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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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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8권 (2009년 12월)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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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1846-1919)은 조선이 멸망할 즈음에 살았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며 또한 애국지사였다. 곽종석은 사서오경에 대한 경학적 견해를 다양하게 남겨놓 았는데, 특히 그의 논어학은 주목할 만하다. 곽종석 논어학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주자학파의 주석 에 대한 정밀한 검토이며, 둘째는 경문의 독자적 해석, 셋째는 ‘心卽理’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 등이다. 곽종석 논어학의 이러한 세 층위는 그의 논어학이 가지는 특징인 동시에 조선논어학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특징인 주자학파의 주석에 대한 정밀한 검토는 조선주자학파 논어학의 보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문에 대한 독자적 이해와 심즉리 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퇴계학파의 경학적 전통안에서 충분하게 논의될 수 있는 지점이다. 퇴계는 주자 경학의 충실한 계승자였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경문을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곽종석의 스승인 이진상은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논어』 해석에서 이를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곽종석의 독자적 경 문해석과 심즉리설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모두 그가 스승으로 삼은 퇴계와 이진상의 󰡔논어󰡕 해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곽종석의 논 어학을 조선주자학파, 더 좁게는 퇴계학파 논어학의 계승자적 지점에서 그 위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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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남 학계에는 李滉 이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心은 理氣가 합해 있다’는 설을 굳게 지키는 학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러한 학계의 경향에 정면으 로 맞서 李震相은 心卽理설을 제창하였다. 이진상의 제자인 郭鍾錫은 당시 영 남학계에서 ‘異端’으로 비판받았던 스승의 心卽理설를 잘 계승하여 변호하고 발전시켰다. 곽종석은 心學의 요체인 知와 敬에 매우 주목하였다. 그는 情(사단칠정)이 發 할 때에 知와 敬이 그 情의 발함을 主宰한다고 보았다. 知와 敬에 대한 그의 깊 은 탐구는 어려운 시대를 구제해나갈 이론을 眞知와 實踐이라는 두 측면에서 확보하려는 학문적 노력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곽종석이 明德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명덕을 心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명덕은 心과 身, 性과 行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명덕 을 心이라고만 해버리면, 󰡔大學󰡕의 八條目 중 ‘正心’에서 ‘明德’을 밝힌다는 일 이 마쳐지게 되어버려 그 뒤에 이어지는 ‘修身’은 혹처럼 붙어 있는 것이 된다 고 하였다. 그는 명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세계 각국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곽종석은 서구의 公法과 哲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서구의 공법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의 증대와 더불어, 1919년에 그의 理學은 조선의 독립과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仁義에 근거한 공법질서와 功利의 私心이 없는 서구의 철학과 그것에 토 대를 둔 서구과학을 인정하며, 하루빨리 조선의 독립과 평화가 성취되기를 바 랐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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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수제자로 寒洲學派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당시에 이단으로 배척받던 한주의 성리설을 수용하였고, 그가 한주에게 執贄의 禮로 올린 󰡔지의록󰡕은 한주 성리설의 입문서가 되어 경상우도의 신진 학자들 사이에 두루 읽혀 한주학파의 형성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우는 󰡔지의록󰡕에 대한 한주의 답변 중에서 유독 氣質之性 한 조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한주와 논변하였다. 喜怒哀樂의 감정이 일어나기 전인 未發 상태에서 기질이 있느냐 없느냐, 기질의 개념이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 제를 가지고 논변을 전개한 것이다. 면우는 관점을 달리하는 논거를 두루 제시 하며 기질지성을 희노애락 미발의 상태에서의 性의 개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 했고, 한주는 자신이 朱子의 晩年定論이라 믿는 설에만 의거하여 기질지성은 性의 개념이 아님을 강조했다. 즉 면우는 기질은 성과 함께 태어날 때부터 형성 되는 것이니, 기질에 의해 제약된 성이라 할 때 ‘기질에 의해 제약된’까지도 성 의 개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주는 성의 時分인 미발에서는 氣가 작용 하지 않고 성의 본체만 온전히 드러나므로 기질을 성의 개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면우는 실상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한주는 개념 정립을 중시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면우는 기질지성에 대한 기존 학설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한 주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고증한 주자와 퇴계의 만년정설만을 논거로 삼았다. 