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성 집안시의 장천1호분 예불도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예불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단순히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불교에서의 절하는 방법은 이마를 땅에 닿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논문에서는 인도에서조차 잘 표현되지 않았던 이러한 예불방식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절하는 모티프는 간다라미술에 자주 표현된 연등불수기본생도에서 수메다가 헌신적으로 진흙바닥에 머리카락을 펼치며 몸을 눕혔던 것을 묘사한 장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특정한 설화 속의 장면을 넘어 보편적인 예불의 행위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절하는 방법에 익숙했던 동아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술 속의 수메다의 행위를 부처에 대한 배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아가 장천1호분 예불도의 불상 좌우측에 배치된 예불자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는 우요의 방식으로 예불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이 시기 예불방식에서 우요가 중요했을 것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증할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예불도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100여 년 안에 이러한 예불방식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장천1호분 예불도는 정황상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히 실내ㆍ외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상에 등장하는 부처가 단순한 불상인지, 아니면 석가모니의 현현한 모습의 묘사인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실내, 즉 법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러한 구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야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법 장면이라면 조각상이 아니라 실제 석가모니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경에 등장하는 하얀 연꽃 봉오리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백련의 꽃비를 연상시킨다. 물론 예불도가 그려진 공간이 무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미타불, 그리고 극락세계에서의 연화화생 등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내세에 미륵삼회설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상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석가모니의 ‘무량삼매’에 의해 부처가 타방세계에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석가모니가 고구려에 현현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음을 제시해 보았다.
이 논문은 남북조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불상을 바라보던 시각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사원의 중심이 스투파였다. 문헌에 의하면 붓다의 열반 후 스투파는 8기가 건립되었지만, 아쇼카 왕이 이 중의 7기를 해체하여인도전역에8만4천기의 불탑을 세웠다고하였다. 이것은 인도 전역의 거의 모든 불탑은 사실상 아쇼카 왕 시절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에 사원을 건립하면서 불사리가 필요했지만, 역사적으로 이를입수하기란거의불가능에가까운일이었을것이다. 때문에 集神州 三寶感通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쇼카 왕이 8만4천탑을 세울 때 그 일 부가중국에세워졌고, 그때의사리가발견되어 중국의 초기불탑들에 봉안된 것이라는 설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만으로는 더 많은 불사를 건립하는데 있어한계에부딪쳤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은 사리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으로도 탑을 세울 수 있다는 개념이었는데, 그러한 아이디어는 석가성도지인 보드가야의 중층누각형식의 마하보디 사당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하보디 사당은 사리가 아닌 석가성도상을 봉안한 건축물이었는데, 당시 보드가야를 방문한 중국의 구법승들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특히 현장과 같은 승려는 장안 慈恩寺大雁塔을 세울 때 이 마하보디 사당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탑 대신에 전혀 다른, 보다 쉬우면서도 직접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불상이었다. 인도에서도 불상이 있었지만, 이는 주로 탑을 장엄하는 용도였으며 혹, 사리를 봉안한 불상이 불탑만큼 존숭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안의 사리 때문이었지, 상 자체의 영험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상들 역시 불사리처럼 진정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아쇼카 왕의 조탑 설화와 마찬가지로 아쇼카 왕 조상 설화가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소위 아쇼카 왕상이라고 하는것은 오래 전에 중국에 전래되어 묻혀 있다가 새롭게 발굴되어 남북조 시대 사람들 앞에 다시 현현한 것으로 서당시 사람들에게 믿어졌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상들은 다양한 기적을 일으켰으며, 만약 똑같이 복제되는 경우, 원본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미지를 복제함으로서 영험함도 복제할 수 있다는 이러한 경향은 보다 쉽게 불상의 진정성을 널리 유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의 일부 불상들은 아쇼카 왕이 만든 상, 혹은 그 상을 복제한 상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불상들은당시에제작된것이아니라, 훨씬오래전에제작된불상, 혹은오래된 양식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들 불상이 보이는 양식은 당시의 양식이 아니라, 당시보다 더 오래된 양식으로 보이기 위한 의도된 고식, 혹은 고법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의 양식을 倚古양식으로 불러보고자 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우다야나 왕 조상설화도 전래되었는데, 이것은 우다야나 왕 시절에 도리천에 장인을 올려 보내 석가모니의 진용을 모사해 와서 조성한 상이므로, 석가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조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말하자면 석가의 초상으로서 사실주의를 어느정도 바탕에 두어야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본다면불교미술에서 사실적 양식이라고 언급해 왔던 인도의 굽타 양식이나 이를 받아들인 북위시대 운강석굴 초기의 불상 양식들은 서양의 사실주의와 구분하여 眞容양식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제시해 보았다. 결국 이러한 고찰을 통해 단순히 인형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불상들에 사리를 대신한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쇼카 왕 설화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 내거나 우다야나 왕 설화와 같은 시각적 전통에 의지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