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당에서 오대를 거쳐 북송과 남송에 이르는 시대는 중국회화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이 시기 회화의 양상은 이후 중국 회화의 전개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산수화에서는 수묵대관산수 양식의 성립과 발전, 화북산수화와 강남산수화라는 상이한 산수 화 양식의 형성, 문인산수화의 대두를 통해 이후 산수화 전개의 기반을 마련한 전범을 창조 하고 지속적으로 화가들의 창작력을 자극한 여러 화파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오대와 북송대 산수화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고 오대에서 북송을 거쳐 남송 초까지 산수화에 나타난 변화와 그러한 변화의 시대적 배경을 고 찰하여 중국 산수화의 창신 및 전범의 형성과 전통의 성립 과정을 파악하였다. 나아가 북송 과 남송 교체기인 12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원화가인 李唐과 문인화가인 李公年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오대에서 남송에 이르는 산수화의 양식적 변화 및 창조와 모방, 전승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구명하여 이 시기 산수화의 흐름을 조명하였다. 남송대 이 후 중국산수화는 이 시기에 마련된 전통을 계승하고 변용을 거쳐 다시 새로운 전통을 창출한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음으로 오대에서 남송까지 산수화의 발전과 변화의 양상을 정확하 게 파악하는 것은 후대 산수화의 흐름과 함께 화가의 독자적인 창조를 통한 성취나 작품의 우수성 및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五代十國시기는 중원의 물적, 인적 자원이 대량 양자강 남쪽으로 이동했던 시기 이다. 이는 당 말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안정된 정세 속에서 새롭게 번성하였다. 특히 南唐의 南京은 산동성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매번 북방이 혼란해 질 때마다 동북쪽 이민 들이 이동하여 밀집되는 곳이다. 서하사의 역사적 배경에도 이러한 동북방 유민들의 영향이 확인되며 사리탑의 조성 배경 에서도 동일하게 찾아진다. 또 다른 주요 요인은 당시 중국 남쪽에서 성장하여 특히 남부 지 방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법안종의 화엄적 성격이다. 서하사 사리탑은 화엄경의 깨달음으로 여래가 출현하면서 불, 보살, 천왕, 역사상, 나 한 등이 화엄삼성의 연화장 정토 세계에 함께 모인 장면을 華嚴藏海 위에 구현하고 있으며 밀첨식 지붕, 3단의 앙연판 탑신받침, 목조 건축을 세밀하게 표현하면서도 공포 부분을 생략 하고 둥글게 처리한 지붕돌 등의 양식은 당 중기 이후 조성되는 중국 동북방 지역의 밀첨식, 화엄경 석탑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어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吳越 杭州 지역의 석탑 3기는 유사한 배경 속에서 먼저 조성되지만 서하사사리탑과는 달 리 지역적 특색을 발휘하며 새로운 진전을 보인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중국의 중심 문화는 오대 이후 남쪽으로 그 중심축을 이동했으며 이들 문화를 수용한 송나라는 개봉을 수도로 중국 문화의 맥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중국 강소성 소주 운암사 탑과 서광사 탑, 그리고 절강성 금화 만불탑 안에서 발견된 소형 금동불상의 종류와 상태, 그리고 상들이 탑 내 봉안된 의미를 탐색한 글이다. 오대~북송 초, 즉 10세기 후반~11세기 중엽에 조성된 세 탑 안에서는 탑의 제3층 탑신부 혹은 탑 아래에 조성된 석실에서 각기 6구, 9구, 그리고 60여 구의 금동불이 수습되었다. 이 시기 불탑 안에 소형 불상이 안치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안치된 상의 성격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논문은 상의 상태와 제작 시기 를 조사하여 대체로 이들은 탑보다 적게는 50년, 많게는 500여 년 앞서 제작되었으며, 광배 가 결실되거나 상의 일부가 파손된 채 안치된 것이 많음을 확인했다. 파손된 옛 불상을 탑 안에 넣은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唐宋전환기라 불리는 이 시기 두드러지게 보이는 佛事의 신경향을 주목했다.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소형 불상의 제작이 감소함과 동시에 불상이나 탑내 다양한 공양물을 넣는 불사가 크게 유행했으며,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된 지 오래되 어 발원의 의미가 희미해진 옛 불상을 매장한 관습이 그것이다. 파손된 불상을 수리하여 사 찰의 경내에 보관하거나 소형 금동불을 불전에 진열해 놓았던 唐 이전의 관습 대신 오래된 상들을 매장하는 것이 당시 중국 각지에서 유행했는데, 江浙 지역에서는 그러한 불교 교장 을 조성하는 대신 탑이라는 공간 안에 옛 금동불을 모아 넣었을 것으로 보았다.
