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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美術史學 KCI 등재 동양미술사학 Dongyang Misulsahak(Journal of Asia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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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권 (2026년 3월) 1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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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918~1392) 금속공예품의 명문에는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나 간지, 봉안처와 기명의 명칭, 발원자와 만든 장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명문을 바탕으로 금속공 예품의 제작시기와 양식, 발원자의 신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금석문을 수집, 정리, 간행하였던 선학들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였 고, 2000년대부터 디지털화된 금석문의 서비스가 제공되면서 시 ․ 공간적 제약 없이 금석문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국가유산지식이음 연구DB의 금석문 사이트 서비스의 방 향성은 향후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의 이미지와 명문의 이미지 등에도 확대 제공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소장처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금속공예품 명문에 대한 불교사의 연구는 명문을 통해 불교공예품의 조성방식과 자 원의 소비와 관련한 사원경제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미술사는 명문을 바탕으로 범종과 향완, 금 고에 장르별 연구와 함께 명칭과 발원자와 발원 내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정 불교의례에 사용된 불교공예품의 재구성과 진설은 불교공예 연구에 새로운 시도였다. 향후 불교사와 미술사의 연구는 입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사는 명문에 담긴 바람과 의식, 미술 사는 불교공예품이 어떤 공간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고, 이것이 어떤 의례와 관련된 것인지를 다루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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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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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 금속공예품의 명문(銘文)은 기물의 부속 정보나 장식적 요 소를 넘어 제작 당시의 사회 구조와 종교적 신념 및 기술 수준을 투영하는 ‘문화적 텍스트’이다. 본 논문은 그동안 축적된 조선시대 금속공예품 명문 연구의 동향을 고찰하여 학술적 위상을 재조 명하고,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향후 연구의 지향점과 활용 방안을 탐색하였다. 먼저 시대별 ․ 주제별 연구 성과를 검토한 결과, 초기에는 유물 수집과 명문 판독에 치중하였으 나 점차 자료의 축적과 체계화가 이루어졌으며, 최근에는 문화사적 맥락에서 명문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연구의 지평이 확대되었다. 비록 불교공예품과 일부 기물에 연구가 편중된 경향은 있으 나 기물의 명칭과 발원 배경, 장인의 활동상, 왕실 제도 및 군사 체계를 규명하며 학계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다만 일상용 기물에 대한 검토는 여전히 미흡하며 명문 자료의 통합적 집성과 체계적 인 분석 시스템 구축은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이에 향후 명문 연구는 대상 기물의 범주를 확장하여 정교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또한 동시대 문헌 및 시각 자료와의 비교 분석을 병행함으로써 명문에 대한 문화 사적 이해를 심화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명문 연구의 학술적 ․ 실용적 가능 성을 확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전시 및 교육 콘텐츠 개발, 문화유산 보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융복합 문화 자원으로서 명문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을 제언한다.
7,000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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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銘文)이 표시된 도자기는 도자사(陶瓷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소비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는 점각(點刻)이나 묵서(墨書) 명문은 그릇이 실제 사용되는 과정에 명문 자체도 기 능했으니, 해당 명문은 ‘동시성’을 지닌 일종의 금석문(金石文) 자료에 해당한다. 관련 문헌이 상 대적으로 부족한 도자기 역사 연구에서 그릇에 표시된 명문은 제작 시기와 생산 및 소비 환경을 가늠하는 단서의 역할을 한다. 백자에 표기된 명문은 내용을 통해 그릇 관리의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점각과 묵서 명문은 한양 같은 복잡한 도회지(都會地) 유적에서 주로 활용되던 유형으로 조선 전기를 중심으 로 후기에도 쓰임이 지속되었다. 점각은 그릇 전체가 시유된 양질 백자에 명문을 표시하기 위해 주로 쓰였고, 묵서는 여러 개의 그릇을 포개어 번조하기 위해 굽은 시유하지 않은 조질 백자의 굽에 필요한 내용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점각과 묵서 백자가 출토한다는 것은 해당 유적이 대여나 증여 등을 통해 소유자가 다른 그릇이 뒤섞일 개연성이 있는 복잡한 환경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러 한 명문 백자는 한국 도자사와 더불어 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 생활사(生活史) 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료이다.
