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불탑은 불교 전래와 함께 인도 불탑이 서북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지면서 시작되었지만 인도 불탑과는 전혀 형태를 달리 하는 목조 중층누각형의 모습이어서 그 기원이 주목된다. 중국의 불교 건축은 東漢代불교 전래와 함께 불탑 건축으로 시작되었으며 3세기 이전의 불탑은 3층 이하의 규모로 불사리를 모신 탑묘, 불상을 모신 佛殿, 불교 강연과 행사를 하는 강당, 승려들이 머물 수 있는 승방의 기능을 함께 하는 탑 중심 사찰로 건축 형태와 배치는 전통적인 祠堂과 예제 건축과 닮아 있었다. 탑의 모습도 笮融의 부도사, 四川省昇邡화상전의불탑 형상으로보아 처음부터 중국 전통 목조 건축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도 역시 초기 중국 불교의 격의적인 성격과 불탑의 祠廟적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의 불탑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고 출발하게 되었다. 4세기 이후 중국은 불교 전래가 본격화되고 많은 대, 소승의 경전들이 번역되면서 격의 불교적인 수준을 벗어났으며 불교가 국가에 의해 장려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佛事에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이루어지고 특히 아육왕경의 번역과 유포에 따라 아육왕탑의 조성과 사리 신앙이 고조된다. 이러한 불교의 질적, 양적 확산에 힘입어 아육왕탑의 등장, 불탑의 고층화라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며 사찰도 강당, 불전, 탑, 대문 그리고 승방 등의 다양한 부속 건물을 갖춘 모습으로 정비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사찰은 규모가 커지고 불탑은 고층화된다. 5-6세기 남북조시대는 서역을 통해 전래된 간다라 탑의 영향으로 목조누각형 다층탑으로 발전하게 된다. 작리부도로 알려진 카니슈카 대탑을 비롯한 간다라, 서역의거대한다층탑과 전통목조 중층누각탑 형식이 결합하여 고층화, 각층 탑신의 상부가 곡선형 尖拱이나 梯形으로 표현되는 감실과 불상장식, 그리스와 페르시아풍 기둥장식 등의 외래적 요소가 나타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간다라 양식이 짙게 반영되었던 북위시대 목조 중층 누각형 불탑은 수, 당대를 거치면서 점차 외래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고 각 시대의 중국적 건축 요소가 강화되면서 중국 고유의 목조 누각식 다층탑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이 논문은 남북조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불상을 바라보던 시각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사원의 중심이 스투파였다. 문헌에 의하면 붓다의 열반 후 스투파는 8기가 건립되었지만, 아쇼카 왕이 이 중의 7기를 해체하여인도전역에8만4천기의 불탑을 세웠다고하였다. 이것은 인도 전역의 거의 모든 불탑은 사실상 아쇼카 왕 시절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에 사원을 건립하면서 불사리가 필요했지만, 역사적으로 이를입수하기란거의불가능에가까운일이었을것이다. 때문에 集神州 三寶感通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쇼카 왕이 8만4천탑을 세울 때 그 일 부가중국에세워졌고, 그때의사리가발견되어 중국의 초기불탑들에 봉안된 것이라는 설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만으로는 더 많은 불사를 건립하는데 있어한계에부딪쳤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은 사리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으로도 탑을 세울 수 있다는 개념이었는데, 그러한 아이디어는 석가성도지인 보드가야의 중층누각형식의 마하보디 사당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하보디 사당은 사리가 아닌 석가성도상을 봉안한 건축물이었는데, 당시 보드가야를 방문한 중국의 구법승들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특히 현장과 같은 승려는 장안 慈恩寺大雁塔을 세울 때 이 마하보디 사당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탑 대신에 전혀 다른, 보다 쉬우면서도 직접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불상이었다. 인도에서도 불상이 있었지만, 이는 주로 탑을 장엄하는 용도였으며 혹, 사리를 봉안한 불상이 불탑만큼 존숭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안의 사리 때문이었지, 상 자체의 영험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상들 역시 불사리처럼 진정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아쇼카 왕의 조탑 설화와 마찬가지로 아쇼카 왕 조상 설화가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소위 아쇼카 왕상이라고 하는것은 오래 전에 중국에 전래되어 묻혀 있다가 새롭게 발굴되어 남북조 시대 사람들 앞에 다시 현현한 것으로 서당시 사람들에게 믿어졌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상들은 다양한 기적을 일으켰으며, 만약 똑같이 복제되는 경우, 원본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미지를 복제함으로서 영험함도 복제할 수 있다는 이러한 경향은 보다 쉽게 불상의 진정성을 널리 유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의 일부 불상들은 아쇼카 왕이 만든 상, 혹은 그 상을 복제한 상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불상들은당시에제작된것이아니라, 