도솔천(兜率天)에 머무르며 법문을 설하는 미륵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날 미래의 부처로서 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신앙되어 왔다. 이에 미륵 신앙은 사후 미륵보살의 주처인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 신앙과 미래세에 출현할 미륵불의 설법 을 듣고자 하는 하생 신앙으로 크게 나누어 보기도 한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고평(高平) 개화사(開化寺) <미륵상생경변상도(彌勒上生經變相圖)>는 북송대(960~1127)에 그려진 사찰 벽화로 오랜 기간 잘못된 명칭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작품의 주제가 명확해지 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미륵상생경변에 관한 선행 연구에서는 다수의 작품이 현존하는 서하와 천산 위구르의 사례를 통해 당대(618~907) 이후 불교가 쇠퇴한 중원(中原) 과 달리 이 지역에서 미륵 신앙이 성행한 것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최근 <미륵상생경변>으 로 재규명된 본 벽화와 더불어 다양한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북송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고, 왕실과 사찰 그리고 민간에 이르기까지 미륵 신앙이 상당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개화사본과 유사한 도상과 화면구성을 보이는 서하와 천산 위구르 작품과 비교해 보면 본 벽화가 가장 많은 수의 장면을 보다 충실하게 도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화사본을 비롯한 모든 작품에 표현된 건축물의 구조와 세부 부재가 정교한 계화(界畫) 기법 으로 그려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족 문화의 중심인 중원에서 성립한 도상이 이웃 국가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당시 북송과 이웃 이민족 국가 간에 불교문화가 적극적으로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장의예술은 보수성을 띄며 전례를 중시하기에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민족성과 지 역성이 아닌 시대와 사회 변화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송 말엽 화북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벽화고분은 전례 없는 특이점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 와 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벽화고분의 주요 주문자인 묘주층의 사회적 신분 변화가 지적된 바 있다. 송대 이후 성장한 부유한 중간계급은 기존의 상류계급 전유의 고급문화를 선호하여 벽 화고분 축조를 주도했지만, 형식상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벽화의 구성과 양식을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는 등 자기화하였다. 북송대 이후의 신흥 묘주층은 벽화고분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 을 뿐 아니라 벽화고분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이용되는 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이 점에 있 어 북송대 벽화고분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이 해되고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볼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본 연구는 북송대 벽화고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이는 벽화 속 <宴飮圖>를 집중 분석하여 이 시대의 벽화고분이 오대 이후 급변한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 이 주목하는 <연음도>는 묘주부부가 한가로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으로 단순히 벽화를 구성 하는 하나의 도상일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묘주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그들의 내세생활을 대변하는 벽화의 중심 주제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그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묘주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강조되며 사자의 특권으로서 현실에서 보기 힘든 신비로운 광경들이 연회의 장면으로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북송대 고분벽화에서의 <연음도>는 묘주의 표현으로부터 전반적인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이전시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는 ‘세속성’ 의 강화로 요약되며 이는 묘주인 중간계급이 벽화고분 축조와 사용에 투영한 그들만의 바람 을 반영한다. 본 연구는 북송대 고분벽화 속 <연음도>에서 세속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 현되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이 벽화고분이 오랜 전통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작용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송대 금속공예는 仿古銅器와 金銀器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방고동기 는 예제개혁과 회복을 통한 권력강화를 위해 황실 주도 하의 진행된 금속공예였다. 