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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美術史學 KCI 등재 동양미술사학 Dongyang Misulsahak(Journal of Asi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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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14권 (2022년 2월)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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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문은 감상의 대상인 화훼를 인간의 조형능력을 사용해 조합하여 예술 전반에 사용한 장식문양을 일컫는다. 이러한 화훼문은 宋代(960~1279)부터 실제 화훼의 모습을 반영하 여 예술 전반에서 단독적인 장식제재로 등장한다. 본 논문에서는 송대 금은기의 조형과 문양 에서 화훼가 적극 반영되는 점에 주목하여, 화훼문이 유행하게 되는 원인과 사용양상을 송대 사회에서 유행한 화훼문화와 결부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南宋代 窖藏 및 무덤 출토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茶, 酒具와 首飾 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송대부터 보편화 되었던 화훼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화훼가 상징하는 의미와 관련된 茶, 酒文化가 있었고, 머리나 몸에 화훼를 지녀 신분을 드러냈던 송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처럼 금은기를 통해 화훼문화를 조명하는 것은 그간 연구되지 않았던 송대 금은기의 성 격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동시에 송대 도시문화의 특징이 어떻게 금은기 에 반영되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송대 화훼문화와 화훼문은 동아시아로 전 파되는 과정에서 遼와 高麗 금은기에 보이는 화훼문에도 일정 부분 영향관계를 살필 수 있어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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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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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19세기 명․청대 박고문자기의 제작배경, 유형과 시기별 특징, 그리고 조 선과 일본도자에 미친 영향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박고문자기는 고동기에 대한 완상 및 애호가 일종의 문인취미로서 확산되었던 명․청대 사회상을 반영한 대표적인 시각작품이다. 그 제작배경과 관련하여 당대 문헌사료들을 통해 박고취미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17~19세기 자기 박고문에서 보이 는 고기물 도상, 문방청완, 팔보 등 기타 길상소재 등의 구성요소로 유형 분류를 시도하고, 유형별 자기 박고문의 편년자료와 양식을 통해 17~19세기 박고문자기의 시기별 특징을 살펴 보았다. 그 결과, 17~19세기 자기 박고문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했으며, 이는 곧 시기별 박고문자기의 변천과 특징으로 이어졌다. 17세기 중후반, 경덕진 민요에서 문인취 향이 적극 반영되어 나타난 박고문자기는 18세기 이후에는 官樣의 내수뿐 아니라 다양한 품종으로 유럽 수출자기로도 크게 성행하였다. 19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자기의 질이 쇠퇴되며, 민간 잡보를 비롯한 여러 길상적 문양요소로 이전보다 더욱 번잡해지는 구성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박고문자기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조선과 일본도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현전 하는 작품들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 영향관계를 확인하였다. 조선의 경우, 조선 후기 골동애 완풍조 등 중국의 복고적 취향을 잇는 주요 매개체로 작용하였으며,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19세기 민화적 요소와 결합되어 자기의 문양으로 변용되었다.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17~18세기 유럽시장을 배경으로 한 수출자기에서의 수용과 변용이 이뤄졌으며, 일본식 미 감이 가미된 일본 수출자기의 특색으로 자리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각국에서 중국 박고 문자기를 수용하는 시기와 경로, 모방과 변용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점을 통해 동아시아 도자 문화에서 갖는 박고문자기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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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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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선조 17년(1584)과 18년(1585)에 개최된 기영연(耆英宴)을 그림으로 기록한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16세기 사연용(賜宴用) 화준(花樽)과 주 준(酒樽)의 조형 특징을 구명하고, 사연에 있어서 두 종류 준(樽)의 진설 방식과 및 진설 의 미를 고찰하였다. 연회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 가운데 준화(樽花)를 꽂기 위한 화준(花樽)과 선온(宣醞)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주준(酒樽)은 16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좋은 품질의 백 자․청화백자로 추정된다. 사연용 화준은 조선 전기 국가 의례서(儀禮書) 및 조선 후기 궁 중연(宮中宴)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호(壺)와 재질․기형․품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식에 있어서 문양을 생략하거나 청화(靑畵) 문양이 장식되었을 경우 소재 는 대나무․매화․화당초문 등 화훼문(花卉文) 계통을 채택함으로써, 사연의 설행(設行) 목적을 투영하는 동시에 궁중연 용준(龍樽)과 차별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조조기영회도> 에 묘사된 주준용 뚜껑은 입구의 가장자리가 위로 살짝 들려 있는 특징에 기인하여 연엽(蓮 葉)형 뚜껑으로 명명하였다. 연엽형 뚜껑은 국가 의례용기, 가마터 출토품, 전세품 등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뚜껑의 사용처와 용도에는 왕실 및 사연용 주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6세기 <선조조기영회도>의 화준․주준 진설 방식과 사연도(賜宴圖) 속 진설 방식 을 종합해보면, 16세기 화준은 다양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진설 되지만, 주준의 경우 획일화 되고 고정된 진설 방식을 보인다.