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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적벽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중 백미로 꼽히는 북송 시기 소식의『前赤壁賦』와 『后赤壁賦』는 남송 문인들과 문인화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소식은 예술 방면에서는 혁시자였으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띠어舊法黨을 지지하였다. 宋神宗시기에그는新法黨의 수반인 王安石의 신법에 강한 반대를 표출하여 핍박과 고초를 겪으며 시에서 비방성의 글귀가 발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소식은 복권되어 북쪽으로 오는 도중에 常州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6세로 新舊法黨爭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듬해 蔡京은 소식과 황정견 등의 문집을 태워버렸고 글을 읽거나 집안에 두는 것도 엄금하였다. 소식은 湖北黃州의 團練副使로 강등된 元豊5년(1082)에 연이어『적벽부』와『후적벽부』두 편의 불후의 작품을 썼다. 남북조 시기에 적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들은 있었지만 북송 소식 이전에 적벽 소재의 회화를 그린 화가가 거의 없었다. 적벽회화는 모두 소식의『후적벽부』에 집중되어 있다. 북송 말 喬仲常은 가장 먼저 적벽회화를 그린 문인으로 넬슨 앳킨스 미술관 소장의〈后赤壁賦圖〉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적벽회화다. 화가는 백묘로 8장의 종이 위에 소식이 놀던 적벽의 전후과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화가는 배경을 없앤 부감시의 구도로 소동파가 놀던 적벽의 일부분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가장 이른 시기 배경을 생략한 구도로 보이고, 바로 남송산수화 구도 변혁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다. 교중상 이후 남송에는 주목할 만한 예술현상이 나타났는데, 바로 다수의 화가들이 북송 소식의『후적벽부』를 소재로, 두루마리 혹은 화첩형태의 회화를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남송의 高宗代의 궁정화가로 馬和之와 종실화가 趙伯驌은 후적벽부소재를 가장 먼저 채택하였다. 남송 초년에 송 고종은 金君이 남침 못하게 대처하는 한편 사대부들의 인심을 사기위하여 소식과 황정견을 적극적으로 추대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소식과 황정견의 서화풍격이 황실에서 모방되었다. 고종은 처음에 황정견의 서법을 배워 모두가 황정견 서법을 배웠고 후에 미불의 서법을 따라 천하가 미불의 서법을 배웠는데 마지막으로孙过庭의서법을익힘으로孝宗太上(光宗) 모두孫過庭의서법을 썼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남송 서법의 서체의 변화를 볼수 있는것이다. 마화지와 동시대 화가인 趙伯驌역시〈후적벽도〉를 그렸는데, 이것은 明代文徵明이 일찍이 모방했던 조백숙의〈후적벽도〉를 말한다. 이후의 적벽회화로는 넬슨 앳킨슨 미술관 소장의 남송 후기의 궁정화가 李嵩의〈赤壁圖〉를 꼽을 수 있다. 이외 잘 알려진 것은 金代明昌연간(1190-1196)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의 武元直의〈赤壁后游圖>와 작가를 알 수 없는 보스턴 박물관 소장의〈적벽부도〉역시 예로 들 수 있다. 두그림 모두 全景式의 가로방향으로 구도가 전개되었다. 전자의 필법은 남송 馬遠과 夏珪의 영향으로 수묵의 사용에서 웅일한 느낌을 보여주며 후자는 필선의 조직구성에서 北派山水畵의 체계를 따랐다. 소식이 적벽을 유람했다는것에 근거하였기에 宋과 金, 양국의 적벽도의 화면 구성은 상당히 비슷하다. 다른 점은 금나라의 화가는 변함없이 전경식의 구도방식을 취하였으나 남송화가들은 경관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일정 부분의 강과 바위 부분만 그려내어 소식이 밤에 유람을 했던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었으니 남송 “一角” “半邊”식 구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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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所有以赤壁为题材的文学作品中,最为卓著的是北宋苏轼的《前赤壁赋》和《后赤壁赋》两首词,萌发了后世特别是南宋文人的文思和文人画家的画意苏轼(1037-1101)在书画艺术上是一位大胆的革新者,但是,苏 轼在政治上带有一定的保守倾向,被划为旧党。在宋神宗朝,他是新党魁王 安石变法最强烈的反对者之一,他受挫后被迫请调出京,相继被贬官在杭 州、密州(今山东诸城)、徐州、湖州,后因诗中出现“谤词”而被打入大牢 。不幸的是,苏轼在北行的途中,病亡于常州,时年六十六岁,成为新旧党 争的牺牲品。苏轼在湖北黄州贬为团练副使期间的元丰五年(1082),先后写下了《赤壁赋》和《后赤壁赋》两篇不朽的词章有意味的是,赤壁绘画都集中在苏轼的《后赤壁赋》上。北宋末乔仲常是最早将该题材入画的文人。他的 《后赤壁赋图》卷(美国纳尔逊博物馆藏)是现存最早表现这类题材的绘 画,画家以白描线条在八张纸上表现了苏轼游赤壁的前后过程,特别是画家 以截景俯视的构图表现东坡游赤壁一段,可以说,这是迄今最早的可以看到 的截景构图,它是南宋山水画变革构图的肇始之举。在乔仲常之后的南宋,出现了一个令人瞩目的艺术现象,即有不少画家 以北宋苏轼的《后赤壁赋》为题材,或为长卷、或为册页。在南宋,最先肯定这一艺术形式的就是宋高宗,最早的追随者则是宫廷画家马和之和宗室画 家赵伯驌.。南宋初年,宋高宗一方面为了不让金军找到南侵的口实,另一 方面为了笼络士大夫的人心,积极推崇苏、黄,因而苏、黄的书画风格也为 皇室所仿。“绍兴议和”之后,高宗已无心北伐,中晚年的他已深深地感受到 “江山不可复识”的时代内含。 在马和之、赵伯驌之后,见于图像的赤壁图还有南宋后期的宫廷画家 李嵩的《赤壁图》页。最著名的是金代明昌年间(1190-1196)名士武元直 (旧作宋代朱锐)的《赤壁后游图》卷(台北故宫博物院藏),还有佚名 (旧作杨士贤)的《赤壁赋图》卷(美国波士顿博物馆藏),两图的构图大 体相近,皆为北方全景式构图的横向展开,前者的笔墨也许是受到南宋马 远、夏圭水墨苍劲一派的感染,其水墨韵度颇有雄逸之感,后者则更注重线 条的组织结构,均为北派山水画的体系。赤壁题材入画必需具备两个条件,其一是文人画的兴起,其二是内廷的倡导。前者是艺术发展到一定的程度所呈现出绘画的思想性笔墨的个性,后者是南宋朝廷借苏轼的赤壁文学所表达出他们的政治考虑。就苏轼游赤壁一 段而言,宋金两国赤壁图的画面构成有相近之处,所不同的是,金国画家依旧以全景式的构图方式,而南宋画家则以截景的方式,画半壁江矶,使苏轼 的夜游活动更加突出鲜明,无疑是受到南宋“一角”、“半边”式构图的影响。 上述诸多赤壁图反映了北宋末至南宋各种身份的画家以跨越时空的方式,力 图摆脱对失去故土的痛苦和无奈,与北方金国的文人画家如武元直等纯以感 慨江山的心情则有所不同,宋代文人画家乔仲常的洒脱和素雅宫廷画家马 和之的疏放和飘逸、李嵩的凝重和激荡,还有宗室画家赵伯驌的细笔青绿等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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