면우는 ‘미발 상태에서 기질이 없지는 않지만 기질을 말할 필요는 없다’ 한 한 주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면우가 기질지성에 관한 기존 학설의 개념들을 다 부정한 것은 아니다. 면우는 미발을 性의 상태로 규정, 기 질이란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 한주의 학설을 수용하면서 여러 관점에서 기질지 성의 실상과 개념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면우의 이러한 학문 성향이 그 후에 나오는 그의 학설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이 문제는 스승인 한주의 학설과 대체에서 다를 수 없는 면우의 학설 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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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곽종석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國權恢復의 방안과 성격을 검토한 것이다. 곽종석의 국권회복 방향은 조선이 당면한 국내·외의 시대적 과제를 감안한 토 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진출이 본격화한 국제 정세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는 조선의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국권이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內修를 통한 自强의 방안을 모색함과 동 시에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활용할 수 있는 외교력의 발휘를 주문했다. 이에 따 라 그는 서구사조의 적극적인 수용을 지향하는 開化의 입장에 동조하기를 거부 했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자세로 물리력을 동원해 外勢의 배척을 요구하는 衛正斥邪의 논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제국주의 국 가들의 침탈에 따른 사상적 혼돈과 국가적 위기를 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대응 하되 유학의 현실적 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방향을 모색했다. 결국 곽종석의 국권회복 방향은 국내·외의 시대적 상황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유학의 변화를 통한 內修를 토대로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활용한 외교 력을 발휘해 민족의 생존을 보장받는 기조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열강의 공관에 布告文을 보내 일본을 견제할 것을 촉구했을 뿐만 아 니라 乙巳勒約의 부당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五賊의 처단을 주장했고, 파리강화 회의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며 조선의 독립의 당위를 알리기 위해 長書를 기 초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등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儒林團 대표로서 大同團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寒洲學派 의 ‘心卽理’說을 이념적 근간으로 정립한 分合論的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는 동아시아 범주에서 벗어난 거시적 안목에서 다양한 사조를 포용적으로 수 용하는 그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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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면우 곽종석의 문학사상을 고찰한 것이다. 문학 그 자체에 대한 기본 적인 사고들을 문학사상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내용별로 본질론·창작론·비평론 으로 분류하여 검토하였다. 본질론에서 면우는 도덕을 갖춘 吉人이나 君子의 문장을 진정한 문학이라 보 았다. 이때 도덕이란 일종의 작가의 내면세계인데, 그것은 전통적 문예이론에 서 말하는 작가의 내면에 축적된 志趣·個性·才能·品格의 文氣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면우는 문학의 본질에서 문학작품이 단순히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알 게 해 줄뿐 아니라 그 시대 정치의 治亂得失과 사회의 문화나 분위기를 알게 해 주는 治世의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즉 知人論世와 移風易俗의 기 능을 담당할 수 있어야 진정한 문학이라고 본 것이다. 또 문학에서 추구해야 할 본질은 文藝性을 고도로 높이는 것이나 명망을 추구함에 있지 않고, 오직 자신 의 인생에서 實質을 추구하여 실천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면우는 文의 實이라 하였다. 문학의 본질로서의 實이란 存心과 立誠의 학문을 통하여 도덕 을 내면에 확충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부득이하여 유출된 말이 글로써 형상화 된 것이었다. 그것을 면우가 인용한 말로 표현한다면 작가의 층위에서는 修辭 立誠이고, 사회적·문화적 층위에서는 經天緯地의 文이다. 창작론에서 면우는 存養省察과 學問講究와 常行以謹과 凡事以理가 축적되어 부득이하여 말에 드러나고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는 창작의 과정이 求道의 과정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求道의 과정과도 같은 創作의 과정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에 대해서 문으로 표현하려는 대상에 대한 깊은 理解와 識見의 올바름과 實踐의 專一함을 들었다. 또 면우는 곧바로 率性의 학문을 닦아 나아가다보면 文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成文章의 경지 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작의 과정에서도 결국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내면의 도덕을 확충하는 存心의 공부이지 文辭의 枝葉을 좇는 공부가 아 니라는 것이다. 