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강씨 집안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훈구파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관각문인으로서의 재능을 꽃피운,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문 거족이다. 이 집안의 문학적 전통은 그의 조부인 강회백(姜淮伯, 1357-1402)에 서부터 시작되었는데도, 그동안 연구된 바가 없다. 삼대에 걸친 시문집인 『진산세고』에는 93제 108수가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은 강희맹이 강회백의 문집 『통정집』에서 정선한 것으로, 강회백의 대표적인 시문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대상으로 강회백의 시문학을 고찰하였다.
『진산세고』에 실린 백여 수의 시를 살펴보면 대략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고 려와 조선에 걸쳐 관료 생활을 하는 도중 지은 시, 국가적인 행사나 임무에 참 가하여 지은 시, 개인적인 소회를 읊은 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능력 있는 관료의 자질을 지닌 문인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는 관료로서의 포부와 함께 백성과 국가에 대한 근심을 드러내기 위해 강개한 시구가 많이 쓰인다. 반면 외 교 임무를 띠거나 국가의 위상을 드러내야 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현실과는 상 관없이 공적인 임무에 맞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어를 활용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소회를 읊은 시들은 유자(儒者)로서의 깨달음에 기반한 노성한 품격을 드러낸다.
『진산세고』가 연방집(聯芳集)의 백미로 꼽히고, 강희맹으로 이어지는 관각문 인의 시초가 강회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강회백의 시문은 연구가 할 가치 가 있다고 사료된다. 또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거치는 과정에서 유자 (儒者)로 자처한 관료들의 시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보여 주는 전범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 稿)를 보면 이 집안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들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집이 편찬되 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진주강씨 공목공파가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인 문벌임이 확실하다.
공목공파(恭穆公派) 선조 가운데 문장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이 강희맹인데, 그가 1483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나자, 성종이 곧바로 그의 문집을 편찬하라 고 명하였다. 『사숙재집(私淑齋集)』을 어명으로 편찬케 한 것만 보아도 조정에 서 그의 문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의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과거시험을 통해 사대교린에 필요한 문장가를 선발하였다. 강희맹의 활동과 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많은 시를 지었고, 문화교류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중국 문인들이나 조선 문인들이 그의 조천시(朝天詩)에 많이 차운하여 문화교류의 전범을 보였다. 더군다나 대를 이어서 중국에 다녀오고 그 체험을 기록으로 많이 남긴 것은 다른 집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주 강 씨 문중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의 문벌인 공목공파 문인들의 한시가 한 시의 고향인 중국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진주강씨 문인들이 북경에 갈 때에는 선조의 조천록이나 연행록을 가지고 가서 참조했으며, 선조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선조가 길을 안내하며 함께 시를 주고받는 동반자가 된 셈이다. 강희맹은 형 강희안 덕분에 시를 짓기 전부 터 명나라 문인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사행에도 성공하여 상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농사와 원예에 관심이 깊었으므로, 중국에서 연꽃 씨와 버드나무 가지를 들여와 조선에 퍼뜨렸다. 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조천 활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진주강씨 종친회에서 선조들의 조천록과 연행록 10여종을 모두 번역하여 진주강씨 연행록집성을 출판하면 학계의 연구에 도움이 될 뿐만 아 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진주강씨 선조들의 문장과 업적이 널리 선양될 것이다.
