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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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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30권 (2010년 12월) 12

1.
2010.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9세기 경상우도 학풍 속에서 趙性家(1824-1903)와 崔琡民(1837- 1905)의 활동을 분석하여 노사학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은 19세기에 새로운 성관집단이 성장하면서 학파를 비교적 자유 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각 가문에서는 과거 급제나 학행에 뛰어난 인물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진주 일대의 학문 수준은 그 이전시기보다 훨씬 높아지는 결 과를 갖게 되었다. 각 가문에서는 書齋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지리산과 덕천강의 풍경이 뛰어난 곳에는 樓亭을 지어 문장을 통해 당색을 뛰어넘어 교제하였다. 문장 외 에도 경학이나 성리학에 뜻을 둔 학자들은 호남의 기정진과 같은 저명한 학자 들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경상우도의 기정진의 문인들은 섬진강과 지리산을 따라 이어진 길을 따라 호남으로 나아갔는데, 곳곳에 숙박할 수 있는 객점과 시 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족들이 분포되어 있어서 여행이 용이하였다. 또한 장 성의 김인후나 함양의 정여창의 후손 등 영,호남을 대표하는 사족들 간에 혼인 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호남 지역을 왕래하는데 정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 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정진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학자들이 기정진을 찾 아와서 수학하게 된 것이다. 조성가와 최숙민은 19세기에 성장한 가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경상우도에 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다. 그들은 河達弘(1809-1877)등에 의해 전개된 시 단에 참여하여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장성의 기정진을 찾아가서 주리론에 바 탕을 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조성가는 호남지역 문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달홍 이후 이 지역의 시단을 이끌었으며 영, 호남간의 노사학파의 가교 역할 을 하였다. 그는 崔益鉉이나 宋秉璿, 李震相 등이 찾아올 정도로 명망이 높았으 며, 관찰사나 목사 등 지방관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남계서원의 원장이 되어 강규를 새롭게 정하거나 조식의 신도비 의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또한 최숙민은 남인 출신이지만 기정진에게 수학한 인물로서 이항로나 이진 상의 문인들과도 교제하면서 기정진의 학설을 심즉리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정 진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한 이후 동문들과 강회를 자주 개최하였으며, 조식을 숭상하여 山川齋에서 德山講約의 강규를 정하는 등 강학에 힘써 산청과 단성, 진주 일대에 다수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은 기정진의 학설을 추종하 여 매사에 천명 즉 천리를 구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강오륜의 도덕적 질서 를 중시하고, 의리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체 행동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 에 그는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도에 어긋난다고 반발하여 직접 언문을 지어 단성의 吏民들을 효유하여 결국 단발령을 철회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성가와 최숙민은 각각 이 지역의 문단과 학계를 주도하면서 경상 우 도 지역에 의리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의 학설이 굳게 뿌리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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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皐 趙性家는 19세기에 굴기한 慶尙右道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경사우도의 蘆沙學派의 首長 역할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月村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하였고, 장성한 이후로 蘆沙 문하에 30년을 출입하였고, 蘆沙 만년에 「猥筆」을 전수받을 정도의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또 노사 사후 노사를 모신 高山書院에 首位로 從享되어 노사의 首弟子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月皐는 스승의 주된 학문 분야인 性理學에 관한 著述은 하지 않았다. 朱子 등 先賢들이 이미 다 해 놓았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南冥이 ‘程子, 朱子 이후로는 꼭 저술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상 통한다. 朝鮮後期 학자들은 대부분 性理學을 위주로 공부하였는데, 사실 독창적인 새 로운 학설은 별로 없고, 늘 비슷한 주장이 많았다. 그리고 性理學에는 논란이 많다. 學派와 학파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學說이 달라 사 이가 나빠진 경우도 많았다. 月皐의 내면을 살펴보면 실제로 그는 性理學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복 잡한 禮學 논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여타의 蘆沙 제자들과도 크게 다르다. 그가 늘 읽기를 권유한 책은 經書와 朱子의 저서였지만, 그 자신은 성리학에 관한 저 술은 물론이고 언급도 거의 하지 않았다. 