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mpire’s Preservation Policy of Dokdo and Japanese Aggression against it
울릉도는 개항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불법 입도하여 거주하기 시작하고 일본 정부도 이를 방조하므로, 대한제국은 일본인 철환을 위해 두 차례나 국제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실행하고 일본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특히 1900년 6월 내부 조사관 우용정(禹用鼎), 부산 해관 세무사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와 일본인 관리 주 부산 일본영사관 부영사 아카츠카(赤塚正助) 등으로 구성된 제2차 “국제조사단”을 울릉도 현장에 파견하여 현지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후에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종래 강원도 울진현에 속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이번에는 독립시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울도군”으로, 격상시키고, 울도군의 관할지역을 울릉도와 죽도(죽서도)와 석도(石島, 獨島)로 법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관제 개정 사실을 중앙정부의 관보 1900년 10월 27일 자에 국제고시하였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국제고시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石島, 獨島)의 대한제국 영유가 서양국제법으로도 다시 한번 더 세계에 공포된 것이다. 물론 이 때에 일본측은 어떠한 반대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없었다. 이 때 독도를 종래의 명칭 ‘우산도’로 호칭하지 않고 “石島(독도, 獨島)”로 표기한 것은 공도정책이 폐지되어 1883년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온 울릉도민들이 사투리로 돌(Rock, Stone)을 “독”이라고 발음하여 독도를 돌섬(Rock islet)이라는 뜻의 지방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돌섬”은 뜻을 취하면 “石島”가 되고 음을 취하면 한자로 “獨島”로 표기되고 있었는데, 뜻을 취해 “石島”로 표기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때 국제법에 밝았던 조사단의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는 독도의 “Liancourt Rocks”라는 서양 호칭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도 “리앙쿠르 石島”가 되므로 겸하여 石島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 발행한 『일·지·한 항로이정일람도(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우산도”를 “리앙꼬르드石”이라고 표기하였다. 대한제국의 石島표기는 리앙쿠르 石島(Liancourt Rocks)가 바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국제법을 빌려다 거듭 밝힌 것이었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독도에 일본해군의 망루를 설치하려고 계획하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가 주장한 것은 독도가 임자없는 無主地라고 주장해 전제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有主地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한 일본 정부의 독도영토편입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독도는 한국 고유영토로서 1905년 1월 이전에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에, 1905년 독도를 일부러 “무주지”로 억지 전제한 일본의 독도침탈은 처음부터 완전히 “무효”이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본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 침탈 사실을 중앙 『관보』에 고시하지도 못하였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은 국제법상 불법의 도탈(盜奪)을 시도한 것이고 완전히 무효인 것이다. 한국은 1910년에는 일제의 강점으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의 패망 후에야 한반도와 함께 회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in spite of the fact that Ullŭngdo was not an open port, Japanese people settled there, violating established laws. The Japanese government did not stop them but instead abetted them. Therefore, in June 1900 the Korean Empire dispatched a group of international investigation, comprised of inspector U Yongjŏng of the Korean Ministry of Home Affairs, a French man, E. Laporte, who worked at the Pusan Customs as a tax accountant, and Akatsuka Shosuke, Vice Consul of the Japanese Consulate in Pusan,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After receiving the report by the inspectors, the Korean Empire issued Imperial Edict No. 41 on October 25, 1900, revising the local government’s control and making Ullŭngdo and Dokdo, which were part of Uljin County of Kangwŏn Province, administratively independent. Consequently, Ullŭngdo and the surrounding islands fell under the jurisdiction of Uldo County, including Ullŭngdo and Chukdo (Chuksŏdo) and Sŏkdo (Dokdo, Rock Islet) by law. On October 27, 1900 this revised local government system was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announced via Kwanbo, the official newsletter of the Korean government. It was declared again to the world that Ullŭngdo and Dokdo(Rock Islet) belonged to the Korean Empire according to western international laws. At the time, Japan raised no objections.
At the time, Dokdo was not called by its original name Usando but was called Sŏkdo. The reason was that Ullŭngdo citizens called stones(rocks) “dok” in their dialect. As the educated people used the Chinese writing system, the word “dok” which was used by the common people was replaced by the corresponding Chinese character “sŏk.” Therefore, Dokdo became Sŏkdo, meaning the “Stone(Rock) Island(Islet).”
Furthermore, one of the international inspectors, E. Laporte who was well versed in international law knew that in the West, Dokdo was called “Liancourt Rocks.” It was also written as “Liancourt Sŏkdo” which explains why it was written as “Rock Islet(Stone Island).”
Therefore, on the Imperial Edict No. 41, the name was taken from the meaning of the island and was written as Sŏkdo(Rock islet) including the western name of Liancourt Rocks.
In 1904 Japan started the Russo-Japanese War, and was planning to install Japanese navy watchtowers on Dokdo. on January 28, 1905 at the Japanese Cabinet meeting, Dokdo was incorporated into Japanese territory and it was named Takeshima by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secretly.
The Japanese government argued that, “There is no vestige of ownership of the island (Dokdo) by any other country,” which was the basis for claiming Dokdo to be terra nullius. When it was proved that Dokdo was not terra nullius in January 1905, but was owned by Korea, the Japanese Cabinet’s decision to incorporate the island as its territory should have been annulled according to international law.
Since Dokdo was Korean territory, not terra nullius, Japan’s claim and subsequent surreptitious appropriation of Dokdo in 1905 was a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 and was therefore invalid. At the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knew Dokdo was Korean territory and that was why they could not publicize it in the official gazette Kanpo.
Korea was colonized by Japan in 1910, and the territorial controversy regarding Dokdo became a problem that needed to be dealt with after Japan surrendered and Korea regained its indepen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