즉 求道의 과정으로 표현한 창작의 과정에서 存心의 공부는 그 핵심을 이루는 방법론으로 제시된다. 비평론에서 면우는 이반룡·왕세정이 작품의 실제에 보인 擬古的 실천이 부정 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문장을 전범으로 삼는 것 에 반대하였다. 典範을 상정함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道에 얼마나 羽 翼이 되는가에 기준을 두어 玉石을 가려서 취해야 함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左 傳󰡕과󰡔國語󰡕와 같은 先秦兩漢의 규범적 텍스트조차도 취사선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 文을 비평하는 기준으로 작가의 내면에 축적된 學問과 節槪에 두었 다. 한편 면우는 공령문의 폐해가 심지어 道를 밝히는 말이나 학식이 높은 자의 詩나 聲律에 맞지도 않는 글을 막론하여 퍼지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衰世의 文 章에 亡兆가 든 단서를 功令文에서 찾은 것이다. 면우는 文明의 한 기축을 담당 하는 문학이 허물어져간다고 인식하고, 그것을 文明守護의 차원에서 扶持하려 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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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는 작가의 입장에서나 독자의 입장에서나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 다. 한시는 작가에게 사소하고 은밀한 정서의 토로를 가장 잘 보장한다. 독자는 한시를 읽으면 작가의 삶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가 남긴 고담준론의 철학 저술을 읽는 것 못지않게 그가 남 긴 단편의 한시를 꼼꼼히 읽는 것도 중요하다. 俛宇 郭鍾錫(1846~1919)의 한시가 수록된 󰡔俛宇集󰡕의 편차는 기본적으로 編年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작품의 창작 시기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간 행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한시 작품의 수량은 1,541題 1,998首에 이른다. 16세 부터 59세까지의 작품이 전체 수량의 약90%이고, 을사늑약 이후에 해당하는 60세부터 74세까지의 작품은 175제 255수로 10%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문 집 간행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품 분포가 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은 곽종석의 한시 창작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피고, 이어 자연물을 마 주하여 느꼈던 정서를 토로한 詠物詩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한 정서를 표현한 한시를 해석해 보았다. 그는 가슴에 감응하는 정서를 자 연스럽게 토로하는 방식의 한시 창작을 긍정하면서 일생 동안 한시를 지었다. 자연을 마주하여 物我一體의 심정을 느끼기도 하고 심성 수양을 돌이켜보기도 하면서 인격을 완성해 나갔다. 이리하여 붕우 간, 사제 간, 가족 간의 인간관계를 우정과 공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유지해 나가는 인격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한시 작품을 통한 이상의 고찰은 곽종석이 <布告天下文>과 <巴里長書>를 발 송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이 된다. 민족 간 국가 간 유지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서로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상호존중이다. 집단 간의 상호존중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개 인의 인격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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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파는 그 성립 초기, 즉 남명이 생존하던 시기와 그 문인집단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인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는 우리나라 학계와 정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 형을 당하고부터 상황은 急轉直下하였다. 반정 이후 남명학파적 성격을 유지한 채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명학파는 명목과 실상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연유로 해서 17세기 중후반부터 차츰 退溪 學派化 내지는 栗谷學派化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내심 북인 세력으로 존재하던 남명학파의 일부가 1728년에 ‘戊申亂’을 일으키다 궤멸됨으로써 설상가상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 다. 이즈음에 이르게 되면 남명학파의 목숨은 거의 끊어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록 미미하다 할지라도 진주 인근에서는 河世應·河必淸·李甲龍·李志容·李佑贇 등의 인물이 꾸준히 학맥을 이어왔던 것이 분명히 포착된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정조가 남명에 대한 제문을 직접 지어 사제케 한 뒤로 경상우도 지역의 사기가 올랐음인지 19세기에 들어서면 李源祚·張福樞·李震相·朴致馥 등 을 이어 金麟燮·許愈·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 등의 저명한 학자가 대거 굴 기하게 되었다. 