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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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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4권 (2007년 12월) 11

1.
2007.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논문은 남명 조식이 정주학을 수용한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관련 자료의 제시를 통해 ‘고증’에 초점을 두었으며, 󰡔학기유편󰡕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조식의 저술에서 朱子보다 二程이 중시되었던 점에 착안하였고, 남명학에서 ‘실천’이란 두 글자가 학문적 특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단어임에 주 목하였다. 실천을 중시하였던 남명학의 특성상 주자보다 이정이 중시되었을 것 이고, 특히 明道가 중시되었음은 조식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식이 공자와 周濂溪・程明道・주자 이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 리고 때때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결국 退溪 李滉이 伊 川과 주자를 잘 배운 학자라면 조식은 이정, 특히 명도의 사상을 잘 체득한 학 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에 내포된 莊子的 요소, 陽明學的 요소 등 정주학 이 외의 여러 요소는 명도의 사상을 매개로 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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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仁弘의 晦退辨斥은 광해군 초에 실현된 五賢從祀에 대응한 것이었다. 오현 종사는 선조초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등 四賢에 대한 종사 요청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 이언적은 乙巳士禍 때의 행적으로 인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李滉의 평가에 힘입어 종사 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이황을 포함한 오현종사는 東方의 道統을 설정하 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 사현종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 이들의 행적을 수집 정리한 󰡔國朝儒先N󰡕을 편찬함으로써 이들이 담지한 도통의 구도를 일정하게 인정하 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 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오현종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 론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 公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오현종사를 실행하였다. 정인홍은 이에 대응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의 회퇴변척은 程朱學이 설정하고 있던 道統論을 조선에 적용시키는 논 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변척 과정에서 朱子와 관련된 사례를 적 극적으로 원용하였다. 주자가 孟子와 顔子를 변론한 것과 陳建이 주자를 변론 한 것은 결국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통의 학문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를 동방 도통에 적용하면서 학술적 성과보다 도학의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오현종사 논의에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편 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언적의 경우 정치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황의 인정에 힘입어 종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학술과 행적 모두에서 이황에게 集大成의 의 의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홍은 이러한 구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도학 의 실천적 측면에서 도통의 일원적 설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경학적 측면에서 보면 󰡔中庸󰡕의 요체를 時中으로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顔子의 은거를 時中의 道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 연장에서 曹植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식을 조광조와 정여창에 대한 평가와 연결함으로써 出處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통해 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언적과 이황은 時中의 道에 어긋 난 사례이며, 따라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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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琢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이황에게서 心學의 요체를 배워 스승을 중심으로 심화되고 있던 조선 유학의 心學化 현상 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였다. 조식으로부터는 壁立千仞의 기상을 배워 불굴의 절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정신 세계의 원천은 유학의 경전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학󰡕, 󰡔대학󰡕, 󰡔중용󰡕을 가장 중시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경-중용-절의의 세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 중용과 절의를 최 선의 가치로 본 유가의 철학에 세계와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성찰을 더하면서, 수양에 의한 인격화 및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는 도정에 나타난 것이 정탁의 학 문이다. 