훨씬오래전에제작된불상, 혹은오래된 양식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들 불상이 보이는 양식은 당시의 양식이 아니라, 당시보다 더 오래된 양식으로 보이기 위한 의도된 고식, 혹은 고법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의 양식을 倚古양식으로 불러보고자 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우다야나 왕 조상설화도 전래되었는데, 이것은 우다야나 왕 시절에 도리천에 장인을 올려 보내 석가모니의 진용을 모사해 와서 조성한 상이므로, 석가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조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말하자면 석가의 초상으로서 사실주의를 어느정도 바탕에 두어야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본다면불교미술에서 사실적 양식이라고 언급해 왔던 인도의 굽타 양식이나 이를 받아들인 북위시대 운강석굴 초기의 불상 양식들은 서양의 사실주의와 구분하여 眞容양식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제시해 보았다. 결국 이러한 고찰을 통해 단순히 인형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불상들에 사리를 대신한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쇼카 왕 설화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 내거나 우다야나 왕 설화와 같은 시각적 전통에 의지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위진 시기 고분벽화는 한대 고분벽화와 화상석과 더불어 중국 고대 회화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회화자료이다. 동북과 하서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중국 위진 벽화고분의 연원을 고찰하기 위하여 본문에서는 두 지역에 벽화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망에서 동한 전기의 벽화고분부터 시작해서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까지 그 출현과 발달 및 전개과정을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벽화고분들과의 상호관계를 고려하면서 정리하였다. 먼저 동북과 하서지역에 처음으로 벽화고분이 등장하는 신망-동한 전기의 요녕 대련 영성자 한묘와 감숙 무위 한좌 오패산 한묘를 통하여 서한부터 낙양, 장안 등지의 벽화와 화상석에 보이는 鎭墓辟邪, 引魂昇天을 반영한 제재와 승선관이 이미 신망-동한 전기에 동북이나 하서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북지역 고분벽화의 출현에는 중원지역에서는 신망-동한 전기부터,관중지역에서는 서한 후기부터 나타나는 생활풍속적 제재의 전파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보인다. 동시에 내몽고나섬 서북부와같은 북방지역의 동한 후기 벽화고분과도 벽화제재와 표현에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동한 후기에 와서 동북, 내몽고, 하서를 잇는 북방지역이 벽화고분 축조의 중심지로 되면서 벽화문화권이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서지역의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은 무위, 주천, 돈황 등에 분포되어, 요양에 집중된 동시기 동북 벽화고분보다 다양한 발전양상을 보여준다. 하서지역 위진벽화고분은 연원을 해당 지역한대고분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남, 관중, 섬북, 산서지역 한대 벽화고분과 화상전고분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요녕 조양 원대자묘 벽화는 요양지역 벽화고분에서 보이지 않던 여러가지 새로운 제재들이 출현하는데 1세기 앞선 요양지역의 벽화고분과 다른 벽화 제재들이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고분의 벽화 구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四神, 力士, 狩獵과 같이 요양지역에 등장하지 않은 제재들의 전파경로를 살피면 대체로 하남, 섬서 지역(서한 후기)에서 북방과 하서지역(동한)으로 전파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감숙 주천 정가갑 5호묘의 벽화의 제재와 구성 배치는 신망-동한 전기 하남지역에서 발달한 궁륭형 천장을 가진 전축분의 특징과 유사하며 고구려 벽화고분과도 친연성이 보인다. 고구려와 하서지역 고분벽화의 친연성은 서한 이후 벽화문화의 전파과정과 동한 후기부터 북방지역을 따라 형성된 벽화문화권의 교류가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의 연원에 대한 고찰은 3-4세기에 벽화고분이 조성된 동북과 하서지역만이 아니라 그 이전인 한대부터 각 지역별로 발달한 고분벽화 및 화상석의 특징과 지역 간 상호 교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고려하면서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동북·하서 지역의 시기별 벽화고분의 연원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단순한 전파과정이 아니며 다양한 지역적, 시기적 편차를 가지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연원은 인접한 동북, 하북, 산동만이 아니라 보다 시야를 넓혀 중원, 관중, 북방, 하서가종축과 횡축으로 연결된 교류 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크게 유행한 계수호의 연원과 형식, 양식변천을 파악하고 그 소멸 원인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문헌 분석과 편년이 확실한 출토품과 중국 국내외 박물관 수장품에 대한 형식과 양식 분석을 시도하였다. 