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청 황제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가 발문한 사 슴뿔 그림인 <녹각도(鹿角圖)>가 소장되어 있다. 기존 연구에서 이 그림은 건륭제가 서양의 회화 주제인 사슴뿔을 서양 화법을 적용하여 그림으로써 서양풍을 모방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전용하고자 한 시도로 이해되었다. 본고는 관점을 달리하여 <녹각도>의 상서적(祥瑞 的) 요소를 발견하고 청 황제들의 대표적인 사냥감이었던 사슴의 뿔이 사냥 전리품에서 산령 (山靈)이 보낸 상서로운 징표, 즉 부서(符瑞)로 변모한 과정을 고찰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북 경ㆍ심양고궁박물원에 소장된 홍타이지, 강희제, 건륭제가 제작한 녹각의(鹿角椅)를 통해 청 황제들에게 있어 사슴뿔이 만주족의 전통과 용맹함을 보여주는 사냥 전리품이었음을 확인 한다. 또한 <녹각도>에 실린 건륭제의 발문인 ‘녹각기(鹿角記)’를 분석하여 이 사슴뿔이 어떻게 부서가 되었는지 밝힌다. <녹각도>에서 건륭제는 사냥감보다 서수(瑞獸)로서의 사슴 을 강조함으로써 청 황실의 사냥 의식이 중시한 만주적 무용(武勇) 위에 한족의 전통 사상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에 의거한 부명(符命)의 가치를 덧입혔다. 이처럼 <녹각도>에서는 사냥을 자연의 정복이 아닌 자연과의 교감으로 해석하여 만주 황권을 성군의 경지로 끌어올 리고자 한 건륭제의 의도가 읽힌다.
9세기 신라 구법승은 당에서 어떤 불교 성물을 보았을까? 이 글은 신라 구법승과 같은 시기 당(唐)에 머물며 장안(長安)과 양주(揚州), 태주(台州) 등지에서 불교 경전과 서적 뿐 아니라 불화와 백묘 도상, 밀교 법구 등을 수집해 간 일본 구법승들의 청래목록(請來目錄) 을 살펴보았다. 입당팔가(入唐八家)라 알려진 일본의 9세기 구법승, 즉 사이초(最澄), 구카 이(空海), 조교(常曉), 엔교(圓行), 엔닌(圓仁), 에운(惠運), 엔친(圓珍), 슈에이(宗叡)가 작성한 청래목록을 읽으며 그들이 가지고 온 그림과 도구 등의 미술사 관련 물목을 정리하 고, 신라 불교미술과의 연관성을 탐색해 보았다. 9세기 일본 승려들이 입당한 주요 목적은 밀교 수법에 필요한 만다라와 도구 등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여정에 따라, 또 개인적인 관심사나 인연에 따라 천태(天台)나 선(禪) 등 비밀 교적인 그림이나 성물도 수집했음을 확인했다. 이들이 공들여 수집한 물건들 가운데에는 신 라 구법승도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고, 신라로 장래(將來)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화본(畫本)으로 전해진 밀교 도상이나 단감(檀龕), 즉 전단목(栴檀 木)으로 제작한 불감 등 그간 신라 불교미술 연구에서 주목해 온 항목을 재확인했다. 이에 더해 근래 주목을 받는 경주 출토 <범한다라니(梵漢陀羅尼)>(본관6860)가 사이초의 목록 에서 보이는 <범한양자수구즉득다라니(梵漢兩字隨求陀羅尼)> 등 범자와 한자 두 글자로 적힌 다라니의 유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조교와 엔교, 엔닌의 목록에 보이는 보리상(菩提像)과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의 유통 양상을 주목했다. 이 외에도 목 록에 보이는 다양한 종류의 고승 진영, 오대산(五臺山) 및 천태산(天台山) 관련 유물, 인불 (印佛)과 인탑(印塔) 역시 앞으로 더 주목해 보아야 할 소재임을 제시했다.