그의 시대의 사림파들은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利害의 세계를 허용하는 대신 의리론에 입각하여 이해의 세계를 재해석하고, 이해 타산이 아닌 순수한 도덕 감정에 의해, 私心없는 도덕성에 의해 영위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것 은 일상의 세계를 이상적 도덕 관념과 실천으로 엄밀하게 통제하여 감을 뜻한 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心性論과 理氣論을 검토하고 그로부터 추출된 진리 를 修養論에 의하여 體化하고자 한 것이 이 시대 학자들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의 영향 하에서 도덕적 관념을 일상화하고,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신 성화하는 정탁의 생각은 도덕적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좁은 시각이다. 정주학적 세계관과 윤리관의 착근과 순수성에의 몰입은 이념의 경색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전기 관학파가 의리와 함께 실리 를 함께 중시하다가 이해의 함정에 빠졌다면, 사림파는 도의의 순정성을 중시 함으로써 일상에 대한 탄력적 대응 능력을 상실하였다. 정탁은 정주학이 이 두 모습을 모두 드러내던 시기에 활동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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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저명한 학자이 다. 김우옹의 학문은 스승인 조식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 을 찾아보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자의 영향권 아래 있다. 주자와 김우옹의 정치론과 학문론을 비교해 본 결과, 이 두 학자의 영향 관계 는 매우 직접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정치론을 살펴보면, 군주론에서는 군 주의 정치적 역량보다 군주의 마음을 가장 중시하였고, 신권론에서는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서 신하의 권한을 옹호하고 있으며, 붕당론에서는 군자와 소인 을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외세론에서는 시종일관 외세배격의 논리를 지녔다. 그리고 학문론에서는 주자학의 공통된 이념인 ‘性卽理’를 공유하였고, 敬과 실천을 매우 중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격적 면에서도 매우 유사한 면모 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명학을 두고 주자학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우옹의 삶 과 사상을 살펴본 결과 김우옹을 위시한 남명학파는 철저히 주자학의 기반위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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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寒岡 鄭逑(1543~1620)의 학문경향과 정주학의 수용양상을 조명해 본 것이다. 한강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영남사림의 대 표적 인물이다. 그는 타고난 자질과 家學으로 내려오는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바탕위에 당대의 큰 스승을 찾아뵙고 그들의 학문적 장처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를테면, 한훤당 김굉필의 正學과 남명 조식의 正論과 퇴계 이황의 진실한 도 [的旨]를 받아들여 이후 당대의 독특한 학문경향을 형성하였다. 그의 학문경향은 下學重視의 경향과 博學의 추구이다. 하학중시의 경향은 일 상생활의 기본예절을 실천하는 하학공부를 통해 天理인 上達로 나아가는 학문 차서를 강조하는 학문관점이고, 박학의 추구는 학문의 규모와 범위가 宏博하다 는 것인데, 그만큼 현실의 쓰임에 대비하는 실용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나아가 이 같은 학문경향은 당대의 학문풍조에 대한 경종과 반성적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한강은 20세 전반에 자신의 학문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 것은 과거의 길을 단념하고 求道의 자세로 정주가 남긴 성리학에 종사하는 것 이었다. 그가 남긴 정주학과 관련한 편찬저술의 특징을 살펴보면, 성리이론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심성함양이나 내면의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다른 하나는 편찬저술이 자기 학설을 내세우는 저서의 형태라기보다는 경전 중 에 학문의 요점을 발췌, 요약하고 간간히 자신의 설을 붙이는 ‘編N’이나 ‘集N’ 의 저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정자와 주자, 퇴계의 편찬저술 방식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한강의 수양론은 퇴계와 남명의 수양론의 장점을 취하여 ‘敬’과 ‘義’를 다 같이 중시하는 ‘敬義夾持’의 수양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정이천과 주자, 그리고 퇴계로 내려오는 수양론의 학문적 전통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점이 한강 수양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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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남명 사상의 특징은 이론이 아니라 實踐學이라고 한다. 이론 탐구 를 중시할 때, 남명의 학문추구 경향은 性과 天道 즉 형이상학에 치중하게 되고, 실천궁행을 중시할 때 그의 학문적 경향은 心과 實理, 즉 日用事物과 不可分, 不可離의 관계인 道와 下學上達의 공부에 치중하게 된다. 남명에게는 이론의 정합성보다는 수양 과정에서의 실효가 문제다. 그래서 문장에 대한 상세한 해 석에 구애받지 않고, 그 의미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이 수양에 직접 영향을 미 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남명은 성리학 문헌을 주체적으로 취사선택했으며, 그 취사선택의 흔적이 󰡔학기유편󰡕에 기록된 여러 항목이다. 이와 같이 남명을 성리학자로 규정하든 혹은 양명학적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든, 남명이 실천궁행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남명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근거로 할 때, 당시의 학문 경향은 이론에 치중했다. 그래서 실천 궁행을 중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매우 단편적이다. 남명이 실천궁행을 강조한 까닭은 工‘와 本體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는 天道와 人道[誠]을 하나로 보는 공자, 맹자, 󰡔중용󰡕, 󰡔易傳󰡕 사상에 부합할 뿐 아니라, 정명도 사상과도 유사하다. 물론 󰡔학기유편󰡕의 900여 항목 가운데, 주자의 말이 가장 많기 때문에 주자 성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정명도 의 말 또한 약 100항목으로 적지 않다. 