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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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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권 (2015년 12월) 7

1.
2015.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단계마을의 역사 변천과 의미를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구명하고자 했다. 먼저 단계마을의 지명은 철광석의 산화철 현상인 ‘붉 은’ 의미가 들어간 ‘적촌’‧‘단읍’‧‘단계’에서 유래했다. 단계의 고대 사회 는 한 가야 소국을 구성하던 단위인 읍락이었으며, 신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 赤村縣으로 편제되었다. 통일신라 때 菁州 闕支郡의 영현이 되었 으며, 경덕왕의 한화정책에 의해 丹邑縣으로 개명되었다. 다음으로 940년 단읍현에서 단계현으로 명호 개정은 단계현이 국가 질서 내로 편제되었음을, 토성분정으로 지역 내의 세력 재편이 마무리 되었음을 의미한다. 단계마을은 나말여초의 변화 속에서 단계현의 중 심지가 되었다. 그 치소가 도평[양전]에서 단계마을로 옮겨졌기 때문 이다. 단계현은 1254년의 몽골 침략, 皆品部曲의 山陰縣으로 移屬, 왜 구의 침입으로 위상에 큰 변화를 겪었으며, 단계마을도 그러한 변화로 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끝으로 許邕은 단계마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지명에서 취한 단 계로 호칭되었으며, 토성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단계마을 역사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허옹은 1337년에 처향 단계로 은거하여 스스로 迂軒이라 칭하였으며, 당시 일반적인 男歸女家의 혼인 형태에 서 본다면 귀향이라 할 수 있다. 허옹은 1345년에 다시 벼슬살이에 나섰다가 1348년 무렵에 다시 단계로 낙향하고 그 직후 법물리로 이거 하였으며, 1357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헌 허옹이 단계에 입향함으로써 불러온 단계 사회의 변화는 결코 적지 않았다. 여말선초 우헌 허옹의 아들 허소유와 許繼道, 사위 안동 장씨 張綱, 외손서 상산 김씨 丹邱齋 金後가 단계마을과 법물리에 은거하거나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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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정일록은 해기옹 김령이 단성항쟁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862년 6월 4일부터 1863년 12월 30일까지 전라도 임자도에 1년간 유배되었 다가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지낼 때까지의 일상을 기록한 유배일 기이다.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 한 며칠을 제외하고, 날짜에 따라 매일의 일상을 행간의 구분 없이 기록 하였다. ‘간정’이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면 허물이 없어진다[간정무구]’는 의미이다. 간정일록에는 130여 편의 한시가 실려 있다. 그 시들은 벗들과 술자리에서 수창할 때, 마음속의 회포를 풀려고 할 때, 주위의 요구가 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지어진 것들이다. 이 시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김령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담겨 있다. 김령은 단성항쟁을 주도하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문집이 없음으로 인해 그의 면모를 알 길이 없었다. 간정일록의 한시에는 온유돈후한 가장의 모습, 현실의 부조리에 대 해 개탄하는 유자(유자)의 모습, 고뇌를 타개해 나가려는 지식인의 모습 등 알려지지 않았던 김령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나타나고 있다. 김령은 강자에겐 강직하며, 약자에겐 온유한 인물로 약자 편에 서서 현실적인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했다. 간정일록에 수록된 한시에 나 타난 이러한 김령의 인간적 면모들을 보면 그가 단성항쟁을 주도한 그 이면을 알 수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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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의 단계마을은 외형적으로 전통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마을 이다. 그러나 단계마을은 언제 형성되고, 어떤 문중이 어떻게 살아왔는 지, 어떤 인물은 어떤 사상을 지녔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단계마을 사람들이 기록한 고문헌을 통해서 연구가 가능하다. 단계마을에서 동계문중과 단계문중이 고문헌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동계종택에는 고서 161종 383권, 단계고택에는 378종 1,296권이 소 장되어 있다. 또 안동권씨 동계문중과 상산김씨 단계문중 소장 고문서 는 1,628점에 달한다. 책판(책판)도 동계종택에는 144장이, 단계고택 에는 247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과 한국 국학진흥원(Advanced center for korean studies)의 조사에 의해 단계 마을 소장 고문헌 조사 보고서가 출간되어 그 전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문헌은 화재와 충해 및 습기에 매우 취약한 특성을 안고 있다. 한번 멸실되거나 연고가 없는 곳으로 떠나 사유화 되고 나면 연구 자가 두 번 다시 그 내용을 열람할 수 없게 된다. 특히 근래 농촌사회의 고령화(高齡化)와 이농(離農)으로 인하여 마을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또 한학세대(漢學世代)의 단절로 인하여 문중에서 고 문헌을 소장하고 있어도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후손들은 점점 문중에 대한 자부심이 약화되어 문중 전래 고문 헌을 관리하는 데 한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단계마을의 역사기록인 고문헌을 전문 연구기관에 기탁하여 고문헌 정보를 전국의 연구자가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한다면 단계마 을 내면의 역사가 더욱 다각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문헌은 마을의 다양한 인문지리정보와 결합하여 보다 더 대중화된 콘텐츠 개발이 가능해질 것이다. 후손들은 조상이 남겨준 고문헌을 잘 보존 관리하여 다음세대에게 물려주고, 또 고문헌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대중적으로 연구 활용하 는 것이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방안일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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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12세에 唐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賓貢科에 급제하여 현지에서 관료로 활동하였다. 16년 동안의 당 나라 생활, 그 리고 28세에 귀국한 이후 신라에서의 활동에서 그는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 더해서 그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 그의 학문은 곧 ‘詞章學’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받 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기본적 으로 최치원의 학문이 사장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서도, 그의 학문이 정말 우리가 믿고 있는 만큼 순수하게 사장학적인가 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이다. 