전라남도 곡성군에 위치한 대안사(大安寺)는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 이 창건한 사찰이다. 태안사지(泰安寺誌)에 수록된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裡山泰安寺事蹟) 」에 따르면 대안사(현 태안사)에는 두 구의 약사철조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는 조성 당시의 온전한 형태의 불상이 아니라 ‘철로 만든 손, 즉 철제(鐵製) 불수(佛手)’ 1점만이 전한다. 이 철제 불수는 남아있는 형태와 선종사찰의 사적기, 일제강점기 공문서 등을 고려할 때, 손바닥을 앞쪽으로 뻗은 수인, 즉 시무외인을 결한 오른손으로 판단된다. 동시기에 창건된 실상사, 삼화사, 성주사의 주존불처럼 대안사 철불도 동리산문의 개창 당시에 조성된 노사나불 로 추정된다. 대안사 금당의 노사나철불은 후대에 사적기를 엮는 과정에서 세속의 통념에 따라 약사철조불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동리산문 대안사는 사역 내 금살당(禁殺幢)을 설정하는 등 예영계 왕실의 후원을 받아 사세 를 확장해나갔다. 혜철은 막대한 경제력을 토대로 841년 장보고 사후 급격하게 피폐해진 지방 의 민심을 위무하고 교화하기 위해 철불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실상사, 성주사 등의 지방 선종사찰을 후원하여 승려를 포섭한 문성왕의 지방통치책의 일환이며, 대안사 철불 은 잦은 전쟁으로 고통받던 지역민들의 민심을 결집하는 존상(尊像)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고려청자 문양 연구에서 그동안 모란과 작약, 훤화와 연화 문양의 세부 특징을 분석하지 않고, 훤화를 연화나 초화로 분류하거나 작약을 모두 모란으로 명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 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 정요 자기의 영향을 받은 각 화목의 문양과 구성 요소를 비교 분석하여 문양을 분류하고 명칭 분류의 필요성을 제기하였 다. 대부분 모란으로 분류되었던 작약문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약이 중앙 관사인 중서성을 상징했던 사실도 문헌 기록을 통해 밝혔다. 또 정요 자기에서 연화문으로 분류되던 여러 형 식의 훤화문도 고려청자에 영향을 주었다. 정요 자기와 고려청자의 화훼절지문은 문양 구성이 유사하지만 시문 기법에서는 차이가 있다. 고려에서는 정요 자기의 음각과 유사한 획화 기법 대신에 성형과 시문이 동시에 가능 한 압출양각 기법을 선택하였다. 정요 양식의 화훼절지문 청자는 12세기 전반과 후반의 제 작 경향이 달랐다. 12세기 전반에는 압출양각과 함께 음각 기법도 구사하고, 백색내화토 빚 음이나 규석 받침이 품질 차이 없이 생산되었다. 정요 자기의 문양을 해체하여 재조합하거나 시문 기법을 바꾸는 등 외래 요소에 대한 적극적 변용도 행해졌다. 그러나 12세기 중반 이후 부터는 절요접시의 꺾임이 완만해지고, 모란절지문과 작약절지문만 압출양각 기법으로 13세기 초까지 생산되었다. 또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의 ‘定器制度’에 대해 연관된 여러 용어의 용례를 검토한 결과, 정요 자기의 크기, 형태, 규격 등을 의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정기제도’는 12세기 전반에 고려청자 제작에 정요 자기의 영향이 매우 컸던 상황을 충실하게 기술한 것으로 판단 된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청동 방정의 기형을 모방한 것이다. 11세기말~12세기 전반 고려와 북송ㆍ요(遼) 국가 간 활발한 문물교류를 가졌으며, 이 무렵 송나라 휘종 연간에 편찬된 선화박고도(宣和博古 圖)가 교류를 통하여 고려로 전래되었다.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의 모본은 선화 박고도 권1에 수록한 상나라 청동 ‘상소부정(商召夫鼎)’이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다. 지금까지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 내부에 새겨진 명문은 선화박고도 상소부정 명문의 해석을 인용하여 각각 한자(漢字) ‘亞 召夫 子ㆍ辛ㆍ月(아 소부 자ㆍ신ㆍ월)’로 읽어 냈다. 그러나 선화박고도 자체가 가진 사료적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류가 있 었으며, 명문을 판독할 때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선화박고도의 주석에서 벗어나 그의 실재 한 의미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는 은허(殷墟)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과 은주금문집성(殷周金文集成)에 수록된 명문 탁본을 기준으로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와 유사한 명문을 확인하였 다. 이 논문에서는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 명문 첫 번째 기호에 있는 아(亞)자형 테두리는 상나라 족씨명문(族氏銘文)의 특징적인 부호이며, 본고에는 학계에서 지지도가 높 고 유래가 가장 깊은 ‘아자종묘설(亞字宗廟説)’을 채택하여 명문에 아자는 ‘조상의 묘’와 관 련이 있는 것으로 봤다. 명문의 첫 번째 기호는 상 말기에 지위가 높은 亞(발음 : 아호) 씨족(氏族)의 족씨명문(族氏銘文)으로, 두 번째 기호는 상나라에 실존하는 ‘고죽국(孤竹國)’ 의 국명이자 족씨명문으로 해석했다.