그렇다고 남명이 정명도의 一本 사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남명이 실천궁행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남명은 6개 圖를 통해 볼 때, 心과 性과 天이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心과 性과 天이 하나일 때, 실천궁행 즉 工‘가 本體임이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남명 一 本論의 핵심이고, 실천궁행을 중시한 이론적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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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 曺植의 晩年 講學地인 山天齋에는 3점의 벽화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벽화는 여타 선유들의 강학 공간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퍽 이채로운 유물이 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벽화의 所從來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언급한 글을 접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평소 남명의 풍도에 감화를 받아 선생이 남긴 글 들과 참고 자료를 읽고 선생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장소를 답사하는 가운데 우 연히 그 벽화의 소종래에 대한 심증을 얻게 되었다. 仁祖反正과 함께 찾아온 北人의 몰락으로 그들의 地域的, 師承的 근거가 되었 던 江右 지역은 200년 가까이 출사길이 막혔고 그로 인해 학문이 침체되어 있 었다. 그러던 것이 1796년에 내려진 正祖의 賜祭文을 기점으로 하여 이 지역에 학문이 불이 일듯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의욕적으로 다시 일어난 남명에 대한 文廟從祀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賜祭文碑 건립과 함께 山天齋의 재건 이 이루어졌다. 산천재 벽화는 1818년 산천재의 중수 때 강우 유림들이 四聖賢遺像을 환봉 한 것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은 商山四 皓, 巢父・許由, 伊尹이고 그 소종래는 바로 정조의 사제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조의 사제문에는 정조의 깊이 있는 남명관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것이 江右 유림에게 있어 당시의 현실에서 남명을 선양하기에 시의적절한 계기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천재 벽화의 연원은 결국 남명의 사상에 맥이 닿 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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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의 텍스트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고 찰하였다.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은 내암 관련 구비전설의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는 유형이다. 본 연구에서는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으로 분류 한 텍스트가 남명전설이 아닌 내암의 인물전설로서 존재하는 양상과 그 의미를 밝히고, 내암전설의 유형적 성립 조건 및 방식을 규명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사 에서 남명전설의 일부로 분류해 왔던 내암전설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째, 내암전설의 존재양상을 검토하고 그 하위유형을 분류하였다. 이를 통해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이 내암전 설의 하위유형의 하나로 존재하는 양상을 고찰하였다. 둘째, ‘내암의 상사구렁 이 퇴치 유형’의 서사 구조적 특징과 텍스트의 분화 및 성립 방식을 고찰하였다.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이 남명의 인물전설이 아니라 내암의 인물전설 로 존재하는 양상을 서사 구조적인 측면에서 입증하였다. 한편 ‘내암의 상사구 렁이 퇴치 유형’이 남명 중심적인 서술시각으로부터 분립하여 내암 중심적인 서술시각을 성립시키는 분화의 단계를 미시적으로 고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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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소눌 노상직의 학문이 영남유학의 전통 속에서 어떠한 측면을 계승하 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노상직은 이황과 조식을 함께 높이면서도, 정구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더욱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 자 正脈이 이황에게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구와 허목 등을 통해 허전에게까지 그 맥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는 근기 남인의 학문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스 스로가 허전의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로 학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상직에게 있어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고, 여타 영남 좌우도의 선비들을 폭넓게 교유하면서 사상사적 진폭 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노상직의 학문은 ‘수양론에 바탕한 실용학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당을 건 립하고 수양론에 입각하여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저술과 출판사업을 벌였던 것은 이 같은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특히 근기 남인의 실 학연원을 튼실히 하면서 자암서당을 중심으로 학도들을 기르며 이들에게서 미 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점, 다양한 저술과 출판을 통해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점은 모두 위기적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키우기 위한 것 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그의 실용학풍은 결국 구국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고 하겠다. 