月皐의 長處는 詩에 있었다. 그는 타고난 특출한 시인이다. 感覺이나 表現伎 倆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그리고 그는 천부적으로 시 짓기를 무 척 좋아하였고, 長篇鉅製도 물 흐르듯 지어내었다. 특출한 詩的인 才能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지어내기 힘든 능력이다. 월고의 시의 경지는 平淡하면서도 淸雅하다. 특히 詩語가 세련되고 표현기법 이 精巧한데, 山水自然이나, 人情世態의 묘사에 뛰어났다. 그러나 정치의 모순, 위정자의 비리, 농민들의 고통상, 당시의 내외정세 등 현 실문제를 다룬 시는 거의 보기 어렵다. 그의 관심이 天人合一的인 觀念世界나 修己에 치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평생 性理學을 공부한 큰 학자지만, 성리학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은 대 신, 수준 높은 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시 속에 그의 개성이나 사상, 학문, 취향 등이 나타나 있다. 그의 시의 분위기는 宋元의 性理學者들의 분위기가 농후하 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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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진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月皐 趙性家의 시문학에 대해 연구 하였다. 조성가는 19세기의 대표적 도학자인 蘆沙 奇正鎭의 수제자였다. 조성 가는 기정진을 만나 도학에 뜻을 세우게 되면서 문장학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 었지만, 시를 사랑하는 그의 속마음을 없앨 수는 없었다. 조성가는 도학과 문장 학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주목할만한 시문학을 산출하 였다. 조성가의 문학적 성취 가운데, 본고에서는 ‘만시’와 ‘지리산 노래들’이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보았다. 조성가는 만시를 지으며 자신의 시인적 역량을 한껏 발휘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또 주위의 인물들에 대해 연속적 으로 만시를 창작하였기에 그의 만시들은 그를 둘러싼 인물들에 대한 작은 역 사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성가의 지리산 노래들에는 지리산의 맑은 자연과 순박한 풍속이 인상적으 로 형상화되어 있다. 조성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리산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지리산 일대에 유학의 도가 이상적으로 구현되 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은 당시 서세동점의 현실과 대비되어 그에게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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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溪南 崔琡民(1837∼1905)의 삶과 학문경향에 대해 조명한 것이 다. 계남이 활동했던 19세기는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위협 받고 있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시대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19세기 사상계는 영·호남 할 것 없이 ‘主理’의 학문체계를 통해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孔 孟程朱로 내려오는 정통 성리학을 유일한 正學으로 보고 陽明學을 비롯한 西學 등 모든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외세 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계남 최숙민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절조의 家學的 전통을 이어받아 한평생 학자적 삶을 추구하였다. 젊은 시절 형인 橘下 崔植民(1831~1891)의 보살핌에 의한 獨學, 그리고 중년에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적 기반 을 토대로 하여 만년에 華西學脈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신의 학문세계를 열어나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세기 시대현실에서 노사의 ‘주리’의 학문종지 를 터득하여 후학들에게 열어주는 것을 자신의 일대 사업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계남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힘입어 黨議에 사로잡힌 당시 사상계 에서 학문적 울타리를 트고, 오직 진리를 찾으려는 求道의 일념과 개방적 학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래서 지역과 당색을 초월하여 많은 학자들과 학문적 담 론을 통해 이론성리학을 지양하고 心學을 위주로 하는 실천성리학을 추구하였 다. 이는 평소 그가 주장한 현실의 삶 속에서 人事인 下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에 기인한 결과이다. 하학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은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영향에 힘입는 바 이지만, 아울러 이 지역의 학풍을 주도했던 南冥 曺植(1501∼1572)이 강조했 던 학문관점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학문정신이 19세기에 되살아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는 下學重視의 학문경향은 바로 계남 학문경향의 주요한 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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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南 崔琡民(1837-1904)은 기정진의 제자이자,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기호 학맥의 끝자락을 장식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그의 스승 기정진과 함께 율곡학 파에 귀속되긴 하지만, 그의 성리학적 구도는 율곡학이나, 이이의 시각을 수정 없이 그대로 계승한 계열과 많은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목적은 최숙민 의 성리학이 어떤 측면에서 율곡학의 관점과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의 리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확인하는 데 있다. 