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연회의 주최자인 왕의 교체, 임 진왜란으로 인한 제작 여건 및 관련 기록 소실로 인한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17세기 이후 점차 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사연용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18세기 이후 양상과는 상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16세기 기영연에 화준․주준이 모두 진설 되 었다는 사실은 이 연회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대된 사연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 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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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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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past 20 years, great achievements have been made in the archaeological exploration and excavation of the mausoleums of the Han Dynasty, which has basically proved the shape, layout, and evolution of the mausoleums of the Han Dynasty. Based on the published archaeological materials and the research results of many scholars, this paper introduces the archaeological work and research process of the mausoleums of the Han Dynasty, and focuses on the layout and characteristics of the representative mausoleums. The idea of Han Dynasty is to treat the dead as if he were alive. The characteristics of the imperial mausoleums system in the Western Han Dynast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The emperor and queen were buried in the same mausoleum, but in different tombs; double enclosure; in the outer enclosure, the emperor and the queen had their own small enclosure; There were one or two ditches outside the enclosure wall; the covering soil with truncated square cone; the shape of the mausoleum was a "亞" shaped tomb with four entrance passages, of which the East path was the longest and the main path; there was an outer coffin in the tomb, which was usually made of cypress with the timber headed in; the owner of the tomb was dressed in jade burial suit sewn with gold thread; in the enclosure,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external burial pits, a number of buildings and burial tombs for concubines, ranging from several to dozens; outside the enclosure, there were a lot of funerary tombs; before Emperor Xuan of the Western Han Dynasty, a mausoleum feod was set up near the mausoleum. Compared with the Western Han Dynasty, which paid more attention to mausoleum facilities, the Eastern Han Dynasty advocated plain burial, and paid more attention to sacrificial rites. The mausoleum of the Eastern Han Dynasty was much smaller than that of the Western Han Dynasty, and its characteristics are as follows: the emperor and queen were buried in the same grave; one small enclosure; maybe there was one ditch outside the enclosure wall; the covering soil with dome shape; The shape of the tomb was a "甲" shaped tomb with one entrance passage, which was usually to the south of the chamber; brick chambered tombs, with transverse antechamber, longitudinal posterior chamber, or multiple chambers; the owner of the tomb was dressed in jade burial suit sewn with gold thread; there were stone building and building with hanging bells in the enclosure; there was no external burial pit, and the external burial facilities of the Western Han Dynasty were put inside the imperial mausoleum; There were accompanying tombs in the imperial mausol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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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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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년 동안 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조사․탐사 발굴 작업은 한대제릉의 형식과 배 치, 발전 및 변화의 궤적을 밝혀내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발표된 고고학 자료와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성과와 연구과정을 소개하 고, 능묘배치, 내포된 함의을 중점적으로 소개하였다. 서한(西漢)은 “사사여생(事死如生)” 즉, 죽은자 섬기기를 산자 섬기듯 하였는데, 황제릉제도의 특징을 요약하면, “제후동토부동 혈(帝后同茔不同穴)”로, 황제와 황후는 동일 묘역에 장례를 치루지만, 각자의 능원을 가지 며, 이중능원, 외릉원 안에서 제후는 각기 소능원을 가지며, 능원담장 밖에는 한겹 또는 2중 으로 해자를 둘렀다. 복두형 봉분으로 4개의 묘도가 있는 아자형묘(亞字形墓)이며. 가장 긴 동쪽의 묘도가 무덤의 주묘도이다. 무덤 안은 황장제주의 목곽구조이며, 묘주는 금루옥의를 입고 있다. 능원 안에는 대량의 외장갱이 있고, 여러 기의 건축물이 있으며, 비빈의 합장묘 가 있다. 수량은 몇기에서 수십기로 차등이 있다. 능원밖에는 대량의 배장묘(陪葬墓)가 있 다. 서한 선제이전의 제릉은 근처에 능읍을 설치하였다. 동한(東漢)은 박장(薄葬)을 부르짖 어, 서한시대의 능묘시설을 중시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제사의식을 더 중시하였으며, 동한시기 제릉의 규모가 서한 때 보다 훨씬 작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제후동혈장(帝后同穴葬)으 로, 한겹의 능원으로 규모가 작거나 혹은 한 겹의 해자가 있거나 또는 원구형 봉분이다. 무 덤형식은 묘도가 하나인 갑자형묘(甲字形墓)로, 묘도는 통상적으로 묘실의 남측에 있다. 묘 실은 가로형 전실과 세로형 후실이 있거나 혹은 다실(多室)의 전석묘(磚石墓)이다. 묘주는 몸에 금루옥의를 걸치고 있다. 능원 안에는 석전(石殿)건축과 종거(鐘簴)건축이 있다. 외장 갱이 없는 것은, 서한시기의 외장체계를 무덤 안으로 포함시켰으며, 배장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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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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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작품은 1950-60년대 많은 외국 소장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박수근의 작품 이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그의 후원자를 자처한 마가렛 밀러, 미대사관 문정관 의 부인 마리아 크리스틴 헨더슨(Maria-Christine Henderson, 1923~2007), 그리고 미 국 무역상사 주재원의 부인 실리아 지머맨(Celia Zimmerman)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 진다. 