특히 俛宇 郭鍾錫(1846-1919)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서 우도 지역은 물 론 좌도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 명망을 한 몸에 받는 대유가 되어, 고종의 지 우를 입었으나 망국의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경술국치 이후 1919년 파리 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유림의 대표로서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는 일을 주도한 뒤 일생을 마친 인물로, 그의 저술이 너무 호한하여 근래에 이 르도록 깊은 연구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면우 곽종석의 여러 면모 가운데 남명학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하여 그 양상과 의미를 더듬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면우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남명학파적 요소가 뿌리 깊은 곳이고, 혈연 을 중심으로 살펴본 그의 가계에서도 남명학파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학연의 측면에서 보면 한주 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퇴계학파적 요소 가 두드러진다. 둘째, 면우는 남명 정신의 핵심을 그의 ‘敬義’ 사상에서 찾고, 이 사상이 우도 지역 곳곳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전승해가야 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면우는 「신명사부」를 크게 네 단락으로 구성하여 신명사의 유래, 靜的 居敬의 상태, 處事接物時에 私欲과 邪念이 일어나는 과정, 이를 廝殺하여 이른 바 ‘復其初’하는 과정 등을 신명사가 겪는 治亂의 역사로 상정하여 매우 역동적 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를 남명이 내세웠던 경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앞의 두 단락은 敬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두 단락은 義를 드러낸 것이다. 敬義를 직 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 敬義의 의미를 매우 심도 있게 드러내었다. 넷째, 면우는 南冥을 매우 尊慕하였지만 退溪와 함께 崇尙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이 희미해지면서 남인의 경 우 퇴계학파의 학문이 서서히 그 자리를 대체해 온 결과라 할 것이다. 남명의 사상 가운데 그 핵심이라 이를 ‘敬義’에 대한 계승 의지는 면우 또한 매우 투철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있는 엄정한 출처와 실 천 지향의 측면은 다소 약화되고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있었으 니, 이는 대체로 퇴계학파적 면모의 확대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학 자로서 사우의 연원은 결정적이므로 면우의 문집에 퇴계학파적 면모가 두드러 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명학파로서의 자부심과 그에 대한 지향성이 뚜렷하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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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河崙의 정치적 존재양태의 변화를 통해서 그의 삶을 구명하려고 한 것이다. 하륜은 經世와 가례에 밝았다. 太宗은 집권 전기에 하륜으로 하여금 庶 政을 관장하게 하면서 그를 ‘賓師’로서 대우하였다. 반면에 李居易와 朴誾 및 沈 溫 등은 하륜이 인사를 전횡한다고 크게 비난하였다. 심지어 閔霽는 하륜이 鄭 道傳처럼 患亂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태종대 전기 하륜의 정치적 존 재양태는 극히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하륜은 朴子安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될 위기를 겪었다. 정도전 일파는 박자안 의 입을 빌려서 하륜을 숙청하고자 했다. 이는 태종과 하륜이 생사의 동맹을 맺 게 되는 가장 극적인 미시적 사건이었다. 박자안 사건은 태종과 하륜이 ‘相與之 際’를 맺게 한 단서였다. 하륜은 태종에게 盡心全力하여 충직하기가 비견할 사 람이 없는 빈사였고, 태종은 하륜에게 유가적 지식인으로서 삶을 후원·보호해 준 주군이었다. 이로써 둘은 ‘君臣相與之際’였다. 하륜은 閔無咎 형제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李之誠의 供辭 내용, 柳沂의 의심스러운 행동 등에서 보면 의문이 든다. 특히 하륜은 민무구 형제가 自願安置되자 ‘세자 제거가 아니라 宗支 제거이니 적합한 벌’이라고 하 여 태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태종은 그것조차 하륜의 해명을 통해서 충직한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종은 黃喜에게 하륜과 오고간 내용을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하륜의 정치적 존재양태에 변화가 보인다. 하 륜은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武科 試員을 혁파할 것을 말하고, 나아가 임금이 직 접 考閱할 것과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처럼 하륜은 태종과 같이 朋黨을 크게 경계하였다. 이는 李叔蕃과 심온이 黨與를 개의치 않다가 죄 를 받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로써 태종대 중기 이후 하륜이 태종의 庶政 자문에 응하는 정치적 존재양태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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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鄭逑(寒岡, 1543-1620)가 무흘정사를 건립하게 된 이유와 과정, 무흘정사에서의 저술활동, 무흘정사의 연혁 등을 두루 고찰한 것이다. 무흘정 사에는 정구의 유품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편찬한 수 천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영남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책을 열람하고 강학활동을 하는 등 일련 의 ‘무흘 아카데미’를 형성하였다. 최근에는 무흘정사의 書目 일부가 고문서의 형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사정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지방자치단체에 서는 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이 실정이다. 본고는 여기에 일정한 문 제를 제기하면서 무흘정사를 중심으로 한 무흘의 본격적인 생활문화 연구의 단 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다. 