瞻慕堂 林芸은 조선 중기 慶尙右道의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부친 石泉 林得蕃과 형 葛川 林薰으로부터 家學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退溪 李滉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더욱 심화시키고, 교유의 범위를 확대했다. 남명을 만나 영향을 받고 학문의 방향을 수정하였으니, 남명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생애의 초반에는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심성 수양을 하고 있다가 學⾏이 알려져 추천을 받아, 1567년 51세 때부터 벼슬 길에 나아갔다. 크게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 리가 아닌 참봉직에 있으면서 조정에 장래 경륜을 펼칠 기반을 닦고 있었는데, 1572 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말아 그가 이룬 학문을 크게 펼쳐 보지 못 했고, 많 은 士友들이 아쉬워하였다.
첨모당 같은 유림에 비중 있는 인물이 나온 이후로,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 학문이 있고 ⾏誼가 있는 대표적인 가문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였다. 그 손자 林⾕ 林眞怤에 이르러 학문하는 家門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실히 하였고, 그 林⾕의 후손들도 학문하는 가문의 위상을 계속 지켜 나갔다.
특히 石泉은 자식 교육에 전념하여 學⾏兼全의 교육을 몸소 실천하여 성공하였 다. 그 두 아들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家聲을 높였다. 갈천은 退溪 南冥과 도의지교를 맺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첨모당은 퇴계의 친밀한 제자가 되고, 또 남명에게 지도를 받음으로 해서 조선 학계의 양대 宗匠의 영향을 모두 받게 되었다.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아우르는 이런 특징은 瞻慕 堂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瞻慕堂은 51세 때 추천을 받아 출사했지만, 경륜을 펼칠 정도의 승진을 하지 못 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 했다. 그 아들들도 대부분 일찍 세상 을 떠나는 바람에 학문적으로나 관직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 했다. 그 손자 林⾕ 林眞怤가 외조부 ⽴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 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 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 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瞻慕堂 가문은, 조선 전기 石泉 林得蕃에 의해서 家學이 형성된 이후 葛川 林薰, 瞻慕堂 林芸 형제를 거쳐 전국적인 學問名家의 위상에 올랐다. 그 이후 첨모당의 손자 林⾕ 林眞怤가 큰 학문을 이루었고, 그 아들 손자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거의 학문이 끊어지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이 집안은 오랜 기간 대 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임운(林芸, 1517-1572)의 표질 이칭(李偁)은 선조 28년(1595, 을미)에 임운의 행 장을 적어, 임운이 서울에서 역학을 논하자 기대승이 탄복한 일, 임운이 서울에서 퇴계 이황과 문난(問難)했을 뿐 아니라 퇴계가 도산(陶山)으로 퇴거하자 찾아가 뵙 고 하룻밤 묵으면서 문답한 일, 임운이 백씨 임훈, 남명 조식, 옥계 노진(盧禛)과 함 께 화림(花林)에 유람한 사실을 특별히 기록했다. 하지만 미수 허목(許穆, 1595- 1682)은 묘갈명을 지으면서, 임운과 기대승, 이황, 조식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 임운 자신이 남긴 시문에 나타난 학문 태도로 보면 반드시 퇴계와 남명의 맥을 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임운은 퇴계와 남명의 학맥이 형성되 기 이전에 주자학을 연찬하여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 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임운의 생애를 살펴보고, 임운이 남긴 부 (賦), 책(策), 논(論) 등을 중심으로 그의 학술에 관해 개괄했다.
임운이 호일계(胡一桂)의 주역본의계몽익전(周易本義啓蒙翼傳)을 독파하여, 주희 역학 가운데 상수학을 중시하고 복서에서 의리를 추론하는 방법을 수립하고자 한 것은 퇴계의 학맥을 직접 이은 것이라기보다는 독조(獨造)의 경지가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瞻慕堂 林芸의 한시 가운데 脫俗的 詩世界를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해 첨모당 한시의 배경에 대해 우선 살펴보았다. 첨모당은 시를 매우 좋아 하였고, 자연의 景物을 만나면 흥이 일어 시를 읊었다. 이러한 시는 자신의 학문세 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사물에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회 포를 담아 노래한 것이 많다. 특히 그는 자신의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이에 대한 생각을 시에 담아 내었고, 특히 속세를 벗어나 산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읊었다. 첨모당 시의 커다란 특징은 탈속의 興趣를 읊은 것이라 하겠는 데, 이러한 탈속적 시세계는 대략 네 가지 층위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世俗의 먼지를 떠나고자 하였다. 첨모당은 紅塵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을 피하여 산수 가운데 隱居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성향에 대해 자신이 자연을 탐하는 것이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깊었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山水에 대한 흥취가 병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좋은 경물을 찾아 유람하는 고상한 흥취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다 보니 산야에서의 흥취가 병이 되어 어쩔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산에 오르는 일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어찌할 수 없는 病癖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시와 술로 미친척하며 살아갔다고 하였다. 그는 속세를 떠나고 산수 자 연을 찾아 다녀도 이것으로 마음의 회한을 모두 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술을 좋아하였고, 술을 아무리 먹어도 실수를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네 번째는 人間世上에 절로 神仙世界가 있다고 했다. 몇 몇 유자들의 경우처럼 첨 모당도 신선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대부분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자신이 있는 공간이 바로 신선세계라는 인식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는 모두 첨모당 시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탈속적인 시세계의 구체 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첨모당 한시의 특징을 개괄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할 것 이다.