아울러 그러한 차별성 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여전히 율곡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성리학이 조선성리학의 전개사에 있어서 어떤 좌표에 위치해 있는지를 분 석하고 있다. ‘氣發理乘一途’와 ‘심은 곧 기(心卽氣)’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이이의 성리학이 떠안아야만 했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성리학의 궁극적인 목 표였던 ‘도덕실천의 필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 렇듯 이이가 남겨둔 문제는 이이의 후계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할 과 제이기도 하였고, 율곡학파의 전개사는 곧 이 문제에 고민하며 그 답을 찾아가 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숙민의 성리학에는 율곡학파 300년의 고민이 담겨져 있 다. 그 고민의 결과가 리기론에서는 주리적인 성격의 강화로, 심성론에서는 ‘심 이 곧 리(心卽理)’라는 명제로 나타났다. 물론 이것은 최숙민의 문제해결 방식 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체계는 혹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율 곡학파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 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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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최숙민의 ‘명리지학’으로서의 心論을 究明하면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성리학적 담론의 일면과 당시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공감 대를 시론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최숙민은 조성가와 정재규와 함께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지역에 노사 학파의 학문을 확대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노론의 色目을 가지고 있었던 조성 가나 정재규와는 달리, 그는 남인의 색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정치적 관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적 교유를 전개 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기정진의 직전제자이면서도 화서학파, 한주 학파, 안동의 퇴계문인 등과도 학문적 교유를 확대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교유에는 당대 지식인들의 학문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인다. 특히 ‘明理之學’을 성현들의 학문이라고 전제 하면서 ‘心卽理’라는 心論을 형성하고 있는 최숙민의 학문은 노사학파의 입장 에서 보면 독특한 일면이다. 그러나 心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경향성은 그의 학 문뿐만 아니라 한주학파, 화서학파 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최숙민의 心論은 기정진이 부정했던 ‘心卽理’를 오히려 긍정하였다는 측면에 학문적 특징이 있지만, 이것은 理의 氣에 대한 현실적 우위성을 확보하여 理主 氣僕의 가치론적 상하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理의 절대적 우 위성을 확보하고자 理一元化 경향을 보이는 기정진의 학문을 현실적 측면으로 까지 확대·강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실에서의 理의 우위성을 확보하 고자 했던 학문적 노력들은 최숙민뿐만 아니라 그가 교유하였던 학파들이 공유 하였던 성리학적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變亂의 늪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성리학자들의 현실적 고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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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性家와 崔琡民은 경상우도 蘆沙學派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南冥學派의 본거지인 경상우도에서 태어나 蘆沙 奇正鎭의 문인이 되었고, 기정 진의 학문을 전파하고 확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들에게서 남명학적 사상과 언행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들의 이러한 언행을 순 수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러한 행위 가 진정으로 남명학을 존숭해서가 아니라, 남명학적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 은 경상우도에서 자신들의 학파세력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록에 남아있는 여러 가지 증거와 정황으로 볼 때, 경상우도 노사 학파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조성가와 최숙민은 실제로 남명 조식을 존숭하였 고 그의 사상을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더욱 더 발전․확산시키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는 것도 분 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남명학 존숭과 관련된 그들의 언행은 진정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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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남명학연구󰡕 29집 소재 「󰡔南冥集󰡕 諸板本의 刊行年代」라는 오이 환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집󰡕 기유본 문경호 발문의 ‘임인(1602) 년간’은 문집의 편집 작업 이 진행된 시점을 언급한 것이고, 초간된 것은 서문이 찬술된 갑진(1604)년이 며, 장판각에 불이 난 뒤 순찰사 유영순의 후원에 의해 병오(1606)년 무렵에 1 차 중간이 있었고, 다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유를 추가하여 간행한 것 이 기유(1609)본이다. 