6,100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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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근세 류큐왕국(琉球王國, 1429~1879)에서 제작된 누각산수인물문 나전칠기에 나타난 중국풍 양식 요소를 밝히고, 류큐제 누각산수인물문 나전칠기가 일본에서 중국제 나전칠 기의 대체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찰한 것이다. 류큐왕국에서는 적절한 기후와 재료 수급 조건 덕에 일찍이 다채로운 칠기 문화를 꽃피웠는 데, 근세로 접어든 후에는 중국 명대(明代, 1368~1644) 이후의 나전 기법을 도입하고 누각산수 인물문을 시문한 중국풍 기종의 칠기를 많이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609년, 류큐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고자 했던 사쓰마(薩摩) 지역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류큐를 침략한 시기와 맞물린다. 사쓰마로부터 지원을 받아 중국과 밀접하게 교류하게 된 류큐는 중국 최신의 나전칠기 제작 기술과 양식을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화려해진 차 문화 속에서 청패(靑貝)로 대표되는 중국풍 나전칠기가 인기를 끌었으나, 왕조 교체기의 혼란 및 청(淸, 1616~1912)의 해금 정책이 이어지면서 일본 내 중국제 나전칠기의 공급에 차질이 생 겼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쓰마 번에 종속된 류큐는 사쓰마의 요구에 따라 중국풍 나전칠기 를 제작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 연구는 근세 이후 류큐제 중국풍 나전칠기를 당시의 국제 정세를 반영한 미술 문화로 파악하고자 한 시도로, 류큐제 누각산수인물문 나전칠기가 중국제 나전칠기의 수급이 어려워짐에 따 른 대안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보았다. 17~18세기 류큐 칠기에 ‘흑칠 나전의 발 전’이자 ‘쇼군 및 다이묘에게로의 헌상품’이라는 수식이 오랫동안 붙어 왔지만, 누각산수인물문 나전칠기를 중심으로 류큐제 중국풍 나전칠기에 나타난 중국풍 양식 요소의 실체와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명 및 해석해 보았다는 데 본 논문의 의의가 있다.
8,10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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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8세기 후반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재위 연간에 활동한 무관 이창운(李昌運, 1713~1791)의 70세 모습을 그린 〈이창운 초상(李昌運 肖 像)〉 관복본(官服本)과 군복본(軍服本)의 양식적 특징과 제작 동기를 고찰하여 무관 초상화(武 官 肖像畵)로서 미술사적 의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 무관 초상화가 주로 공신도상 형태의 관복본으로 전해지 는 것과 달리, 〈이창운 초상〉은 관복본과 군복본이 병존하는 희귀한 사례로서, 조선 후기의 무관 초상화 제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양식적으로 두 초상화는 18세기 후반 유입된 서양 화법의 영향으로 인물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핍진성(逼眞性)을 구현하였으며 동시에 전통적인 화법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초상화임을 확인했다. 특히 군복본에서 군복(軍服)이라는 도상과 등편(藤鞭) 을 쥔 오른손의 묘사는 무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시각화하였음을 고찰하였다. 또한 관복본에 남겨진 찬문과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 제작 당시의 인적 접 점을 토대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한종유(韓宗裕, 1737~?) 혹은 그와 비슷한 기량을 지닌 화가가 두 초상화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창운의 생애와 그의 집안 배경, 인적 교류 관계를 재구성하여 제작동기를 살펴 보았다, 이에 1782년 이창운이 총융사(摠戎使)로 임명된 것에 집중하였다. 두 초상화는 국왕의 각별한 신임에 보답하고, 성공한 무관으로서의 자긍심을 기념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된 것으로 파 악된다. 