瞻慕堂 林芸(1517-1572)은 조선 시대 安陰 葛溪에 살았던 儒學者로, 그 형 葛川 林薰(1500-1584)과 함께, 살아서 孝⼦ 旌閭를 받아 당대에 實踐儒學의 表象으로 알려져 사후에 一蠹 鄭汝昌(1450-1504)을 제향 하던 ⿓門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형 갈천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南冥 曺植(1501-1572)을 從遊하였던 것으로 山海師友淵源錄에 收錄되어 있는바, 학문의 성취와 관련지어 유추해 보 거나 연령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남명의 문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瞻慕堂集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1501-1570)과의 師承 관계를 표현 하고 있는 글들이 곳곳에 보일 뿐만 아니라 후인이 찬술한 瞻慕堂 墓道文字에서도 退溪의 門人임은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南冥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만한 첨모당 본 인의 글은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남명이 66세 때 첨모당을 만난 사실이 남명학파의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그 이 전에 만나서 담화를 나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566년이라면 첨모당이 50세 때이 니, 첨모당의 학문에 대한 남명의 충고가 첨모당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첨모당의 학 문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명연보에 전하는 남명과 첨모당의 만남 정도는 싣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서는 지금 전하는 첨모당집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첨모당의 손자 임곡 임진부가 남명이 절교했던 귀암 이정의 曾孫壻라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林⾕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无悶 堂 朴絪이 편찬한 山海師友淵源錄의 龜巖 李楨 부분의 기록 가운데 淫婦獄事와 관련된 기록을, 일찍이 직접 刪削해 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뒤에는 林⾕의 아 들 林汝栢이 无悶堂의 아들 朴曼에게 편지로 간곡하고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임 여백은 귀암을 향사하고 있는 龜溪書院의 院⻑을 지냈고, 귀암을 위해 귀계서원의 賜額을 요청하여 성사시켰으며 귀암의 시호를 요청하는 상소도 작성하여 올린 적이 있었다.
남명집에 귀암 관련 기록을 남긴 인물은 내암 정인홍인데, 정인홍이 무민당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임곡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다 임곡의 두 아들 이 모두 무민당의 문인이 되었으니, 내암은 임곡의 아들들로서는 스승의 스승인 셈 이어서 비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이 마침 인조반정으 로 인해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신원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0년대 이후에는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강우 유림 사회에서도 정인홍을 적신으로 인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임곡 집안의 처지에서는 첨모당집을 간행할 때에 될 수 있는 한 남명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임곡 임진부(1586-1657)는 조선이 개국한 이래 가장 혼란스러운 17세기를 살다 간 재야지식인이다. 국가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그리고 병자호란 등의 전 란을 겪었고, 지역적 또는 학문적으로는 광해군 왕조의 핵심 세력인 北人 정권이 인 조반정에 의해 교체됨으로써 그들의 학문적 기반인 南冥學도 몰락하는 과정을 겪 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지역에서 함께 수학한 여러 同學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 다.
임곡은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출사하여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재야지식인의 삶을 선택하였다. 이 글은 당시 남명학파 지역의 대표적 인물로 살다 간 임곡의 삶을 한시를 통해 살펴보았다. 임곡은 일생을 재야지식인으로 살면서 從祖⽗ 葛川 林薰과 祖⽗ 瞻慕堂 林芸으 로 대표되는 거창 갈계리 일대의 家學을 계승하는데 주력하였고, 무엇보다 병자호 란 등 국가적 전란에 즈음하여 재야지식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과 자 아와의 괴리 등을 한시에 핍진하게 표출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늘 고뇌에 차 있고, 철저한 심성수양을 강조하며, 나아가 지역 선현을 추숭하는 등 재야지식인으 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17세기에 활동했던 林眞怤(1586-1657)의 학자적 삶을 분석한 것이며, 궁 극적으로는 조선후기 南冥學派의 다양성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그 다양성 이란 강우 남명학파권에 지역적 연고를 두고 曺植 및 그 문인들과 일정한 학연을 맺 으면 기계적으로 남명학파의 범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임진부를 양성한 학문적 물줄기 속에 남명학파적 요소가 충만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삶과 학문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는 조식을 매우 흠모 했고, 南冥學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부심하면서도 뇌리 한 편에는 항상 李滉 을 담아두고 있었다. 