무흘동천에 대한 정구의 관심은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는데, 그가 만년에 무흘 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避地意識에 기반한 독서양성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벗의 방문까지 정중히 사양하면서 독서를 통한 養性을 실천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 정구는 安東大都護府使 등의 관직을 맡기도 하지만 7-8년동안 이곳 에서 보내면서 다양한 분야의 저술활동을 전개한다. 성리학 분야의 󰡔염락갱장 록󰡕·󰡔수사언인록󰡕·󰡔곡산동암지󰡕, 역사전기 분야의 󰡔경현속록󰡕·󰡔와룡암지󰡕·󰡔치 란제요󰡕·󰡔고금인물지󰡕·󰡔유선속록󰡕, 지방지 분야의 󰡔복주지󰡕 등이 바로 그것이 다. 이 같은 저술활동을 통해 그는 공자의 仁思想에 근간을 둔 주자학의 연원과 그 조선적 계승을 道脈에 입각하여 명확히 하고자 했다. 무흘정사 건립에는 정구가 직접 공사감독을 할 만큼 많은 정성을 기울인다. 그 위치는 무흘구곡 가운데 와룡암과 만월담 사이에 있었으나 만월담에 더욱 밀착되어 있었다. 1604년 건립 당시에는 초가 3간으로 된 서운암을 중심으로 하여 2간의 산천암, 비설교와 자이헌 등 다양한 부속시설들이 있었다. 정구가 세상을 뜬 후 무흘정사는 위치를 달리하여 36간의 무흘정사와 3동의 장서각으 로 규모가 확대되기도 하였고,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1922년에 세운 4간 의 정사와 庖舍 약간 동이 남아 있다. 특히 1784년(갑진, 정조8)에는 후손이 중 심이 되어 무흘정사를 새로 짓고 무흘구곡 전체에 대한 정비작업을 하였다. 이 를 기념하기 위하여 「무흘구곡도」를 그리고 다양한 시를 짓기도 한다. 무흘정사는 정구가 활동할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탐방 하면서 무흘 문화를 만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구 당대에는 사승관계 를 형성하는 제자들이 이곳을 주로 찾았고, 정구가 세상을 뜬 후에는 정구를 추 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답사객이 되어 심방하였다. 무엇보다도 무흘에는 정구가 수집하고 저술한 이른바 鄭氏藏書가 장서각 서운암에 보관되어 있어 영남 선비 들의 독서와 강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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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 曺植(1501-1572)의 「神明舍圖銘」은 한 인물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다룬 것 으로, 그의 엄격한 수양론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고에서는 남명의 「신명 사도명」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학 작품 5편을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 써, 지리산권 가운데 하나인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남명학파의 마음 공 부를 이해하는 일단의 실마리로 삼았다. 대상으로는 삼은 작품은 龜巖 李楨의 「神明舍賦」, 東岡 金宇顒의 「天君傳」, 寒沙 姜大遂의 「神明舍記」, 台溪 河溍의 「神明舍記」, 俛宇 郭鍾錫의 「神明舍賦」 등이다. 이 5편의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재해석의 면모와 시대적 의미를 고찰해 볼 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그 결론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남명의 「신명도사명」을 각기 계승하되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중 요성을 저마다의 입지와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편의 작품 들은 자신의 관점과 시대적 필요에 의거해 「신명사도명」의 핵심을 파악하는 해 석의 각도가 차이를 빚게 되었다. 따라서 부각시키려 한 중심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남명학파의 계보상에서 저자들을 구분해 볼 때, 그들의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남명학파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가늠해 보게 된다. 구암과 동강의 작품은 ‘남명학의 계승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한사와 태계의 작품은 인조 반정 직후 남명학파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봉착하여 ‘학 맥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면우의 작품은 외세의 침략과 국 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유학적 마음 수양의 指南으로서 ‘남명의 심학을 천양’한 것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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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국어 문법이 관여하고 있는 한자어 영역에 대한 형태론적 접근이다. 한문 문법이 관여하고 있는 2음절 한자어와 국어 문법이 관여하고 있는 3음 절 한자어(‘1+2’ 또는 ‘2+1’의 구조)를 구별하고 3음절 한자어 가운데 왼쪽 핵 구조를 가진 예들이 국어 문법에서 보면 예외적인 것들이겠지만 국어 현실에서 이들이 상당한 생산성을 보인다는 점을 중시하여 국어 형태론의 대상에 넣고 그 해명을 시도했다. 왼쪽 핵 구조를 가진 2음절 한자어이면서 동시에 3음절 한자어 ‘脫法/抗菌’과 3음절 한자어 ‘脫+公害/抗+憂鬱(劑)’의 분석을 통해 형태⋅통사적인 ‘서술 어 근’(predicative root) ‘脫/抗’을 확립하고, 이 두 한자어 부류의 관련성을 적극 적으로 받아들여 ‘脫+公害/抗+憂鬱(劑)’가 서술 어근 ‘脫/抗’의 문법 구조를 따 르고 있다는 점에서 ‘脫+公害/抗+憂鬱(劑)’의 형성은 ‘脫法/抗菌’에 의해 저지 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했다. 3음절 왼쪽핵語의 형성은 한문 구성 방법(왼쪽 핵 구성법)의 차용의 결과이기보다 그에 앞서 핵 성분으로 서술 어근의 성립이 전 제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서술 어근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 구성법에는 述目 구성, 述補 구성 외에도 前目 구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