북송의 방고동기는 휘종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고, 상대 고동기의 기형과 서주 고동기의 명문을 적용하였으며, 부분 주조 후 접합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남송대 방고동기는 紹興, 紹熙 연간에 주로 제작되었고, 宣和博古圖를 바탕으로 淳熙釋尊制度圖, 紹熙州縣釋奠儀 圖와 같은 예서를 활용하여 새로운 경향의 방고동기를 만들었다. 송대의 금은기는 재질의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사용이 보편화 되었는데, 東京夢華錄등 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송대 금은기 사용의 보편화는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의미하 는 것으로 금은기 소유는 제한적이지만, 사용은 영업장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었 다. 송대 금은기는 협층법과 거푸집 단조 등 전대와는 다른 기법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협층법은 기형의 중후함과 내부를 매끄럽게 만들어 사용이 편리하였고, 거푸집 단조는 동일 기형을 대량생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문양 표현에서는 화훼문과 인물고사 등이 주요 문 양으로 등장하였고, 타출기법으로 문양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송대 방고동기와 금은기는 재질과 기형, 문양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금은으로 방고동기를 만들고 고동기의 문양을 금은기에 적용한 것은 당시 금은기에도 방고동기의 영향이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대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인 방고동기와 금은기의 소유는 황실과 관료 등의 지배층에 국한되었지만, 소비와 사용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방고동기의 사용은 황실과 관료 등 지배 층에 국한되었지만, 금은기는 영업점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던 공예품이었던 것이다. 송 대 방고동기와 금은기는 역할의 차이가 있었지만, 황실에서 민간으로 그리고 상품화로 다양 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 송대의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이었다.
송대의 연유자기는 문인취향을 근간으로 하는 청ㆍ백자와 함께 송대 도자문화를 구성하 는 중요 요소이자 송 사회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송대 연유자기는 명요 생산품에 비해 만듦새가 조악하여 민간 취향으로 치부되어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그동안 간과되어온 송대 연유자기에 주목하여, 생산지와 제작 기술적 문제, 더 나아가 소비양상을 고찰하였다. 문인취향의 청자와 백자가 송대 도자의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한편으로 연유자기는 기술 적으로 唐代의 연유도기보다 진화되어 이미 일상용기를 비롯한 예기, 부장품과 명기 등에 대한 수요로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보다 더욱 확장된 생산규모는 송 사회의 연유자 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음을 방증하며, 소비 계층 역시 상류층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 게 사용된 점이 확인된다. 그 외 송대의 연유자기는 지역별 출토양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가령 북방은 일상용품이 주를 이룬다면, 남방은 도용과 같은 부장품의 출토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특히 승려나 불상, 馬首人身ㆍ鳥首人身ㆍ人首蛇身ㆍ12지신 등 도교적 도상의 출현은 송 조정의 정치적 통치와 판단에 따라 유ㆍ불교가 조화된 사상의 확산에 따른 결과물로 이해된다. 특히 사 천지역에서 유독 도교적 도상의 출현이 많은 배경에는 도교의 발원지로써 일찍이 도교신앙이 널리 보편화된 배경을 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곳이 남북교통로의 접전지로 당대 북방 중 원지역에서 성행했던 삼채도용 제작과 장례문화가 남방으로 이전될 수 있었고, 남북방의 문 화가 융합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고는 일본 헤이안 시대 말에서 가마쿠라 시대 초기 중국에서 전래된 차의 수용 양상 을 천태대사공(天台大師供), 계어독경(季御讀經), 북두법, 나한신앙과 나한공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당시 궁정과 사원 의례 및 승원에서 사용된 차의 구체상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입송(入宋) 일본 승려들의 일기류 문헌, 선원청규(禪苑淸規)를 포함한 송대 사원의 각종 규칙서, 당시 남송 승원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나한도에 표현된 끽다 관련 양 상을 함께 분석하여, 일송(日宋) 교류의 배경 속에서 입송 일본 승려들이 중국에서 경험한 사원 의례와 승원 문화 속 차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것이 어떻게 일본에서 수용되었 는지 그 구체적 일면을 고찰한다. 의례적인 관점을 통해 단순한 기호 음료가 아닌 갖추어야 할 공양물로서의 차 그리고 영적인 효능이 기대되던 차의 구체적 사용양상을 이해할 수 있으 며, 중국 송대 사원의 의례와 규율이 일본에 전래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