이 논문은 인재 강희안의 회화에 대한 제화시를 통하여 인재의 회화에 대해 행해진 평가를 위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재는 조선 초기 시서화 삼절로 인정이 되었는데, 서거정이나 성간의 글 그 리고 그의 친동생이 강희안의 글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와 글씨도 지금은 그리 많이 전하지 않는데, 그림도 전하는 것이 매우 적다. 현재 알려진 것은 많아야 네 폭 정도이고, 한 집안에 전해온다는 병풍을 합쳐도 십여 폭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초기 인재와 교유하던 문 인들의 문집에 전하는 제화시에는 인재의 그림에 대한 것이 많은데, 이것을 통 해 보면 상당히 많은 그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 지만, 12폭 8폭 등 여섯 건의 병풍이 있고, 가리개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개인 이 소장하고 있는 화축 등 적어도 78폭 이상의 많은 그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은 묵죽도 등에서 보듯 묵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홍시, 자색 가지, 노란 오이 등이 등장하는 것을 통하여 채색의 그림도 있었으며, 스스로 사물을 보고 그린 그림 이외에 중국의 그림을 보고 모사한 것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을 소장하고 제시한 사람들은 당시 이름이 크게 알려진 저명한 인사들로 서거정, 아우 강희맹, 신숙주 등 사대부와 일암과 같은 승려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평한 내용은 대략 세 가지 형태로서, 첫 번째는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있고, 두 번째는 인재의 그림을 통하여 얻은 감흥을 노래한 것이 있고, 세 번째는 인재의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이 지향하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발현한 것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조선 중기 문신인 姜澂(1466∼1536)의 관료생활에 대한 연구이 다. 강징은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면서 거의 평생을 관각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관료로서 강직하고 올곧은 길을 걸었던 인물이지만 한 번도 역사 속에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228번이나 등장하는 중요 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 출사하여 중종반정으로 연 산군이 퇴위될 때까지 최 측근에서 성리학적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연산군을 보필하며 경연관으로서 연산군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관료였다. 그는 언로를 열 며 이단을 막고 경연을 펼친 현저한 공이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나약한 왕권을 흔들고 정권을 장악하려든 신진
사림파와 훈구파들의 세력다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중종은 강징을 형조참판으로 삼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징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 온갖 모 욕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그때마다 강징을 옹호했고 나라의 중대사 를 강징과 의논했다. 중종은 강징을 예조참판으로 삼고 국정을 펴 나가면서 신 진사림과 훈구파의 끈질긴 정권장악의도를 막았다. 강징은 중종을 측근에서 보 필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동시에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가하였다. 그는 특히 ‘敬’을 강조하여 성리학적 도덕정치의 이념을 실천 하며, 왕도를 펼치고 의로운 길을 열어갔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기묘 사화가 발생하며 조광조 일파의 급진적 개혁의도가 중지되었다. 강징은 두 번 이나 사신의 임무를 띠고 중국을 다녀왔으며 외교에 있어서도 공이 있었다. 특 히 명나라 세종황제의 등극에 성절사로 파견되어 서예로서 명성을 떨쳤고 황제 가 국자감을 알현하는 것을 참관하는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호음 정사룡은 그의 <신도비명>에서 그의 일대기를 약술하면서 관각 속의 군 자로서 표현했고, 청백리로 묘사했으며, 충신으로 묘사했다.
본고는 여말선초의 문단과 예술 지형을 살피기에 유의미한 인물이지만, 그동안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던 玩易齊 姜碩德(1395-1459)의 삶과 시문학을 고찰하였다.
그는 通亭公 姜淮伯(1357-1402)의 아들이자, 仁齋 姜希顏(1417-1464)과 私淑齋 姜希孟(1424-1483)의 아버지이며, 沈溫(1375-1418)의 사위로 세종과 는 동서지간이다.
완역재에 관한 기록과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사숙재가 엮은『晉 山世稿』와 관련 문헌 등을 통해 그의 삶과 시문학의 특징을 살필 수 있었다.
완역재는 당대에 뛰어난 문필과 그림을 보는 안목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 의 작품에는 修身과 學行을 통한 성찰적 삶의 지향이 반영되는 경향을 보였다. 당대에 “高古雅澹”한 풍격으로 평가 받았는데, 이는 그의 문학적 취향과 불교 적 사유, 騎牛子 李行(1351-1432)의 문하에서 한시를 교류한 경험 등에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태도와 담박한 어조로 경물을 담아내면서 여운을 주는 방식으로 정서를 응축하여, 정적인 시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탈속과 성찰의 공간이자 매체로 형상화된 자연은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적인 면모를 구성하였다.
장편의 고시로 시적 대상에 대한 비교적 적극적인 생각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도 질박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호방한 풍격은 義氣로서의 감정이 발현된 것이었다.
이러한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이 당대에 옛 시의 풍격을 얻었다고 평가 받았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俛宇 郭鍾錫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로 대 변혁의 시대를 살았다. 위태로운 나 라를 구하라고 임금이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의병 봉기에는 실효성이 없다며 동참을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임금에게 상소나 독대를 통해 끊임없이 나라의 위기 극복을 꾀하였고, 파리장서 의거를 주도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런 면우의 처신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의 판단대로 흔들림 없이 자기 갈 길을 갔다. 그의 처신이 옳았건 아니건 간에 조선말의 가장 전형적 유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경륜은 우리 근대사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면우의 진면목은 흥미롭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면우가 그렇게 온 나라의 촉망을 받는 인물이 되기까지 그 玉 成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수신과 학문 자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면우에게 수 신과 학문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저술이 유난히 많은 것에 주목했다. 면우의 저술 「晦窩三圖」·「言難」·「行難」·「爲勿說」·「染解」·「靜坐說」·「知難」·「讀書說」·「學賊」 등이 그것이다.