원래 계수 도상은 중국 전통의 닭에 대한 길상적 사고와 서방의 영향이 합쳐져 서진시대 청자에 장식된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 흑유로 그 제작의 폭이 넓어졌으며 부장품과 위세품으로 또한 실생활에 사용되는 주기로 사용되었다. 남북조시대 들어 사회 변동과 불교의 유입, 서방 양식의 유입, 월주요를 중심으로 한청자 제작기술의 향상으로 다양한 형식과 양식의 계수호가 출현하게 된 것을 파악하였다. 계수호의 형식은 손잡이에 따라 크게 계수계미형과 계수병형, 계수용 병형으로 분류하였고 닭의 형태와 문양 장식에 따라 세분하였다. 계수호의 양식은 시기별로 변화하였다. 계수계미형과 구형의 몸체가 처음 등장하는 서진 시기에는 월주요가 주 생산지였다. 이후 덕청요의 흑유계수와 계수병형이 나타나는 동진 시기, 안양요와 월주요가 주 생산지이며 크기가 커지고 장식적이며 몸체가 입호형의 계수용병이 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방의 형요를 중심으로 백자가 나타나는 수대로 양식이변화한것을 고찰하였다. 끝으로 당대 이후 계수호의 소멸 원인으로는 최고 소비층의 당삼채와 서방풍의 봉수호의 선호에 따라 명기로서도 주기로서도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하였다.
적벽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중 백미로 꼽히는 북송 시기 소식의『前赤壁賦』와 『后赤壁賦』는 남송 문인들과 문인화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소식은 예술 방면에서는 혁시자였으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띠어舊法黨을 지지하였다. 宋神宗시기에그는新法黨의 수반인 王安石의 신법에 강한 반대를 표출하여 핍박과 고초를 겪으며 시에서 비방성의 글귀가 발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소식은 복권되어 북쪽으로 오는 도중에 常州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6세로 新舊法黨爭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듬해 蔡京은 소식과 황정견 등의 문집을 태워버렸고 글을 읽거나 집안에 두는 것도 엄금하였다. 소식은 湖北黃州의 團練副使로 강등된 元豊5년(1082)에 연이어『적벽부』와『후적벽부』두 편의 불후의 작품을 썼다. 남북조 시기에 적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들은 있었지만 북송 소식 이전에 적벽 소재의 회화를 그린 화가가 거의 없었다. 적벽회화는 모두 소식의『후적벽부』에 집중되어 있다. 북송 말 喬仲常은 가장 먼저 적벽회화를 그린 문인으로 넬슨 앳킨스 미술관 소장의〈后赤壁賦圖〉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적벽회화다. 화가는 백묘로 8장의 종이 위에 소식이 놀던 적벽의 전후과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화가는 배경을 없앤 부감시의 구도로 소동파가 놀던 적벽의 일부분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가장 이른 시기 배경을 생략한 구도로 보이고, 바로 남송산수화 구도 변혁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다. 교중상 이후 남송에는 주목할 만한 예술현상이 나타났는데, 바로 다수의 화가들이 북송 소식의『후적벽부』를 소재로, 두루마리 혹은 화첩형태의 회화를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남송의 高宗代의 궁정화가로 馬和之와 종실화가 趙伯驌은 후적벽부소재를 가장 먼저 채택하였다. 남송 초년에 송 고종은 金君이 남침 못하게 대처하는 한편 사대부들의 인심을 사기위하여 소식과 황정견을 적극적으로 추대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소식과 황정견의 서화풍격이 황실에서 모방되었다. 고종은 처음에 황정견의 서법을 배워 모두가 황정견 서법을 배웠고 후에 미불의 서법을 따라 천하가 미불의 서법을 배웠는데 마지막으로孙过庭의서법을익힘으로孝宗太上(光宗) 모두孫過庭의서법을 썼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남송 서법의 서체의 변화를 볼수 있는것이다. 마화지와 동시대 화가인 趙伯驌역시〈후적벽도〉를 그렸는데, 이것은 明代文徵明이 일찍이 모방했던 조백숙의〈후적벽도〉를 말한다. 이후의 적벽회화로는 넬슨 앳킨슨 미술관 소장의 남송 후기의 궁정화가 李嵩의〈赤壁圖〉를 꼽을 수 있다. 이외 잘 알려진 것은 金代明昌연간(1190-1196)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의 武元直의〈赤壁后游圖>와 작가를 알 수 없는 보스턴 박물관 소장의〈적벽부도〉역시 예로 들 수 있다. 두그림 모두 全景式의 가로방향으로 구도가 전개되었다. 전자의 필법은 남송 馬遠과 夏珪의 영향으로 수묵의 사용에서 웅일한 느낌을 보여주며 후자는 필선의 조직구성에서 北派山水畵의 체계를 따랐다. 소식이 적벽을 유람했다는것에 근거하였기에 宋과 金, 양국의 적벽도의 화면 구성은 상당히 비슷하다. 다른 점은 금나라의 화가는 변함없이 전경식의 구도방식을 취하였으나 남송화가들은 경관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일정 부분의 강과 바위 부분만 그려내어 소식이 밤에 유람을 했던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었으니 남송 “一角” “半邊”식 구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미술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로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방법에서는 후원자들과 그들의 성별, 사회적인 지위가 작품제작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또는 미술이 특정집단의 사람이 살아온 환경 속에서 어떻게 소통과 자기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조선시대 