이 글에서는 외국인 소장가들의 작품 소장 배경을 추적해보고, 그들과 박수근을 이어 준 반도화랑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반도화랑에서 마가렛 밀러와 실리아 지머맨 그리고 마리아 헨더슨의 주도로 이루어진 모 임과 행사는 단순히 문화에 관심을 가진 동호인들의 친목 성격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당사 자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외견상 순수한 문화공간인 반도화랑 이면에서는 문화 냉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에서 박수근의 작품이 외국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것이 외국 소장 가들에게 동서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의 정서를 건드리는 미적 요소를 갖고 있 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반도화랑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 는 평범한 인물들에서 박수근 개인이나 전후 한국인의 초상 또는 한국적 전통 이상의 것을 보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 소장가들이 박수근의 작품에서 2차대전 종 전 이후 확산하여가던 문화 냉전에 처한 인류의 초상을 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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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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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의 주요 특징으로는 기법과 수법의 상위개념으로서 ‘화법’ 개념의 정립, 색채의 주관적 인식(일반성)과 객관적 지각(개별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제 색(본색)’ 개념의 부상, 예술적 형상화의 높이에 올라선 ‘예술적 필치’ 개념에 대한 강조 등 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은 대립하는 것들의 중재, 또는 갈등의 봉합을 추구했다. 그들은 ‘화법’, ‘제색(본색)’, ‘예술적 필치’ 등을 내세워 선과 색, 본색과 반사색, 몰골법과 구륵법 등 대립으로 이끌어지기 쉬운 것들을 담론 체계 안에 효율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화의 개조발전과 현대화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렇듯 조율과 중재, 봉합과 화해를 지향하는 개념들은 차이들, 곧 서로 다른 입장들이 경쟁하 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장의 역동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대에 구축된 조선화 형식체계는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면서 조선화 창작과 수용에 절대적인 영 향력을 행사했다. ‘화법’, ‘제색’, ‘필치’ 등의 개념들은 모두 조선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의 능동적 관여를 강조했지만 그 관여는 언제나 지배체제의 이념이 정해준 길을 따라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조선화 형식론은 궁극적으로 형식 문제를 이념 문제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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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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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在外) 한인(韓人) 즉,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는 한민족(韓民族) 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모국을 떠나 세계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한민족 ‘이산(離散)’을 의미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의 가장 핵심적 개념은 ‘타의(他意)에 의 한 이주’라고 할 수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을 그들이 지닌 민족적 정체성 측면에서 분류하고 분석해보면 ‘①기억(記憶), 이산의 역사 ②근원(根源), 뿌리와 정체성 ③ 정착(定着), 또 하나의 고향 ④연결(連結), 이산과 분단을 넘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나누 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기억(記憶), 이산(離散)의 역사’는 아시아의 재외 한인 이산의 역사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개인적인 기억과 서사를 다룬 작품들로 나타난다. 자발적이 아닌 타의(他意)에 의한 이주, 원치 않고 준비되지 않은 이산(離散)의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記憶)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의 첫 번째 정수(精髓)이다. 두 번째, ‘근원(根源), 뿌리와 정체성’은 해외 한인 동포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에 관한 것 이다. 대부분의 재외한인 동포는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에 속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다. 재일동포의 경우에는 일본으로의 귀화를 종용 당하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 하기도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조선적’이라는 무국적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혈 통에 따른 국적과 거주지에 따른 국적의 불일치라는 이중적 상황과 현지에서 소수자로서 살 면서 당하는 차별과 부조리함은 슬프고 서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떠나 이주를 시작한 증조부모나 조부모의 모습에서부터 부모와 가족을 그린 그림들, 자신의 자화상, 그리 고 백두산과 제주도 같은 혈통적 조국 산하의 풍경, 탈춤이나 돌잡이, 제사와 같은 풍물과 전통적 관습 등을 그린 여러 동포 작가의 작품에서는 한민족으로서의 혈통적․문화적 정체 성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정착(定着), 또 하나의 고향’은 아시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조국을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세상에 정착하고 적응하면서 만나게 되는 시각적 대상을 그린 작품 들을 보여준다. 또 다른 고향인 현지의 자연 풍경과 도시의 모습, 인물과 풍속, 역사와 종교 등은 그들 작품의 주제가 된다. 혈통적 조국이 아닌 거주국의 국민으로서 갖게 되는 국가․ 국토․현재에 대한 애정이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 간취된다. 모든 예술은 풍토성을 띠는 것이 당연하므로 거주국의 관습과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거주국 미술계의 역사와 현대미술의 상황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네 번째, ‘연결(連結), 이산과 분단을 넘어’는 동포 작가들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한반도의 문화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투영하여 그려낸 작품들이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족 분단 국가인 한반도에 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재외 한인 작가들에게도 남과 북의 대치 상황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이 마주하는 대화의 자리가 자주 열 려, 분단을 극복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확립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그림들이 꽤 많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의 미술이 이산과 분단을 뛰어넘고 한민족을 위한 축복과 번영의 매개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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