본고는 면우의 수신과 학문에 대한 견해가 응집되어 있는 이런 저술들을 통하 여 그의 수신관과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그의 操行과 인간상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저술을 통하여 면우는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이야 말 로 儒者의 기본 바탕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하며, 말은 오직 天命에 순응하여 人事에 달통한 사람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면우는 또 ‘利慾에 물드는 것’ 등 나쁜 것에 물드는 5가지로 자신 을 경계하고, 고요히 정좌하여 겸허한 자세로 내면의 원기를 기르며, ‘爲己의 학 문’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또, 공부를 해치는[學賊] 5가지를 들어 경계하였 고, 특히 유례가 없는 그의 독서설 4편은 3가지 독서의 형태, 5가지 독서의 요령 등 독특한 기준과 분석 기법을 적용한 논리적 체계였다.
이렇게 면우는 수기치인을 위한 爲己의 학문을 실천하는데 남다른 발상과 방 법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면우의 학문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그 자신의 말 대로 옥의 조탁과정에 비견되는 것이었고, 면우가 한 시대를 풍미한 큰 학자로서 설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선신의 『두류전지』 현전하는 유일의 지리산 지리서이다. 지리산권 문화 를 연구하기 위한 일환으로 『두류전지』를 중심에 둔 지리·불교·문학 등 다양한 분과별 연구가 기획되었는데, 이 글은 그 중 문학 분과의 연구 성과로, 『두류전지』 제11편 「貼山詩話」 속 한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첩산시화」에는 모두 100여 개 항목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온전한 체재를 갖춘 작품은 대략 80수이다. 이들 작품은 김선신이 집필에 활용한 『동국여지승람』 과 지리산권역 10개 지역의 읍지에서 선별한 것이다. 모두 50여 명 작가의 작품이고,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이다.
‘첩산’이라는 말은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지리산의 주변이나 가장자리’를 뜻 한다. 이는 「첩산시화」에 수록된 작품이 ‘지리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 사 람의 이야기를 담은 한시라는 의미이다. 「첩산시화」 속 한시 가운데 9할 이상이 지리산의 주변을 노래하고 있다.
「첩산시화」에 드러나는 김선신의 이러한 선별 의식은 여느 山誌의 체재와 비교해 보아도 매우 독특하다. 예컨대 『주왕산지』 나 』청량산지』에는 ‘題詠 또는 記錄’ 등의 제목 아래에 해당 산을 유람한 유람록과 유람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류전지』에는 지리산유람록을 한 편도 실지 않았고, 유람시 또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김선신이 ‘지리산’이 아니라 ‘지리산 권역’을 읊은 것은 그 속에서 지 리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문화를 드러내고, 그들과 함께 지리산이 지 닌 온전한 덕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의도라 판단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한 시공간이 지시하는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 한다. 흔히 소설의 3요소 중 하나인 배경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최척전>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작품 속의 인물들이 존재 한 작중 배경, 즉 몇 년, 몇 월, 며칠에 어떤 장소에 있었는가를 작품 속 증거를 찾아내어 고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물이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 곧 특정 한 상황이 전제되면 그때 그 곳에 있었던 인물과 사건은 그때 그 곳의 상황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리라고 기대한다. 연구방법으로 따지 면 문학지리학의 맥을 잇고 있고 소설배경론에도 속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최척전>을 보면 <최척전>의 첫들머리에서 최척이 정상사 에게 공부를 하러 가는 시기는 1592년 5월경이고, 옥영이 남원 정상사 집에 오는 시간은 1592년 8월경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시점은 1593년 1월 말경이다. 최척이 변사정 의병부대에 종군하는 시점은 1593년 2월경이고, 두 사람이 다 시 만나는 시점은 1593년 10월 말이다. 옥영의 억지혼사의 뒷배경에는 제2차 진주성 전투 후 남원 남쪽까지 쳐들어왔다 물러간 일본군의 약탈이 있었다. 정 유재란 시기에 구례 피아골 연곡사로 피난을 간 최척 일가는 불과 하루 이틀 사 이로 엇갈리면서 동아시아 세 나라로 흩어지고 있다.
이렇게 따져놓고 보면 <최척전>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즉 인물들이 존재 하고 있던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거의 재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작품 속 인물 들의 형상이나 주제의식 등에 대한 좀 더 진전된 형태의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 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