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진주 士谷 마을이 갖는 人文空間으로서의 성격을 時間과 空間 그리고 人間의 역할 속에서 분석한 것이다. 사곡은 일차적으로 晉陽河氏의 세거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의 기능성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곡은 大覺書院이라는 人文景觀의 확보를 통해 南 冥學 副心地로서의 正體를 확립했고, 여기에 ‘忠·孝·學’의 유교적 가치 를 입혀 공간적 秀越性을 강화했다. 사곡마을 사람들은 ‘鄕人’이었지만 그들의 사귐의 대상과 방향은 서울과 都會文化의 수용이었고, 그 바탕에는 婚脈이라는 지식문화적 流 通網이 작동하고 있었다. 사곡마을 하씨들이 17세기 이후 晉州 鄕村社 會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도 여기에 있었다. 조선의 마을은 그 시대가 선호하는 가치에 따라 디자인되는 속성을 지닌다. 사곡마을은 朱子學의 핵심 가치였던 忠·孝·學을 융합시켜 자신들의 마을을 브랜드화 했고, 이것은 사곡이 조선의 名村을 넘어 한국의 인문공간으로 주목되는 이유가 되었다. 시간 및 공간과 유리된 인간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탐색은 그 목표의 불분명성에 봉착할 수 있다. 이 글은 인간을 다루되 시간에 유념하고 공간에 집착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마을은 인간의 활동을 가장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이고, 사회와 국가라는 보다 확대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활동을 정치하게 추출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연구가 매우 긴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文으로 빚고 禮로 다듬은 文治國家이자 禮治의 공동체였다. 朱子學을 尊信했던 양반 사대부들은 ‘文治’ 구현의 충실한 수행자를 자임했고, 국가의 기초 단위인 ‘家’의 실현 공간인 마을에 대한 애착은 강렬했다. 그들에게 마을은 住居와 生活을 넘어 學術·文化를 자급하는 知識共同體로 착상되었고, 그것의 보편적 구현을 朱子學의 朝鮮化로 받아들였다. 인문 景觀으로서의 마을은 形成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이념과 가치를 지닌 인간이 造成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의 우열은 그것을 디자인하는 인간의 능력과 직결된다. 시대를 내다보는 안목과 식견을 지닌 인간이 디자인에 개입할 때 그 공간은 形質의 수월성, 즉 格調를 담보할 수 있다. 안계마을 河氏의 本源的 思惟는 朱子學과 南冥學이었다. 전자가 보편성을 지닌 종적 思惟라면 후자는 특수성에 바탕한 횡적 가치였다. 이들은 양자를 종횡으로 엮에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며 사회·학문적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5세기에 안계에 정착한 하씨들이 이 공간에 대한 우월적 지배력을 확보하고 주자학·남명학적 개념과 구도 속에서 마을을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고, 그 정점에는 그 시대의 嶺南學界가 선호했던 河弘度라는 학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와 그 자손들이 조성하고 경영했던 文巖[門巖]·敬勝齋·慕寒齋·宗川書院·直方軒·光影亭·尼谷書堂·士山書堂 등의 학술문화 인프라는 안계마을의 학술문화적 지향과 정치사회적 노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안계마을을 무대로 펼쳐졌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300년의 시간 속에서 역사의 지층으로 남았고, 우리는 이 지층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반추하려 한다. 마을은 이런 것이다. 글은 인간의 필요와 이해에 따라 고칠 수도 있고, 곱게 단장할 수도 있지만 시간의 경과 속에 견고하게 다져진 삶의 자취는 섣부른 개변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을의 문화사가 지니는 質實하면서도 혹독한 장면이다.
이 글은 17세기에 활동했던 林眞怤(1586-1657)의 학자적 삶을 분석한 것이며, 궁 극적으로는 조선후기 南冥學派의 다양성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그 다양성 이란 강우 남명학파권에 지역적 연고를 두고 曺植 및 그 문인들과 일정한 학연을 맺 으면 기계적으로 남명학파의 범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임진부를 양성한 학문적 물줄기 속에 남명학파적 요소가 충만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삶과 학문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는 조식을 매우 흠모 했고, 南冥學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부심하면서도 뇌리 한 편에는 항상 李滉 을 담아두고 있었다. 임진부는 남명학과 退溪學의 절충을 모색하고 있었고, 퇴계학 이 절충의 종속 요소가 아니라는데 중요성이 있다. 순혈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남 명학파 연구에 있어 임진부의 존재는 향후 연구의 새로운 시각으로서 깊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