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기의 阿彌陀如來像에 대해서는 7세기 중반의 작품이 확인 되지만 이 시기의 阿彌陀像은 法隆寺獻納宝物144호 불상처럼 彌勒如來圖像을 차용한 倚坐像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당시 阿彌陀信仰이 彌勒信仰과 밀접하게 결합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7세기 말이 되 면 唐代淨土敎의 흐름을 이어가는 阿彌陀信仰을 배경으로 橘夫人念 持佛阿彌陀三尊像을 비롯한 인도식 통견・연화좌 위에서 結跏趺坐를 한 阿彌陀像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도상의 阿彌陀像은 善導流淨土敎 의 수용을 시사하고 있으며, 觀想念佛과 稱名念佛의 대상으로 기능했 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종교적 기능은 8세기 전반의 東大寺阿彌 陀堂의 淨土集會群像에 계승되는 것과 함께 善導流의례에 바탕을 둔 阿彌陀悔過가 阿彌陀堂에서 행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7세기 말에서 8세기 중반의 阿彌陀像은 彫像에서 板佛, 塼佛에 이르기까지 대륙과 반도로부터 전해진 밑그림에 의거해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8세기 후반에는 華嚴敎學과 雜密信仰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阿 彌陀信仰이 雜密的인 색채를 띠었으며, 이와 함께 阿彌陀像의 造像法 도 외부의 밑그림에 의거한 조상에서 雜密經典인 陀羅尼集經에서 말 하는 畵像法에 바탕을 둔 造像으로 변용된다. 法隆寺傳法堂서쪽 불 상은 이렇게 제작된 雜密系阿彌陀像의 전형이라고 생각되며, 이 작품 과 같이 양 손의 엄지와 약지를 함께 구부리는 독특한 설법인을 취하는 阿彌陀像은 당시 雜密信仰이 주로 華嚴의 배경에서 전개되었다는 것 을 시사한다. 즉 陀羅尼集經에서 이야기한 阿彌陀像은 法隆寺傳法 堂서쪽 불상이나 法華寺阿彌陀淨土院본존과 같이 盧舍那佛과 밀접 하게 관련 있는 불상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쪽 불상과 흡 사한 傳法堂중앙의 삼존불상은 서쪽 불상과 대칭을 이루는 盧舍那三 尊像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중국 宋代는 북방의 遼, 金의 침입을 받아 내외적으로 어려운 시대였 지만,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상업과 수공업 방면에서는 큰 발전을 이 룩하였던 시대였다. 특히 陶瓷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각 지역별 로 청자 및 백자와 더불어 黑釉瓷器역시 크게 유행하였다. 필자는 福 建省建窯窯址의 흑유자기 출토 현황을 조사한 결과 송대에 黑釉碗이 다른 器形에 비해 많이 출토됨과 그 중 변화과정이 가장 뚜렷한 黑釉束 口碗에 주목하였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중국의 흑유자기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宋代의 건요 및 建窯系요장에서 출토된 흑유완 중에서 도 黑釉束口碗을 표본으로 편년이 확실한 각 유적에서 출토된 동일한 기물과 비교하여 그 형태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조형적인 특성과 변 화과정을 살펴보면서 흑유완의 전개과정과 송대에 유행한 ‘鬪茶’로 대 변되는 茶문화를 서로 연계하여 흑유완의 유행과 기능을 분석해 보고 자 하였다. 이를 통해, 건요계 흑유완의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으로 기대한다.
본고는 산서와 섬서 지역 두 곳의 명대 사원에 있는 서방정토도상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아미타신앙 및 조상활동이 기층사회 에도 여전히 성행하였으며, 새로운 성취 또한 이룩한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태원 영녕사에 있는 명대 아미타불48원도상은 태원현과 태곡현의 승속 공양인들이 출자하였으며, 남송 왕일휴가 엮은 불설대아미타경 을 근거로 하고 있다. 화면은 산수화와 인물화의 기법이 잘 어울려져 있 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와 같은 종류의 벽화로서는 유일한 유적이다. 다 음은 서안 미타선사 명대 천순6년(1462) 비석의 서방극락세계도이다. 화 면 대부분은 당대부터 내려오는 서방정토경변의 요소들을 빌려 표현하 고 있으며, 동시에 관무량수불경의 내용에 근거해 구상하였다. 이는 한 폭의 전통적 표현방법과 명대의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서 방정토경변굉도이다.
