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중 백미로 꼽히는 북송 시기 소식의『前赤壁賦』와 『后赤壁賦』는 남송 문인들과 문인화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소식은 예술 방면에서는 혁시자였으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띠어舊法黨을 지지하였다. 宋神宗시기에그는新法黨의 수반인 王安石의 신법에 강한 반대를 표출하여 핍박과 고초를 겪으며 시에서 비방성의 글귀가 발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소식은 복권되어 북쪽으로 오는 도중에 常州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6세로 新舊法黨爭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듬해 蔡京은 소식과 황정견 등의 문집을 태워버렸고 글을 읽거나 집안에 두는 것도 엄금하였다. 소식은 湖北黃州의 團練副使로 강등된 元豊5년(1082)에 연이어『적벽부』와『후적벽부』두 편의 불후의 작품을 썼다. 남북조 시기에 적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들은 있었지만 북송 소식 이전에 적벽 소재의 회화를 그린 화가가 거의 없었다. 적벽회화는 모두 소식의『후적벽부』에 집중되어 있다. 북송 말 喬仲常은 가장 먼저 적벽회화를 그린 문인으로 넬슨 앳킨스 미술관 소장의〈后赤壁賦圖〉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적벽회화다. 화가는 백묘로 8장의 종이 위에 소식이 놀던 적벽의 전후과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화가는 배경을 없앤 부감시의 구도로 소동파가 놀던 적벽의 일부분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가장 이른 시기 배경을 생략한 구도로 보이고, 바로 남송산수화 구도 변혁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다. 교중상 이후 남송에는 주목할 만한 예술현상이 나타났는데, 바로 다수의 화가들이 북송 소식의『후적벽부』를 소재로, 두루마리 혹은 화첩형태의 회화를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남송의 高宗代의 궁정화가로 馬和之와 종실화가 趙伯驌은 후적벽부소재를 가장 먼저 채택하였다. 남송 초년에 송 고종은 金君이 남침 못하게 대처하는 한편 사대부들의 인심을 사기위하여 소식과 황정견을 적극적으로 추대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소식과 황정견의 서화풍격이 황실에서 모방되었다. 고종은 처음에 황정견의 서법을 배워 모두가 황정견 서법을 배웠고 후에 미불의 서법을 따라 천하가 미불의 서법을 배웠는데 마지막으로孙过庭의서법을익힘으로孝宗太上(光宗) 모두孫過庭의서법을 썼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남송 서법의 서체의 변화를 볼수 있는것이다. 마화지와 동시대 화가인 趙伯驌역시〈후적벽도〉를 그렸는데, 이것은 明代文徵明이 일찍이 모방했던 조백숙의〈후적벽도〉를 말한다. 이후의 적벽회화로는 넬슨 앳킨슨 미술관 소장의 남송 후기의 궁정화가 李嵩의〈赤壁圖〉를 꼽을 수 있다. 이외 잘 알려진 것은 金代明昌연간(1190-1196)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의 武元直의〈赤壁后游圖>와 작가를 알 수 없는 보스턴 박물관 소장의〈적벽부도〉역시 예로 들 수 있다. 두그림 모두 全景式의 가로방향으로 구도가 전개되었다. 전자의 필법은 남송 馬遠과 夏珪의 영향으로 수묵의 사용에서 웅일한 느낌을 보여주며 후자는 필선의 조직구성에서 北派山水畵의 체계를 따랐다. 소식이 적벽을 유람했다는것에 근거하였기에 宋과 金, 양국의 적벽도의 화면 구성은 상당히 비슷하다. 다른 점은 금나라의 화가는 변함없이 전경식의 구도방식을 취하였으나 남송화가들은 경관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일정 부분의 강과 바위 부분만 그려내어 소식이 밤에 유람을 했던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었으니 남송 “一角” “半邊”식 구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