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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應奎의 의병활동과 사상적 특성 KCI 등재

No-eunggyu(盧應奎)'s Raising the Loyal Armies and the Characteristics of His Ideology

노응규의 의병활동과 사상적 특성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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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진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盧應奎라는 인물에 대 한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노응규는 명망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와 노응규의 조상 은 가세가 몰락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의 부친인 盧以善이 安義로 거주지를 옮겼던 것도 생계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런 경제적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노응규는 학문에 전념하여 崔益鉉, 宋秉璿 등 당시 위정척 사 운동을 주도하던 노론계 유명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많은 노론계 인 물과 교유하게 된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노응규는 1896년 1월 초에 진주 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와 인근 고을의 여러 세력들의 호응에 따라 한때 노 응규는 鄭漢鎔과 함께 경남 서부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 은 의령에서 관군과 전투하여 물리치고 부산을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 러나 3월 초 진주성은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후 노응규는 오랫동안 여기저기로 피해 다니다가 1897년 10월 초 왕으로 부터 그의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여러 관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부형 살 해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이후 노응규는 귀향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조정 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11월 중순에 그는 충청도 黃澗으로 들어가 세력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이 순검에 체포되면서 이 일은 무산되었 고,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병사하였다. 노응규의 의병활동은 19세기 말 당시 지방 유림 사이에 퍼져 있던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 에 옮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는 당시 노론계의 사상과 노응규 집안 의 가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학문 수행과정에서의 집안의 경 제적 어려움이 그의 사상과 현실대응에 더 치열한 면모를 보이게 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

This paper looked over No-eunggyu who led the loyal armies in Jinju(晉州) in the last 19th century as a whole. He was of honorable extraction. But in the late ages his forefather's family circumstances were wrecked and they moved their residence here and there. It might be because of the problems the livehood that No-iseon(盧以善) who was No-eunggyu's father moved his residence to Aneu(安義). In spite of this economical difficulties No-eunggyu was devoted entirely to learning and apprenticed to the famous men who led Noron school and the movement of Wijungchuksa(衛正斥邪) such as Chwe-ikhyeon(崔益鉉) and Song-byeongseon(宋秉璿) and kept company with the men who belonged to Noron school. As Minbi(閔妃, Korean queen) was murdered and the ordinance prohibiting topknots was proclaimed, No-eunggyu raised the loyal armies in Jinju early in January 1896. As the many groups in Jinju and the nearby districts aligned themselves with No-eunggyu, he quite some time exercised his influences over the western area of Gyeongnam(慶南) in cooperation with Jeong-hanyong(鄭漢鎔). After they engaged and repelled the official troops, they also tried to attack Pusan. But Jinju castle was depressed by the official troops early in March. After he dodged about for a long time, his action was justified by the king early in October 1897. Besides he could take revenge upon the men who murdered his father and elder brother thanks to some government officials and friends. Then he returned to his native place and lived there and was appointed to several government posts by the government too. In mid-October, after the Eulsa(乙巳) Treaty was concluded, he went to Hwanggan(黃澗) in Chungcheongdo and tried again to raise the loyal armies there. But the important participants were arrested by the policemen and the aim was upset. He was transfered to the prison in Seoul and was given a hearing to die of illness. No-eunggyu‘s raising the loyal armies was based on the ideology of Wijungchuksa scattered among the Confucianists in the country in the last 19th century. He had the stance for trying to translate his ideology into action if it was thought to be right. It might be affected by the ideology of Noron school and his family traditions. The difficulties of his household in devoting himself to learning might make his ideology and his coping with the realities of life more violent too.

목차
Ⅰ. 머리말
Ⅱ. 노응규의 가계와 학문적 연원
Ⅲ. 노응규의 의병활동
Ⅳ. 노응규의 사상과 현실대응
Ⅴ. 맺음말
저자
  • 김준형(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남명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Kim, Junh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