소눌학은 무엇보다 江岸學的 特性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협의적 개념으로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의 유학사상을 의미하는 강안학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으나 정구의 한강학이 담지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경향은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강안학은 강좌지역의 퇴계학과 강우지역의 남명학을 넘나들며 새로 운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 선두에 한강학이 있고 그 마지 막에 소눌학이 있었다. 따라서 강안학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 면서 또한 이를 당대의 환경 속에서 응용하려는 학문의 실용성을 충실히 담보 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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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진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盧應奎라는 인물에 대 한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노응규는 명망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와 노응규의 조상 은 가세가 몰락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의 부친인 盧以善이 安義로 거주지를 옮겼던 것도 생계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런 경제적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노응규는 학문에 전념하여 崔益鉉, 宋秉璿 등 당시 위정척 사 운동을 주도하던 노론계 유명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많은 노론계 인 물과 교유하게 된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노응규는 1896년 1월 초에 진주 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와 인근 고을의 여러 세력들의 호응에 따라 한때 노 응규는 鄭漢鎔과 함께 경남 서부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 은 의령에서 관군과 전투하여 물리치고 부산을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 러나 3월 초 진주성은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후 노응규는 오랫동안 여기저기로 피해 다니다가 1897년 10월 초 왕으로 부터 그의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여러 관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부형 살 해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이후 노응규는 귀향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조정 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11월 중순에 그는 충청도 黃澗으로 들어가 세력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이 순검에 체포되면서 이 일은 무산되었 고,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병사하였다. 노응규의 의병활동은 19세기 말 당시 지방 유림 사이에 퍼져 있던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 에 옮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는 당시 노론계의 사상과 노응규 집안 의 가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학문 수행과정에서의 집안의 경 제적 어려움이 그의 사상과 현실대응에 더 치열한 면모를 보이게 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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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구운몽』은 이전의 전기소설이 담아내었던 비극 적 정서나 현실 비판적 성과를 제대로 계승하기는커녕 도리어 왜곡시켰다고 평 가하고 있다. 『구운몽』이 전기소설의 비극적인 모티프들을 활용하되 이를 사회 적 현실을 무시한 채 행복한 결말로 재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운몽』은 전기소설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삶과 욕망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결말의 차이만 갖고 소설의 성과나 의의를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기소설의 작가들은 허구로서의 소설이 갖는 문학적 효용성에 대한 인식보다는 소외된 지식인이 자신의 怨望을 토로하는 차원에서 소설을 창작했다. 따라서 전기소설에는 소외된 지식인이 현실에 대해 느끼거나 체감했던 불만이 내 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전화될 가 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데 『구운몽』은 양소유의 공개적인 애정편력을 통해 성적 욕망의 다양한 형태와 그에 따른 심리감정 등을 노골적이면서도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 결과 『구운몽』은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유교적 도덕관념이나 사회적 관습 및 제도 등 당시의 많은 금기들을 부정하는 효과를 창출하였다. 이러한 『구운몽』의 효과는 바로 작가 서포가 역설적인 환몽구조를 통해 양소유가 추구하는 욕망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던 소설미학적 성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인간의 통속적인 욕망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욕망과 삶이란 어떤 것이며, 인간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색한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고소설 가운데 『구운몽』만큼 철학적 또는 인식론적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소설사적으로 볼 때, 『구운몽』의 진정한 가치와 의의는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주제의식이나 철학적 문제보다는 소설미 학적 성과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작가인 서포는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이 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또 독자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치밀한 구성과 극적 상황의 연출, 일상적 생활상과 사소한 것의 포착, 성적 욕망의 생생한 재현 등을 통해 『구운몽』의 소설적 재미와 진실성을 동시에 확보하였다. 이 점만으로도 『구운몽』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구운몽』이 담아내고 있는 철학적・인식론적 문제의식의 깊이도 이러한 소설미학적 성과를 통해 독자들에게 공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