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소그드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소그드에 관심을 보인 동양사학자들은 소그디아나의 역사와 소그드인의 중국 진출 등에 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1999년 산서성 태원에서 발굴된 우홍묘(虞弘墓)를 비롯한 소그드인의 무덤이 연이어 발굴되면서, 일본 미호뮤지엄이 소장하고 있었던 석관상위병(石棺牀 圍屛)도 소그드와 관련 깊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 소그드인이 교역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종교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일본의 소그드관련 연구 동향과 주요연구를 살펴보고 그 중 아프라시압의 벽 화 중 한반도 사절단으로 비정하고 있는 M24, 25의 인물상의 연구에 대해서도 선행연구를 통해 도상의 성립과정을 검토해 보았다. 또한 일본 미호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소그드계 석관상위병 중 F석판의 검토를 통하여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는 소그드인의 장례의식을 표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미호뮤지엄의 석판 중에는 조로아스터교에 바탕을 둔 당시 소그드인의 장례문화를 구체적으로 전달해 주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소그드 현지에서 발견된 판지켄트 벽화의 장례 장면과 공통점이 확인되기 때문에 피장자가 소그드인이라는 가능성은 보다 확실해 진다. 우리 학계에서도 근년 소그드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일본 학계의 연구 성과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경우가 확인된다. 따라서 본고의 검토를 통해 일본의 소그드에 관한 주요연구와 소장품을 소개함으로써 관련 연구자들에게 누락된 자료를 제공하고 더불어 새로운 소그드 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중국 陝西 臨潼縣에 위치한 慶山寺는 1985년에 우연히 地宮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출토된 <上方舍利塔記>를 통해서 唐 開元 29년(741)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산사 지궁에서는 금은제 舍利具를 비롯하여 淨甁, 錫杖, 香爐, 高足杯, 유리병 등의 다양한 기물이 모두 129점이 출토되었다. 그중에 황동으로 제작된 人面紋胡甁은 재질뿐만 아니라 기형과 도상이 중국 전통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요소가 농후하여 외래품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이 호병의 기형은 구연부가 새 부리형으로 되어 있고 손잡이 상단이 구연부로 바로 연결되며 짧고 두꺼운 권족의 형태에서 소그드 계통의 금속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호병의 동체에 여섯 개로 된 인면상은 종종 힌두교의 스칸다 상이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여러 인종과 종교가 혼합된 인도 서북부 사람들의 얼굴을 모방하여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경산사의 인면문 호병은 황동으로 제작된 소그드 계통의 금속기로 그 제작지는 인도 문화와 소그드 문화 그리고 불교문화가 융합된 인도 서북부 지역일 것이다. 그리고 이 호병은 개원 29년(741) 4월 8일에 4년간의 경산사 중건을 완성하고 성대하게 열린 불교의례에서 공양구로써 사용된 후에 특별히 매납되었던 것이다.
작년 2019년 11월, 세계몽골학회(IAMS)와 사단법인 중앙아시아학회(KACAS)는 우리 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계몽골학회 제3차 아시아학술회의>를 열었다. 학술회의 주제는 ‘몽골의 문화유산-고고학과 문헌자료’였고, 세계 10개 나라의 몽골학 연구자 62인이 주 제발표를 하였다. 그 가운데 몽골정부의 문화정책 담당자 3인이 몽골의 문화유산정책과 몽골학 정책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몽골정부의 문화정책과 몽골학 정책에 대해 언급하고, 세계 각국이 개최한 전시사례를 중심으로 흉노, 튀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제국 등 몽골의 문화자산을 바탕으로 중앙유라시아의 문화정체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에 대한 신앙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를 기반으로 문명을 꽃피웠던 시기인 고전기(9~14세기)에 도서부 동남아시아 왕조를 중심으로 밀교에 기초한 관음신앙이 확대되었다. 이는 이 시기에 조성된 다량의 다비 관음보살상을 통해 뒷받침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오늘날 태국 최남부에 위치한 끄라 지협 (Isthmus of Kra)에서 바닷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는 말레이반도, 수마트라섬, 자바섬에 위치한 왕조에서 다비관음상 조성이 성행하였고, 12세기부터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 영향력이 간취된다. 이처럼 9세기 이후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다비관음상이 다량 제작된 연원은 인도 팔라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마트라섬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슈리비자야 왕조와 중부 자바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샤일랜드라 왕조는 문헌적 근거뿐 아니라, 조각에서도 팔라 왕조와의 교류상을 살필 수 있다. 밀교의 성행과 함께 팔라 시대의 관음상은 존명과 도상 특징이 구체화된 반면, 도서부 동남아시아 왕조의 관음보살상은 힌두적 요소와의 융합과 현지의 특색에 맞춘 변용된 도상들이 발견된다. 특히 본고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조성된 4비관음보살상 가운데 명문을 통해 “로카나타”라는 존명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에 주목하였다. 흥미롭게도 로카나타라는 관음의 별칭은 팔라 시대의 밀교 의궤집과 조각의 명문 등에서도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의궤의 기록과 달리 명문이 확인되는 조각이 매우 다양한 도상으로 조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의 로카나타 조각과 동남아시아의 로카나타 조각에도 도상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이를 통해 본고는 로카나타라는 존명이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밀교의 다양한 형상의 관음보살을 지칭 하는 광의(廣意)의 명칭으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분석하였다.