이창운은 영조와 정조의 재위 연간 동안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정조에 의해 총융사로 임명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이창운 초상〉은 18세기 중반의 전통적 화법과 후반의 사실적 화풍이 교차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공신(功臣)과 유장(儒將)의 자의식 을 투영하고자 했던 한 무관의 비망(備望)적 동기가 결합된 수작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6,900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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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3년(1803)에 제작된 〈순조문묘친행작헌례계병(純 祖文廟親行酌獻禮稧屛)〉(〈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을 중심으로 19세기 조선(朝鮮, 1392~ 1897) 궁중 계병(稧屛)에 나타난 고사인물화의 주제 선택과 도상 수용 방식, 그리고 그 정치적 함의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연구이다. 이 병풍은 순조가 즉위 후 처음으로 거행한 문묘 친행과 작 헌례(酌獻禮)를 기념하기 위해 승정원 관원들이 제작한 계병으로, 병풍의 주제로 전설적인 중국 송대(宋代, 960~1279) 문인 아회를 그린 〈서원아집도〉가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원아집도는 북송(北宋, 960~1127)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의 문인 교유를 이상화한 도상으로 송대 문인 네트워크와 문화적 기억이 중층적으로 축적된 이미지이다. 중국에서는 이공 린(李公麟, 1049~1106)의 백묘(白描) 전통과 조백구(趙伯駒, 약 1120~1182) ․ 구영(仇英, 1494~1552)으로 이어지는 공필 채색 전통이 병존하며 도상의 계보를 형성하였고, 조선에는 17 세기 후반 이후 중국본의 유입을 통해 문인 사회에 수용되었다. 특히 18세기 김홍도(金弘道, 1745~약 1806)의 〈서원아집도〉는 백묘 중심의 문인적 이상을 강조하며 조선적 변용의 한 전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803년의 〈순조문묘친행작헌례계병〉에 채택된 서원아집도는 사적인 문인 풍류의 표상을 넘어, 국가 의례를 기념하는 궁중 회화로 재맥락화되었다. 본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 여 해당 병풍이 19세기 궁중 화풍의 조형 규범 — 공필 진채, 청록산수, 위계적 구도, 장식적 기물과 건축 표현 — 을 통해 서원아집의 서사를 궁중적 표상으로 전환한 과정을 분석하였다. 특히 왕선 (王詵, 1036~1093)을 화면의 중심에 배치한 구도적 재편은 문인 간의 평등한 교유라는 기존 서원 아집도의 의미를 해체하고, 권위가 조직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핵심적 장치로 작동한다. 아울러 본 연구는 병풍에 수록된 좌목 분석을 통해 제작 주체의 성격을 규명하고, 이를 1803년 의 정치 상황과 연관지어 해석하였다. 좌목에 등장하는 승정원 핵심 관료 다수가 노론 벽파에 속 한다는 점은 이 계병이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 수렴청정 말기 순조의 친정 이행 국면 에서 왕권의 공적 등장을 연출함과 동시에 특정 정치 집단의 결속과 정당성을 시각화한 결과물임 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서원아집도가 이미 17~18세기 노론 문인 사회에서 송대 원우당인(元祐 黨人)의 시련과 복권의 서사로 해석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도상의 선택은 정치적 기억을 환기하는 상징적 장치로서 의도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순조문묘친행작헌례계 병〉은 중국 고사 도상의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문인적 이상을 궁중 제도 미술의 언어로 재구성하 고, 국가 의례와 정치적 서사를 매개하는 19세기 고사인물화 계병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7,800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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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자문(卍字紋)은 십자(十字)형을 기본으로 하여 네 방향으로 획이 전개되는 문양이다. 단독 형태의 ‘卍’을 사방으로 연속 ․ 반복한 문양을 본고에서는 ‘연속형 만자문’이라 정의한다. 본 연구는 조선(朝鮮, 1392~1910) 후기 청화백자에 나타난 연속형 만자문의 특징과 성격을 고찰하였다. 고려(高麗, 918~1392)에서는 단독형 만자문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를 변형 ․ 확장한 연속형 만자문이 새롭게 등장한다. 변화의 배경에는 중국산 직물의 유입과 이를 확산시킨 능화판이라는 매체가 있었으며, 공예 장식 전반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문양의 확산은 조선 후기 청화백자 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분원에서 제작된 고급 기종의 청화백자에 주문양으로 시문되었 다. 청화백자에 나타난 연속형 만자문은 철저한 설계에 기초해 구현되었으며, 문양의 정형성은 화원의 영향 및 화본의 제작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처럼 연속형 만자문이 직물에서 능화판과 화본 을 매개로 확산되어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밝힘으로써, 연속형 만자문을 문자적 상징이 아닌 패턴화된 문양으로 재해석하고,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문양 양상을 새롭게 고찰했다 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6,700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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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 전통사회에서 주사(朱砂)가 광물 자원에서 안료로 나아가 ‘제련 ․ 가공’ 가능한 기술적 대상으로 연속 전환되는 과정을 장기 시계열 속에서 고찰한다. 