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진주 士谷 마을이 갖는 人文空間으로서의 성격을 時間과 空間 그리고 人間의 역할 속에서 분석한 것이다. 사곡은 일차적으로 晉陽河氏의 세거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의 기능성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곡은 大覺書院이라는 人文景觀의 확보를 통해 南 冥學 副心地로서의 正體를 확립했고, 여기에 ‘忠·孝·學’의 유교적 가치 를 입혀 공간적 秀越性을 강화했다. 사곡마을 사람들은 ‘鄕人’이었지만 그들의 사귐의 대상과 방향은 서울과 都會文化의 수용이었고, 그 바탕에는 婚脈이라는 지식문화적 流 通網이 작동하고 있었다. 사곡마을 하씨들이 17세기 이후 晉州 鄕村社 會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도 여기에 있었다. 조선의 마을은 그 시대가 선호하는 가치에 따라 디자인되는 속성을 지닌다. 사곡마을은 朱子學의 핵심 가치였던 忠·孝·學을 융합시켜 자신들의 마을을 브랜드화 했고, 이것은 사곡이 조선의 名村을 넘어 한국의 인문공간으로 주목되는 이유가 되었다. 시간 및 공간과 유리된 인간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탐색은 그 목표의 불분명성에 봉착할 수 있다. 이 글은 인간을 다루되 시간에 유념하고 공간에 집착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마을은 인간의 활동을 가장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이고, 사회와 국가라는 보다 확대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활동을 정치하게 추출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연구가 매우 긴요하기 때문이다.
진양하씨가 터를 잡고 살아온 사곡마을은 4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역사와 인물, 그리고 문화가 만들어졌고, 이를 반영하는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기록물 관련 자료는 송정 종가, 지명당 종가, 묵와공 종중을 통해 고문서, 고서 및 책판의 형태로 남아있다. 송정 종가는 송정 하수일의 장남 琬(1588-1617)으로 이어지는 큰집 계열로, 고문서 109종 133건, 고서 149종 377책, 책판 4종 113 판을 소장하고 있다. 지명당 종가는 지명당 河世應(1671-1727)의 장자 河必淸(1701-1758)으로 이어지는 큰집 계열로, 고문서 3,518건, 고서 636종 1,444책을 소장하고 있다. 묵와공 중중은 默窩 河啓賢(1804- 1869)을 모시는 종중으로 하계현은 涵窩 河以泰(1751-1830)의 6子 (막내)이다. 하이태는 송정 하수일의 8세손이자, 석계 하세희의 증손이다. 이곳에는 수곡의 진양하씨들이 주축이 되어 간행된 『주자어류』 2,072판이 광명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는 대부분 2003년 진주권 지역 고문헌 조사 및 2008년 경남권 목판자료 조사 등의 사업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지금까지도 특별한 주목을 받거나 별다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이는 고문헌을 소재로 활용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고문서는 한문과 이두 및 초서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서 비전 문가의 접근이 매우 어렵고, 고서는 서명과 권차 및 저자 정보를 넘어 활용 가능한 전문적인 정리목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연구를 단초로 향후 자료의 재정리, 재촬영, 원문 자료의 탈초와 번역 등 자료의 가공과 웹 구축을 통해 관련 연구자의 관심 및 활용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사곡마을과 진양하씨를 둘러싼 인물사, 사상사, 경제사 및 지역사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들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南冥 曺植은 詩 창작이 교만심을 일으키므로 수양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詩荒戒’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남명학파는 詩 창작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경향을 가졌다. 하지만 남명의 제자인 覺 齋 河沆은 이와 달리 詩 창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詩 작품이 뛰어나다 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하항이 추구한 道學과 그가 지은 詩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 글의 문제의식은 이 점에서 출발했으며, 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항이 지은 道學詩에 주목했다. 그 결과, 하항의 道學詩는 문학을 통해 그가 추구한 道學을 밝히고자 했으며, 그 효용은 자신의 修己뿐만 아니라 世敎와도 관련이 깊었다. 