본 논문은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의 복장 기록인 중수 원문(1865년)의 해석과 불 상 양식의 비교분석을 통해 불상의 제작 시기가 1628년임을 밝힌 것이다. 중수 원문의 기록 에 의하면,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628년에 조성되었고, 1802년ㆍ1845년ㆍ 1865년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원 봉안처는 해남 대흥사 대광명전이었고, 1845년과 1865 년에 불상의 중수를 주도한 승려는 초의 의순이었음이 확인된다. 초의 의순은 19세기 전라 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원담 내원(1845년)과 용완(원) 기연(1865년)과 함께 신 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을 개금ㆍ중수했다. 특히 초의 의순은 선교(禪敎)와 학예(學藝)에 뛰 어난 자질을 가졌으며 19세기의 대흥사 불사를 이끈 승려이다. 두 화승(내원과 기연)은 초의 의순이 주도한 대흥사 불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이 1628년에 조성된 사실은 중수 원문의 기록과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상들과의 양식 비교를 통해 파악했다. 초의 의순이 쓴 「대둔사신건광명전상 량문(大芚寺新建光明殿上樑文)」, 「대둔사비로전신건화연소(大芚寺毘盧殿新建化緣疏)」, 「불상개금모연문(佛像改金募緣文)」에 의하면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628년에 조성 된 후 대흥사 대광명전 비로자나삼불상 가운데 좌존으로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 사 대광명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1841년에 새로 건립되었다.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의 양식 특징은 조각승 태전이 조성한 대흥사 목조약사ㆍ아미타불상(1612년)을 계승했고, 현진이 161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제작한 불상과 친연성이 강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응원ㆍ인균파 및 수연파 불상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조성되어 19세기 대흥사 현창 운동 과정에서 새로 건립된 대광명전에 봉안되어 개금ㆍ중수된 불상으로, 교학과 학예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초의 의순이 불상의 개금ㆍ중수 불사를 주도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사 및 불교미술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의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논문에서는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1877~?)의 저작 경주의 전설(慶州の傳說) (1927년 초판)을 중심으로, 석굴암(石窟庵) 본존불 여래좌상과 조선의 민간신앙이 일제강 점기에 근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관계 지어지고 해석되었는지 고찰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들을 내려주는 불상’으로 이미지화된 석굴암 본존불이다. 글에서는 경주의 전설에 기술 된 석굴암 본존불 전설을 확인하고, 이것이 일제강점기 석굴암 본존불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 하는 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핀다. 오사카 긴타로는 경주의 전설에서 석굴암 본존불과 관련된 전설로 삼국유사(三國遺 事)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徳王忠談師表訓大徳)」조의 혜공왕(惠恭王) 탄생 전설을 인 용하고, 이를 당대 조선인의 ‘극단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남아 선호와 연관시켰다. 그리고 석굴암 본존불이 조선인들에게 아들을 내려주는 부처로 신앙되고 있다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기술은 일제강점기 일본 지식인들이 석굴암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석굴암을 타자 조선인의 우상으로 폄하하는 인식은 그것을 동양 의 걸작으로 극찬하는 시선과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동양은 하나라는 태도와 조선은 비문명이라는 태도가 공존하던 근대기 일본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연관된다. 이 글 은 식민지 시기 석굴암에 대한 태도를 확인하기 위해 기존에 연구된 석굴암의 미술사학적 위상 과 더불어, 비문명화된 타자의 우상으로서의 석굴암 이미지를 새로이 확인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