연구의 문제의식은 ‘물질이 어떻게 색채 문화를 생성하는가’에 있으며, 주사가 특정 시대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동원되며 의미 화되었는지를 장례 ․ 예제 및 궁정 공간과 건축 채색 ․ 연단(煉丹) 실천 ․ 문인 서화라는 네 실천 영역을 축으로 추적한다. 다만 본고가 다루는 대상은 문헌 기록 ․ 제작 및 조제 기술서 ․ 고고학적 출토 자료 및 과학 분석 등에서 주사와의 관련성이 확인되거나 지시되는 경우로 한정된다. 이를 위해 ‘붉다 ․ 적색 ․ 주홍 ․ 단(丹)’과 같은 표현을 색감 ․ 색명(語義) 층위, 주사 ․ 은주(銀朱) ․ 황단(黃 丹) ․ 석간주(石間朱) ․ 주토(朱土) 등은 재료(물질) 층위로 구분하고, 자료의 성격에 따라 재료 특정의 강도를 달리하는 증거 등급(1: 성분 분석 및 잔류물, 2: 제작 ․ 조제 기록, 3: 색명 ․ 수사)을 적용한다. 분석 결과는 주사의 상징성은 ‘적색’이라는 시각 효과에 의해 단선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각 실천에서의 재료 선택 ․ 수비(水飛) ․ 유통 ․ 소유 ․ 규범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장례 활동에서는 토층과 유해를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행위가 주사를 보호 및 재생의 매개로 사용하는 한편, 예제와 궁정 공간에서는 적색 도장 ․ 채색이 권력과 질서의 시각적 장치로 제도화되었다. 또한 연단 실천에서는 주사가 ‘단’ 담론 속에서 기술적 ․ 비의적 대상화의 중심 자원으로 재배치되었고, 문인 서화에서는 주죽(朱竹)과 결합한 문인적 심미로 확장되었다. 이번 연구는 이러한 변동 을 통해 주사가 ‘물질-기술-제도-표상’을 가로지르는 결절점으로 작동했음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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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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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examines, across a long durée(from prehistory to the Ming period), the continuous transformation of cinnabar(朱砂) in traditional Chinese society from a mineral resource into a pigment and further into a technical object that could be “refined and processed.” The guiding question is how material substances generate color cultures. To this end, it traces how cinnabar was understood, mobilized, and endowed with meaning in particular historical contexts by focusing on five spheres of practice: funerary rites, ritual institutions and state norms, court space and architectural polychromy, alchemical(煉丹) practice, and literati calligraphy and painting. The scope of this study is limited to cases in which the connection to cinnabar is confirmed or strongly indicated by textual records, technical manuals on manufacture and preparation, archaeological finds, and scientific analyses. Methodologically, terms such as “red,” “scarlet,” “vermilion,” and “dan (丹)” are treated at the level of hue and color naming(semantics), whereas materials such as cinnabar, artificial vermilion(銀朱), red lead(黃丹), shijianzhu(石間朱), and red earth(朱土) are treated at the level of substance.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evidence, the study applies a graded scale for material identification: (1) compositional analysis and residues, (2) records of manufacture and preparation, and (3) color terms and rhetorical description. The analysis shows that cinnabar’s symbolism was not determined in a linear way by the visual effect of “red.” Rather, it was continually reconstructed through processes of material selection, refinement and grading(including water levigation), circulation, ownership, and normative regulation within each sphere of practice. In funerary contexts, repeated treatments of soil layers and human remains positioned cinnabar as a medium of protection and regeneration, while in ritual institutions and court space, red coatings and polychromy were institutionalized as visual devices of power and order. In alchemical practice, cinnabar was repositioned as a central resource within discourses of “dan (丹),” becoming a focal object of both technical manipulation and esoteric theorization. In