임진부는 남명학과 退溪學의 절충을 모색하고 있었고, 퇴계학 이 절충의 종속 요소가 아니라는데 중요성이 있다. 순혈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남 명학파 연구에 있어 임진부의 존재는 향후 연구의 새로운 시각으로서 깊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동아시아적 자연학의 한 갈래이자 계절의 변화를 천 문기상학적 이론으로 접근시킨 고대 월령론이 성립하고 전개되는 문제 를 살펴보았다. 이때 고대 동아시아적 월령론이 정초되는 사상과 이론 의 기초로서 천문학과 기상학 관점의 논의를 주목하였고, 특히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배태되는 자연물의 관찰경험적 지식이 광범위한 물후론으 로 성립하는 측면을 드러내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그 계절의 변화론을 천문관측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상서 「요전」의 사중성 문제를 살펴보았고, 이를 확대하 여 매월의 별자리 관찰과 물후로 연결시킨 대대례기 「하소정」의 월 령론을 고찰하였다. 이어서 진제국의 통일이념서 역할을 하였던 여씨춘추 「십이기」에 서 비로소 본격적인 1년 12월령 체계가 수립되었고, 이는 전한시기회남자 「시칙훈」과 예기 「월령편」으로 계승되었는 바, 이 세 종류 문헌에 수록된 구체적인 천문과 물후월령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러는 사이에 월령론은 자연의 계절변화를 설명하는 적합한 이론틀 로 인식되고 확산되었으며, 그 끝에 후한대 성립으로 추정되는 일주서 「시훈해」는 1년 12월 24절기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 1년 72후법 을 처음으로 규범화하고 체계적 설명틀로 수립하였다. 이제 자연의 계 절 변화가 매뉴얼화되어 달력이 없더라도 규범화된 각 절기의 물후 곧 절후법을 통해 쉽게 자연의 변화를 인지하고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72후의 절후법에는 1년 태양의 변화에 따라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기상상태와 동식물의 반응양태가 다분히 경험학적으로 반영되었으므 로 이 규범체계의 확산력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하겠다. 남북조시대에 들어서 6세기 중반에 반포 사용된 위서 「정광력」은 드디어 72절후법을 역법의 주요 요소로 평가하여 수록하였으며, 다만 일주서와는 다른 계통의 72후 체계를 엮어 제시하였다. 이후로 「역 지」 계통에는 반드시 72후법을 수록하는 것이 항례가 되었다. 수나라 의 <황극력 72후법>이나 당나라 전기의 <인덕력 72후법>은 이를 전승한 주요한 흐름들이며, 당나라 중기 <대연력 72후법>은 기존의 72후 순서나 내용을 다소 개변하였고, 당나라 후기 <선명력 72후법> 은 이 대연력 계통의 72후법을 전승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가 국초부터 당나라 <선명력>을 수용하여 사 용하였으므로, <선명력 72후법>의 이론으로 자연변화를 인식하고 설 명하였을 것이다. 고려말에 도입된 <수시력 72후법>은 기존의 72후 내용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이 체계가 조선전기에도 습용되어 조 선의 학인들이 자연을 인식하는 주요 규범틀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72후에 기초한 물후월령은 월령론의 천문기상학적 접근 이자 전근대시대 자연의 변화를 해석하는 주요 통로로 기능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우리로서 그 물후월령을 통해 자연과 동화되고 적응하는 삶을 구가하는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우주론적으로 성화시키는 자연학적 기제가 여기에 놓인 것이라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고의 논의 는 월령자연학으로 열리는 방향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에 널리 성립하는 각종 세시기 문헌의 세시월령이나 각종 시가 작품으로 전하는 월령체 문학 또는 각종 구비전승으로 전개되는 민속월령 문화는 우리 문화사를 구성하는 주요 영역인 바, 그 문화의 기초가 되는 월령자연학의 역사적 흐름과 이에 대한 천문기상학적 원 리 해명을 시도한 것이 본고의 주요 관심사이자 연구 의의라 이를 수 있다.
본 연구는 남명의 교육사상을 근거로 청소년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다. 이를 위하여 인성교육에 대한 교육요구를 PRECEDE-PROCEED 모형에 따라 설문문항을 개발하여 중학교 2학년(272명)과 고등학교 2학년(243명)으로 전체 515 명을 대상으로 교육요구를 진단하였다. 조사 결과, 청소년의 인성교육에 필요한 주 요 인성덕목은 존중, 정의/공정성, 책임, 성실, 정직/믿음, 예의, 배려의 7가지 항목 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덕목을 기초로 하여 남명의 교육사상을 프로그램 구성의 주요내용으로 설정하였다. 프로그램은 전체 10회기로 구성되었으며, 각 덕목을 한 회기에 한 덕목씩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행방법은 남명이 제자들을 교육한 방법과 협동학습법을 프로그램의 운영에 적용하였다. 인성덕목에 대한 이해 및 실천이 과정평가의 목표가 되며, 이를 통해 다양한 문제 행동을 줄이는 것이 영향평가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 장기 성과평가의 목표는 학생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수준 향상과 삶의 만족도를 증가하는 것이었다. 본 연구를 통해 개발된 남명의 교육사상에 근거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은 추후 한국의 자생적인 교육사상을 근거로 하는 인성교육 프로그램의 확산 및 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