<조완 좌상趙坐像>은 뉴욕 첼시에 있는 미술품보존연구소 Fine Art Conservation Group(소장: 김수연)에서 만난 무신초상화이다(도 1). 이 초상화의 얼굴은 영조 50년(1774년) 1월 15일(음력)에 시행했던 무과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18명의 반신 초상화첩 《등준시무과도상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실린 을과 2등의 조완 반신과 동일한 인물임 이 확인된다(도 2). 18명의 무신상 가운데 당대 전신상으로는 유일본이 발견된 셈이다, 조완은 1724년에 태어나 영조 24년(1748) 정시무과에 급 제한 뒤 관료생활을 하였고, 벼슬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두 작품의 초상화법도 동일 화가의 솜씨여서, 새로 발굴한 <조완 좌 상>의 제작시기를 영조 50년(1774년)으로 보게 한다. 오사모에 해치 흉 배가 달린 동일한 단령포 관복차림이며, 두 손을 검은색 단령포 소매 안 에 넣어 가운데 모으고 양 무릎을 꿇고 정좌한 자세의 전신상이다. 앞의 초상화첩과 동일한 시기인 18세기 후반 도화서 화원 출신들의 초상화법 이 잘 드러나 있다. 약간 우향 한 자세, 뒷면에 흰색을 칠하고 그린 배 채기법, 종2품 가선대부 위상에 걸맞는 흉배와 관복 표현, 가볍게 입체 감을 넣은 얼굴묘사의 음영기법 등은 손색없는 화원의 묘사기량을 보여 준다.
이 글은 19세기 극락세계의 모습을 불화로 가시화한 <極樂九品圖> 에 대해 조성배경과 특징, 그리고 圖像의 연원을 구명한 글이다. 19세기 에는 전체 화면을 가로와 세로로 분할하여 나누고, 극락의 세계과 왕생장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가 출현하여 近畿지역 왕실의 願堂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화를 <극락구품도>라고 하는데 이 글 에서는 서울 興天寺에 봉안된 <극락구품도>를 통해 불화의 도상과 특 징을 살펴보았다. 흥천사는 19세기 후반 고종의 私親이자 실권자였던 興宣大院君李昰 應(1820∼1898)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佛事가 후원되었다. 이하응의 후 원에 힘입어 흥천사에서는 전각을 重修하고, 불화를 새롭게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으며 왕실의 祈福을 기원하였다. 이하응 이외에도 흥천 사에서는 상궁들의 후원으로 불화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흥천사에는 1885년 <극락구품도>를 비롯하여 4점의 불화를 봉안 하였다. 이 때 함께 봉안되었다고 생각되는 <극락구품도>는 독특한 형 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른바 화면 분할식 나한도, 팔상도 등의 불화에도 적용되었으며 19세기에 주로 근기지역에서 유행된 형식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흥천사 <극락구품도>에 보이는 도상을 기본적으로는 극락을 묘사하는 불화나 경전의 變相에서 찾았지만 전각, 기물, 동물의 모티프 등은 당시 현실세계에서 吉祥을 상징하는 郭汾陽行樂圖나 瑤池 宴圖에서 차용하였다고 보았다. 길상의 기능을 하던 이런 그림들은 19 세기 이후 광통교를 중심으로 민간에 유통·확산되었다. 장수와 영원, 多 男과 자손번창, 태평과 복락을 바라는 상징체계가 구현된 회화의 이미 지는 극락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세계에 대한 바람과 이상향의 모델로 차용된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제작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흥천사 <극락구품도> 의 연대를 비정하였다. 1885년 조성되었다고 전해지는 흥천사 명부전 <十王圖> 10폭을 비교하여 전각, 인물표현 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시왕도>는 <극락구품도>를 그린 畫僧大虛軆訓의 화풍과 유사하였 다. 따라서 <시왕도>가 <극락구품도>의 제작자였던 대허체훈이나 그 일파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해보았다.흥천사 <극락구품도>는 19세기 왕실 원당에서 조성된 불화로 당대 인들이 꿈꾸었던 극락 세계의 일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