literati calligraphy and painting, its symbolic layers further expanded through the valorization of “orthodox colors”(正色), notions of proper and pure vermilion (正朱, 純朱), and their linkage with seal(印章) culture. Through these shifts, this study argues that cinnabar functioned as a nodal point traversing “material– technology–institution–repres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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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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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918~1392) 청자전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698~926)의 연유 전(鉛釉塼) 전통을 계승한 사찰의 실내 건축재 중 하나이다. 불상이 봉안된 불단 주변에 청자전을 설치함으로써 금당 건축에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한 불단 장엄이다. 연화절지문(蓮花折枝紋), 연 지수금문(蓮池水禽紋), 수파어문(水波魚紋) 등 청자전의 문양은 경전에서 묘사한 극락세계의 정경이 충실히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자전 제작은 고려 12세기에 처음 시도되었으나, 본격적인 제작과 완성은 13세기에 이뤄졌 으며, 주요 생산지는 전남 강진의 청자 요장이다. 12세기에는 강진 용운리 요지에서 문양이 없는 소형 청자전을 생산했고, 이후 음각과 상감 문양의 대형 청자전은 주로 강진 사당리 요지에서 생 산되었다. 13세기 전반 진도 금사사(金沙寺)와 강진 월남사(月南寺)에서 사용한 청자전은 강진 사당리 요장에서 생산한 것인데, 제작 의뢰는 당시 승려 신분으로 두 사찰을 거쳐 간 최항(崔沆, ?~1257) 과 관련이 있다. 또한 강릉 무일동사지(無一洞寺址), 정읍 고부읍성(古阜邑城) 부근, 칠곡 선봉 사지(僊鳳寺址) 출토 청자전은 모두 인근에 청자 요장이 확인되고 있어서 근거리 유통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는 달리 상감연지수금문(象嵌蓮池水禽紋)이나 상감수파어문(象嵌水波魚紋) 청자전은 13세기 후반 개성 고려궁성이나 강화 궁성 인근에 위치하면서 왕실과도 밀접히 관계를 맺고 있었던 주요 사찰에서 강진 요장에 제작 주문한 원거리 유통품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청자전이 13세기에 주로 사찰에서 소비된 배경은 12세기 후반 무인정권과 13세기 원 간섭기로 이어지는 국내외 정세 변화와 왕권 약화를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극복하려 했던 사회 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7,800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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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절강성 일대 가마에서 제작된 용천요(龍泉窯) 청자는 원대(元代, 1271~1368)에 이어 명대(明代, 1368~1644)에도 무역 자기로 기능하였다. 본 논문은 15세기 조선(朝鮮, 1392~ 1910)에 유입된 용천요 청자의 유형과 성격을 출토 자료와 문헌 기록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조선의 다자외교적 관점에서 조망하였다. 15세기 조선에 유입된 용천요 청자는 수도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유통되었으며, 그 출토품은 용천대요 풍동암요지와 동구요지의 민요(民窯) 제품과 비교된다. 또한 일본 하카타 유적군과 류 큐국(琉球國, 1429~1879)이 위치했던 오키나와 지역 유적 출토품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용천요 청자를 유입한 삼국(명 · 일본 · 류큐) 사신의 기록 이 확인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입수 및 유통 경로를 거쳐 용천요 청자를 조선에 전달하였다. 명 사신은 주자(酒注), 고족배(鍾) 등 주기를 조선에 전달하였으며, 일본 사신은 규슈와 쓰시마의 지방 세력에 의해 파견된 사례가 두드러진다. 문헌 기록과 미즈사키(水崎) 유적, 와이후 도이노소토(隈府土井ノ外) 유적 출토품의 비교 결과, 일본 사신이 조선에 유입한 자기의 질은 사신 파견 주체의 세력 규모와 내조 목적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류큐국 사신은 국왕사 외에도 15세기 전반에는 아지(按司) 집단의 사신, 후반에는 일본 상인 집단으로부터 파견된 위사 (僞使)의 존재가 확인되며 각각 대형 기물과 일본 내 무역도자의 유입을 보여준다. 종합하면, 문헌 기록에 따르면 용천요 청자는 일본과 류큐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공무역을 통 해 전달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양도성에서는 이들과 시전 상인, 역관, 향화왜인 등의 사무역 · 밀무 역을 통해 유통되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문헌과 출토품의 비교 분석을 통해 삼국 사신의 용천요 청자 전래를 기반으로 국제도시 한양에서 전개된 15세기 동아시아 무역도자의 유통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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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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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