며, 조선의 전통 건축 및 기물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 던 새로운 양식의 수입기물들로 대체되었다. 대한제국기 궁궐의 전통 생활가구들은 서양가구들로 대체되었으며, 온돌식 주거문화에 따라 유지되었던 좌식 생활은 입식 생활로 변화하였다. 창덕궁과 덕수궁 석조전의 서양가구들은 18세기 유럽의 로코코 양 식(Rococo Style)을 따른 것에서부터 대한제국기 황실문장인 이화문(李花文)을 넣어 제작한 것 그리고 영국의 메이플사(Messrs Maple & Co) 에서 제작된 가구들이었다. 창덕궁에서는 장식성이 돋보이는 로코코 양식의 가구를 사용했으며, 석조전의 가구들은 신고전주의 건물 외관에 어울리는 소박하고 간결한 퀸앤 양식(Queen Ann style)의 가구가 주를 이루었다. 전통적인 좌식 가구에서 탈피한 서양식 입식 가구의 등장은 개항 이후 궁궐에서 이루어진 연회 문화와 관련이 있었으며, 서양식 연회에 어울리는 도자기와 공예품들도 각국에서 수입되었다. 연회에 사용 되었던 양식기들은 프랑스의 삘리뷔(Pillivuyt), 영국의 존슨 브라더스 (Johnson Brothers), 일본의 노리다케(Noritake) 등에서 제작했던 산업 자기였다. 서양식 만찬에 어울렸던 양식기 외에도 궁궐의 실내 장식을 위해 일본산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유행하였다. 대한제국기의 수입기물들은 이후 일제의 간섭과 급변하는 나라 정세로 인하여 우리만의 독자적인 특징을 발현하여 양식적인 발전을 이루지 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입기물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생활방 식으로의 변화를 이끌었고,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대한제국기의 사회⋅문화적인 면모를 다각적으로 조명 하는데 기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6,3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