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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美術史學 KCI 등재 동양미술사학 Dongyang Misulsahak(Journal of Asi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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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권 (2016년 9월)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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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신앙에는 하생신앙과 상생신앙이 있기 때문에, 미륵은 보살형과 여래형의 두 종류로 조형화되어 왔다. 이 중에서 보살형의 미륵은 지물 (수병)이나 수인(접법륜인), 좌세(교각좌, 병각의좌, 반가좌 등)에 의해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여래형의 미륵불은 간단하지 않다. 당대가 되면 미륵불은 대부분 예외없이 의좌(병각의좌)상으로 표현되지만, 수 이전의 미륵불은 입상, 부좌상, 교각상, 의좌상, 반가좌상, 유희좌상 등 여러 종류의 형식이 있다. 하지만 수인이나 지물에 미륵으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명문에「미륵」이라고 새기지 않는 한 미륵불을 구분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위에서 의좌상이 미륵불 전용의 자세가 된 것일까? 본고에서는 북조시기의 여래형 미륵상을 주제로 삼아, 의좌형식이 미륵불의 전형이 되는 이전의 상황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특히 의좌계의 좌세인 교각좌와 반가좌, 유희좌의 여래상 중에 미륵불의 가능성에 관 해서도 검토한다. 또한 산서성 평정에 위치한 개화사 석굴의 수 개황원 년(581)명 불반가상의 명문 중에 보이는「진국왕상」을 실마리로 해서 하생미륵과 성왕상의 관계에 관해서도 주목하였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감숙의 돈황 막고굴이나 운강석굴 중기전반까지의 의좌계 여래상은 대부분 석가불이지만, 5세기말 이후 동부지역에서 미륵불이라고 생각되는 의좌나 교각좌의 여래상이 출현했다. 특히 동위 에서 북제시기에 하북을 중심으로 미륵불이라고 확인되는 의좌상, 반가상, 유희좌상이 많다. 게다가 수초 불교를 부흥시킨 문제의 등장으로 성왕이었던 문제에 하생미륵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그 이후 당대에는 의좌의 미륵불로 정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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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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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煌莫高窟제57굴은 제220굴(642년) 이후에 주류가 되는 대화면 의 정토변상도가 출현하기 이전, 당 전기 제1기를 대표하는 석굴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제57굴 바깥 감실 정면 좌우의 하부에 그려 진 보살좌상에 주목하였다. 북벽의 상은 나무 아래에 양 다리를 모으 고 앉았으며, 남벽의 상은 나무 아래에서 등좌 위에 반가사유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 조합, 그리고 이와 유사한 조합을 한 보살좌상은 수 제2기 굴 중에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이 상들은 미륵상과 밀접하 게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제57굴의 경우 정벽 본존은 의좌의 자세 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미륵여래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 제가 되는 2구의 보살좌상은 이 석굴의 조영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 진다. 이러한 불상을 고찰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륵정토를 비롯 한 정토왕생에 대한 생각을 확실하게 밝히는 연구로 이어진다. 또한 본고에서는 託胎靈夢圖·出家踰城圖등에도 주목하고 이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정토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고안과 시도를 밝히고자 한다.
9,800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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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9, 10세기에 만들어진 돈황 막고굴 제231, 237, 72굴 서 쪽 벽감 천장에 있는 서상도(瑞像圖)나 장경동에서 가져온 견본화(絹本 畵)에 그려진 서상 중에 미륵이라는 제기(題記)가 있는 도상을 다루었 다. 특히 이 도상에 대한 선행 연구를 검토하고 수정을 거쳐 새로이 알 게 된 사실을 추가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천축백은미륵서상(天 竺白銀彌勒瑞像)’에 관해서는 미륵을 백은색(白銀)으로 보는 근거를 고 찰하였고, ‘미륵수석가현서상(彌勒隨釋迦現瑞像),’ ‘건타라국백석미륵서 상(健陀羅國白石彌勒瑞像)’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의 견해(同定)에 의 문을 제기하였다. 또, ‘복주철미륵서상(濮州鐵彌勒瑞像)’의 경우를 보면, 인도나 우전(于闐)의 서상이 대부분인 돈황의 서상도 가운데에 극히 드 물게 중국 내지의 서상으로, 문헌 사료에 따르면 구리(銅製)로 만든 모 조상이 개봉(開封)의 건국사(建國寺, 후의 相國寺)에 안치되어 여러 영 험을 보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돈황 사본의 서상기(瑞像記)에는 복 주의 상이 우전의 우두산(牛頭山)으로 찾아 와서 거주하였다고도 한다. 본 원고의 마지막에서는 하남(河南), 서역의 우전, 돈황으로 내력(由緖) 이 옮겨다녔던 복주천미륵서상의 성격과 의미를 논하였다.
11,900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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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발생의 직접적인 관련성 때문에 당대 월요청자 비색자인 옥벽저완(yubidiwan)은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옥환저완(yuhuandiwan)을 비롯한 오대부터 북송시대 월요청자의 유 입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먼저 중국 각 지역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월요청자의 현 황과 유통경로를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오대·송 시기의 최상급 월요청자는 후삼국시대 신라 의 수도였던 경주와 후백제 지역, 그리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주변 의 유적 및 왕릉, 그리고 사찰 및 생활유적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러한 사실은 당시의 최상류층에서 유행했던 월요청자의 소비패턴의 흐름을 통해 확인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옥환저완, 대접, 발, 항아리, 잔, 잔탁, 주자, 타호 등의 수준은 오대·송 집권층과 요 정권에 공납되 었던 월요청자에 버금간다. 발견되는 유적의 성격과 기종별로 보면 고급기종인 항아리, 盞托, 注子, 唾壺등은 개성일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으며, 옥환저완의 경 우 주로 경주 일대와 서해에 근접한 지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발견되 고 있어 불교적인 교류를 통해 오월과 직접적인 루트를 통해 들어왔 을 가능성이 크다. 즉 한반도에서 발견된 오대·송의 월요 비색자의 유 입경로는 정권 간의 외교적 상징이자 불교문화의 매개체로써 하사품 혹은 선물로 전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려에서 이미 자체적 으로 청자를 제작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최고 수준의 월요청자가 고려 의 수도였던 개성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월요청 자가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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