17세기 교토(京都)에서 형성된 림파(琳派)는 사카이 호이쓰(酒井抱一, 1761~1829)의 활약으로 19세기 초 에도(江戶)에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호이쓰와 그 一門에 의해 19세기 에도에서 전개된 림파를 가리켜 오늘날 에도림파(江戶琳派)라 지칭한다. 에도에서 림파 를 수용한 것이 비단 호이쓰만은 아니었으나 림파를 에도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한 것은 호이 쓰가 유일했다. 本考에서는 호이쓰가 림파를 수용해 에도에 이식시켜 나간 과정을 조망하고 이를 통해 그가 에도림파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고찰하였다. 호이쓰는 출가 직후인 1790년대 후반 무렵부터 고린풍(光琳風) 작화를 시작해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의 100주기인 1815년 이후 본격적인 림파 화가로서 활동하였다. 호이쓰는 고린과 그 동생인 겐잔을 경모하여 추선법요, 유묵전, 묘소 수복, 화보 출판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이들 형제를 현창하였다. 특히 ‘오가타류(緖方流, 尾形流)’라는 표제를 붙인 인보의 출판은 유파로서의 림파를 최초로 규정한 것으로 주목된다. 여기에 호이 쓰를 지지하며 그의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주변 동호인들의 도움이 더해져, 호이쓰는 고린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대외에 널리 인식되었다. 또한 호이쓰는 림파를 학습하고 수용해 이전의 림파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했다. 우미하고 서정적인 정취나 사생성에 중점을 둔 묘사 등 호이쓰가 만들어낸 림파의 새로운 양식은 당대 에도의 문화 향유층인 스이진(粹人) 사회가 추구했던 담박하고 세련된 도회적 감성을 구현한 것이다. 호이쓰가 에도림파 양식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류계급 출신의 에도 토박이(江戶っ子)로서, 교토 상류사회에서 태어난 림파의 본질과 당 대 에도 문화 향유층의 요구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이쓰는 오랜 기간에 걸친 고린 사숙과 림파 수용을 통해 고린과의 인연을 공공으로부터 인정받고 림파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냄으로써, 교토에서 태어난 림파를 에도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했다. 누구나 고린풍에 접근할 수 있었던 당대 에도 화단에서 호이쓰만이 유일한 고린의 계승자, 림파의 재흥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연유라고 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대부터 조선초기까지의 금석문 2,940건에 대한 탁본 이미지, 개요, 판독문, 해석문을 DB화하고 웹사이트(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http://.gsm.nricp.kr) 를 구축하여 2006년부터 서비스하고 있다. 그동안 이 사이트는 금석문 연구자들에게 유용하게 활용되는 한편 자료 업데이트, 탑재된 정보에 대한 오류 수정 등 지속적인 관심과 요구를 받아 왔다. 또한, 2013년 문화재청은 전국 금석문 목록조사 결과에 의해 우리나라에 11,500여건의 금석문이 소재되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연구소는 올해부터 ‘한국 금석문 학술정보 구축’을 시작하였다. 금석문만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학술적 활용성이 크기 때문에 이 과제의 추진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연구자들도 많지만, 반면에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다. 이에, 본 논문은 금석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연구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금석문의 중요성과 금석문 학술정보 구축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