최치원의 유학사상에 사장학이 아닌 새로운 지향이 함축될 수 있다 는 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가기 50여 년 전, 흔히 송명리학의 선구로 알려져 있는 한유나 이고 등에 의해 이미 유학의 질적 전환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들의 활동이 당시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첫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당나라 중기 이후 사장학 내부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최치원이 직간접으로 계승하고 있는지 여부 는, 결국 한유와 이고 등의 지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과 함께, 그와 유사한 지향을 최치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 첫째로 사장학 의 한계와 함께 그것을 넘어서는 학적 체계를 인정하는 탈사장학적 특징, 둘째로 직접적으로 성리학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지향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치원으로부터 우리는 사장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탈사장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經典의 전통보다는 四書의 전통을 준비하고, 공자와 맹자를 道統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성리학을 향한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사장학으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장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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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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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고대로부터 관잠이 많았다. 이는 지방관이 관할 지역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료를 말한다. 역대 관잠들 중 원대 장양호 의 삼사충고를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는다. 장양호는 관직생활 을 하면서 경험했던 풍부한 지식과 정보들을 책으로 남겨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령으로 있을 때의 경험과 문제점들을 지적한 목민충고, 감찰어사로 있을 때의 경험을 종합한 풍헌충고, 그리고 중서라 는 중앙관리로 있을 때 직면했던 여러 현상과 문제점들을 분석한 묘당 충고가 곧 그것이다. 후대에 와서 이들 세 권을 합본하여 삼사충고라 하고 있다. 세 권의 내용은 각각 후대 ‘지방 관리’와 ‘감찰관’과 ‘중앙관리’들이 지켜야할 장양호의 ‘충고’를 적은 것들이다. 본고에서의 분석 대상은 목민충고로,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충정・인애・청렴・공평・근로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충정사상은 애국의 기본 도리와 윗 사람을 섬기는 공직자의 자세를 말한다. 국사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봉록이 헛되어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언급하고, 아울러 군주 에 대한 충성과 관료사회 속에서의 위계질서 유지 및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인애사상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사랑을 실천 하는 사상이다. 이는 목민충고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으로, 공자나 맹자가 강조했던 민본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장양호의 인애사상 속에는 먼저 백성을 중시하는 기본 이념을 바탕으 로 하되,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세 번째 청렴사상은 자기 단속을 엄격하게 해서 깨끗한 공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는 관리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바르지 못하면 쉽게 부정부패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장양호는 특별히 관리들의 청렴사상을 중요하게 보았다. 네 번째는 공 평사상으로, 공정하고 올바른 법을 적용하여 백성들이 불이익을 당하 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법의 적용이 공평하지 못하면 민심 이반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한 사회 기강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장양호는 부하 관원이든 백성이든 모두에게 공평하 고 무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근로사상이다. 이는 나라 의 통치자나 관리들이 솔선수범하고 부지런해야 백성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즉, 관리란 백성의 행복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공복’ 개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은 다양한 수법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고대 성현 의 가르침이나, 선배들의 충고, 그리고 역대 성군의 치적이나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교훈, 혹은 주위에서 보고 들은 미담 등등을 자신의 현직 경험과 느낌 등을 종합하여 국가 관리들이 꼭 참고해야 할 정무 지침서가 되도록 하였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와 환경이 달라진 현대에 와서 이상의 내용들은 진부하고 무가치한 ‘화석’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국가나 사회든 피해갈 수 없는 이치 중의 하나는 청렴한 조직과 공직 기강을 통해 백성들이 행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기에 목민충고가 오늘 우리에게 강조하는 메시 지는 결코 헛되지 않다.
7.
2015.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교육용 기초한자에 대한 ‘자소표’ 제정이 시급하다는 인식 아래에서, 선행작업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자소추출 원칙’ 및 ‘자소 표의 구성’ 등의 대강을 정하고, 그에 의거해 「교육용 기초한자 자소 표」 시안을 작성하여 310조 451개의 기초자소를 설정하였으며, 분석 층차에 따라 이차、삼차자소들도 같이 제시하였다. 본고에서 제시한 ‘자소추출 원칙’은, 아래의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리에 근거해 한자의 계통성을 살린다. 2) 현실 자형으로 그 근원을 밝히기 힘든 경우에는 해서체 자형에 근거한다. 3) 교차중첩되어 결합되는 자소들은 탁분하지 않고, 모두 기초자소 로 설정한다. 4) 외형상 탁분할 수 있는 자형이라 하더라도, 자리에 맞지 않거나탁분 후의 자소 모두가 여타 자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경우 탁분 하지 않는다. 본고에서 시안으로 작성한 자소표는 조번호、자소번호、기초자 소、변이형태、이차자소、삼차자소、자소명칭、예자、비주 등으로 구성되고, 조의 나열은 각 조 제일 위에 위치하는 대표기초자소의 음순 에 의거하였다. 자소표에서 제시하는 310개 조에서, 동일한 조로 편성 되어 있는 자소들은 대표기초자소와 서로 형、음、의 삼자간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조에는 기초자소와 파생 자소 및 동형자소들이 같이 나열되어 있으며, 자소번호는 기초자소에 만 부여하였다. 설정한 자소추출원칙에 의거하여 「자소표」를 작성하였지만, ‘계통 성과 현실자형 사이의 선택문제’ ‘자소명칭 부여의 문제’ 등은 여전히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는 점도 말미에 언급하였다. 향후 좀 더 완성 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각 종 색인 및 성자자소표 등이 추가로 작성되어 야 한다는 견해도 피력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자형 및 자음의 규범 화、필획 및 전통 자전 부수의 재조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느 한 두 사람의 주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학계의 공론화를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점 역시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