예술가들을 단순히 중국 수입품에 의존하는 이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당시의 미술을 볼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 그들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한 영감으로써 중국미술의 경향을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 초기 회화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 1447년> 와 신숙주의 「화기」는 조선전기 문인들이 아직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중국의 이론적 담론, 도상 및 양식들을 사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몽유도원도>는중국의시인인 도잠(연명, 365-427)이쓴 「도화원기」 에서 비롯되었으나 도잠의 시와 중국 도상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있다. 「도화원기」의 현실도피적 측면은 안평대군이 당시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양식적으로는 <몽유도원도>에서중국 북송대의 화파인 이곽파의특징을 찾을 수 있다.「화기」서론 부분의 한유와 백낙천에 대한 언급과, 소식을 상기시키는 「화기」끝부분의 철학적 담론은 안평대군의 골동수집 취향, 안견의 회화 양식과 당대의 지적 문화적 경향과 잘 부합된다. 곽희 양식에 대한 인식, 도화원기의 도상학, 한유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저술과 소식과 동시대인들의 미학적 문학활동은 고려 왕조의 어느 시기엔가 한국의 학자와 화가들에게 전달되었다. 조선초기까지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적 정치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었던 학식 있는 문인 집단에게 있어서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소재가 되었다.
안평대군이 주도하고 군신들과 안견이 참여하여 제작된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은 <몽유도원도>와 함께 조선 초기에 높은 수준을 이룩한 시화 제작의 전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42년에제작된이 시첩에는당대 문사들의 소상팔경시와 함께 소상팔경도가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 그림은 산실되고 시문만 첩의 형태로 전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비해당소상팔경시첩≫에 소상팔경도를 그린 화가는 안견으로추정된다. 안견은 조선초기에활약한 최고의 산수화가로 그가 이룩한 화풍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존하는 조선초기의 소상팔경도중 상당수가 안견의 전칭을 지닌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제작의계기가된 남송寧宗의 팔경시 는 여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있다. 남송영종의 팔경시 는팔경의순서에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며, 조선초기에 제작된 소상팔경도의 순서에 많은 영향을준 것으로 생각된다.안견이 그렸을것으로 추정되는≪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소상팔경도>역시 영종의 팔경시 의 순서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그림 이후대의 소상팔경도에 많은 영항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의 소상팔경도중≪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가장 연관이 깊은 작품은 구幽玄齋 소장의<소상팔경도>로 생각된다. 그림의 순서와 화제의 표기 방식등이 유일하게 남송영종의 팔경시와 일치한다. 팔경이 개별적으로 독립된 작품이면서 하나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구성을 보이는 점 에서도≪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시의내용과도 부합한다. <소상팔경도>에 그려진 각 폭의내용도남송영종의 팔경시 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 그린듯이 크게 어긋남이 없다. 유현재본 <소상팔경도>는 북송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李郭派 화풍의작품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소재와 표현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도 유사성이 인정된다. 유현재본 <소상팔경도>는 안견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소상팔경도를 충실히 임모하거나 방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와 중기의 다른 소상팔경도 및 산수도 중에서 많은 작품이 유현재본 <소상팔경도>와 많은 연관을 보이는 것도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안견의 <소상팔경도>가 범본範本으로서 후대 작품에 미친 지대한 영향으로 추정된다. 앞으로≪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유현재본<소상팔경도>의 연관이 보다 분명하게 밝혀진다면 산실된 안견의<소상팔경도>에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으며, 안견의<소상팔경도>가 후대작품에 미친 영향 및 조선초기 소상팔경도의 전개과정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이해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