둘째, ‘年間’, 즉 ‘즈음’이란 용어가 간행연대를 적시한 용어로 보기에는 분명 하지 않고 너무나 느슨하다. 간행한 것은 분명한 것이고, 문집 편찬을 의논한 것은 오늘날처럼 간행위원회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1600년의 󰡔퇴계집󰡕 간행 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셋째, 갑진년 8월에 정인홍이 찬술한 서문이, 문경호가 발문을 실은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집의 초간이 갑진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 로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초간본의 장판각이 불타고 유영순에 의해 중간이 되었다면 이는 유영순 의 관찰사 재임 기간[1605년 9월-1607년 3월]과 관련시키면 병오(1606)년 무렵이라 해야지, 오이환처럼 갑진(1604)년으로 볼 수는 없다. 다섯째, 오이환이 󰡔고대일록󰡕의 신축(1601)년과 임인(1602)년 등에 보이는 ‘看役’이 문집 간행의 일이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계묘(1603)년 겨울 에 李堉이 鄭逑의 심부름으로 󰡔남명집󰡕의 편집 작업을 주도하던 鄭仁弘에게 특 정한 글을 제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정인홍이 “선생의 문자라면 片言隻字라도 가볍게 취하거나 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이는 1603년 겨울 이전까지 문 집의 편집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섯째,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임인(1602)년에 󰡔남명집󰡕이 초간되었다고 주장 한 오이환의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일곱째, 이에 오이환은 유영순에 관한 문경호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며, 하 징의 「덕천서원기」와 배대유의 「신산서원기」에서의 관찰사 기록 착각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가 닿지 않는다. 하징과 배대유가 설사 관찰사에 대하 여 착각했다 해도, 그것이 문경호의 착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조차 오이환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한 것으로 논증하 였다. 여덟째, 우선 하징의 「덕천서원중건기」에서 윤근수가 관찰사로서 재임 기간 [1574년 10월-1575년 10월] 중에 덕천서원의 창건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오 이환은 하징이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재임 중에 그가 지원한 뒤 1576년 봄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보면 하징의 기록에 전연 무리가 없 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배대유의 「신산서원기」는 󰡔모정집󰡕 기록을 보면 ‘방백읍재’ 밑에 윤 근수와 하진보가 각각 세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주를 후인이 추기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은, 오이환이 배대유가 착각했다고 보기 위함 에 다름 아니다. 배대유는 당시의 관찰사 김수와 김해부사 양사준의 인품을 문 제삼아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애초에 ‘방백읍재’라고만 하고, ‘金方伯睟梁知府思俊’이라 표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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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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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은 우리 漢詩史에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는 시적 제재로 사용되어 진 주요한 모티브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상향에 대한 동 경의 실천태로써 이른 시기부터 청학동을 찾았다. 초기 청학동을 찾는 이들에 게 ‘청학동’은 선계 공간이라는 이상향이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선계 로의 탐방은 부정과 좌절이라는 정서로 시화되어 나타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청학동이라는 선계로의 유람은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갈등과 회한이 어 우러져 있다. 다만 일반적인 산수시와 달리 청학동 소재 한시에 나타난 청학동 이라는 공간은 수기의 방편으로 사용된 예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에 드러난 청학동은 현실 밖, 피세의 관념적 공간이자,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열망과 부정의 모순된 정서가 시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는 인간의 욕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리산의 특정 지역을 청학동에 비정하였고, 관념 속의 청학동은 현실적인 명승공간으로써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청학동은 선계 공간으로서의 지위와 명승 공간 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지니게 되었다. 지식인의 한시 작품에 나타난 명승으로써의 청학동은 현실의 불행이 완전하 게 단절된 공간, 갈등과 번민이 없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 우와 현실 밖, 피세의 관념적 공간이자,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간 으로 인식되는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공간들은 열정과 한계 로 인하여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과거 지식인이 추구하였던 이상향이었다. 시인이 청학동을 선계공간으로 인식하였든, 명승공간으로 인식하였든 공통적 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현실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정을 통한 이상향에 대한 동 경이었다. 또한 이러한 시적 전통은 ‘청학동’이라는 특정 공간이 우리 민족의 이 상세계에 대한 구체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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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자에서 사람이 입으로 들이마시거나 내쉬는 ‘숨’ 또는 ‘숨결’과 관 련되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경우 ‘口’ 또는 ‘口’에서 파생된 글자들이 의부 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및 심리상태를 표현 할 때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부는 ‘心’이지만, ‘欠’이 의부로 사용된 글자들 대부 분이 위의 두 가지 例를 모두 아울러서 呼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의미 또는 특 정한 심리상태에 기인한 감정 혹은 행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데 착안 하여, 당시 造字者들이 ‘欠’을 의부로 선택하여 이러한 류의 의미를 부여한 조자 심리의 한 단면을 한자문화학적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 며, 󰡔說文󰡕에 수록된 글자들 가운데 欠部 및 기타 欠이 의부로 사용된 73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분석결과 이 73자들은 대개 단순한 숨결을 표현한 일반적인 气를 나타내는 글자류, 음식물을 먹거나 마시는 것과 관련된 气를 나타내는 글자류, 특정한 심 리상태에 기인하여 감정이입이 된 상태의 气를 나타내는 글자류 등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이를 통하여, 지극히 추상적이고 시각적으로 쉽게 확인되지 않는 气와 欠을 형상화시키고, 호흡으로서의 단순한 气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행위 로서의 미세하고 다양한 气를 합성사가 아닌 단음절사로 대량 제작해 사용한 심리적 근저에는 造字 당시 이미 ‘气’라는 개념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었고, 이 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작업을 통하여 중국 고대인들이 문자를 제작하여 운용하는 과정에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간에 처해 있는 문화적 배경이 반영될 수밖에 없 었다는 것은 필연적 결과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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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고대로부터 󰡔千字文󰡕이나 󰡔三字經󰡕과 같은 童蒙書들이 많이 편찬 되었다. 이런 교재들은 어린 학동들에게 識字 및 상식교육을 시킬 때 필수적으 로 사용되었던 교재들이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동몽서 중 가장 일찍 나왔던 책 은 󰡔急就篇󰡕이다. 그러나 이 보다 앞서 중국에는 최초의 학생규칙이었던 「弟子 職」이 있었는데, 이는 齊나라 稷下學宮의 학생 관리 규칙이기도 하지만, 훗날 동몽서 편찬에 영향을 주게 되는 ‘동몽서 雛形’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자직」은 管仲이 지은 것으로, 제나라 桓公 때 세워진 직하학궁의 학생 생 활수칙이다. 직하학궁은 제나라 정권이 국가발전과 정권을 공고하게 하기 위하 여, 인재를 불러 모아 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학술연구와 학생교육을 담 당하게 하였던 교육기관이었다. 이 직하학궁 내의 각 학파 賢士들은 백가쟁명 의 구도 속에서 학생들을 지도 관리해야 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제자직」이 나 오게 되었다. 「제자직」에서는 “尊師” “友愛” 정신과 道德修養, 학습활동과 생활습관 등 학 생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기본적인 준칙 등을 체계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 내용은 약 열 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형식은 기억하기 쉽도록 거의 전 부가 1구 4언의 운문으로 되어 있다. 「제자직」의 기본 정신은 곧 스승을 존중하고 법도를 중시하는 “尊師重道”사 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내용 중의 “謙恭”과 “虛心”의 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사상은 학생이 갖추어야할 훌륭한 학습태도이자 덕성을 길러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尊師” “重道”의 가치 관념을 체현 하는 방법인 것이다. 「제자직」에서의 “尊師” “重道”의 교육철학은 공허하게 추 상적・관념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실천이 되도록 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尊師” 정신은 정상적인 교학활동을 위한 전 제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제자직」에서는 지극할 정도로 선생님에 대한 “恭敬” 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君師父一體”라는 전통적 관념이 그대로 적용 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弟子職」이 󰡔漢書󰡕 「藝文志」 중에서도 孝經類에 분류되어 있는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자직」 이후에 나온 󰡔千字文󰡕・󰡔百家姓󰡕・󰡔三字經󰡕・󰡔弟子規󰡕 등과 같은 동몽서들이 모두 다 「제자직」처럼 네 글자 형식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 격식 과 정신은 모두 「제자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자직」 에서 교육내용을 學規와 통일을 시킨 編寫 원칙은 곧 훗날 동몽서들이 아동의 심리 특징에 맞도록 하고, 지식교육과 도덕 배양을 하나로 융합시켜 이상적인 교육효과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