남명을 비롯한 남명학파의 학자들이 ‘詩荒戒’를 견지하여 作詩를 부정 적으로 인식한 것에 비해, 하항은 시를 통해 도학의 효용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의거할 때, 남명학파의 학맥에서 河沆 - 河受一 - 河弘度 등으로 이어진 유파가 구축한 문학에 대해 구명하는 작업이 후속 과제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더 나아가서 는 남명학이라는 큰 흐름 가운데 다양한 유파의 특성을 구분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승되어 나갔는지를 확인하는 연구들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 논문은 ‘南冥의 학맥을 자신의 從叔父인 覺齋 河沆으로부터 계승하여 謙齋 河弘度에게 傳授한 인물’로 평가받는 松亭 河受一(1553~1612) 의 필사본 문집 『松亭歲課 』를 고찰한 것이다. 하수일에 대한 연구는 이상필 교수와 전병철 교수에 의해 진행되었고, 두 선행연구자의 노력으로 송정의 생애와 학문, 시세계에 대한 주요 국면이 밝혀졌다. 다만 근래 『松亭集 』의 모본이 되는『송정세과 』가 발견되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송정 문학 연구를 새로이 해 볼 필요가 있음을 논하기 위해 우선 시세계만을 대상으로 고찰한 것이다. 고찰 결과 『송정세과 』를 통해 송정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작품 창작 연대를 정밀하게 고증하며, 윤문되기 전 작품의 원형을 복원하고, 覺齋 이후 晉陽 河氏의 남명학 계승 양상을 조명할 수 있음이 밝혀졌고, 아울러 지역사 연구와 송정 작품 세계의 새로운 면모 규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요 정보와 개성적인 작품을 싣고 있음이 밝혀졌다.
松臺 河璿(1583-?)은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세거한 晉陽河氏 判尹公派의 士人이다. 그의 조부는 喚醒齋 河洛(1530-1592) 이고, 從祖父는 覺齋 河沆(1538-1590)이며, 伯父는 松亭 河受一 (1553-1612)인데, 이들은 모두 南冥 曺植(1501-1572)의 高弟이다. 이로써 수곡의 진양하씨는 江右 지역 南冥淵源家를 대표하는 문중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경상북도 상주에 있던 조부와 부친이 함께 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당시 열 살이던 하선은 진주 수곡 으로 돌아와 일생 문중을 건사하고 계승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하였다. 이후 나라에서 조부와 부친의 죽음을 忠孝의 표상으로 추숭하여 旌閭 하였고, 이를 계기로 송대의 가문은 忠孝家로서의 위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선은 선현을 현양하고 후손에게 계승시켜 주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년에 『松亭集 』과 『覺齋集 』의 跋文을 쓰고, 문중의 世系를 정리했으며, 나아가 상주에 있던 조부와 부친의 묘소를 수곡으로 이장하고 白軒 李景奭(1595-1671)·東溟 鄭斗經(1597-1673) 등 당대 저명한 인물에게서 조부와 부친의 墓碣과 碑文을 받아냄으로써 문중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는 松臺家의 후손이 이후 수곡 진양하씨 문중의 일원으로 세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대표적 활동이었다. 또한 하선은 지방에 세거한 재야지식인이었으나 전란 이후 국가의 시책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고, 특히 전란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만큼 兵制의 폐단에 더욱 절실하였다. 효종 임금이 즉위한 후 재야인사에게 국정에 반영할 시책을 구하자, 하선은 5천여 자의 상소문을 지어 당시 만연하던 여러 폐단과 이를 해결한 구제책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 상소의 내용을 인정하여 公論으로 하선에게 主簿 벼슬을 하사하였는데, 이로써 하선의 士意識과 현실인식이 당대에도 인정받을 만큼 시의 적절한 것이었음을 확인하였다.
恩津林氏 가문은 16세기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儒林社會에서 家門의 聲價를 높였다. 瞻慕堂의 손자 林谷 林眞怤가 외조부 立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임곡은 三嘉로 옮겨와 활동하였는데, 鄭桐溪,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임곡은 慶尙右道 학자 가운데서는 문집의 양이 비교적 많은 편이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특히 그가 大君師傅에 제수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임곡 이후 이 가문의 학문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20세기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다. 임곡의 아들 虛齋 林如松과 反求堂 林如栢도 모두 家學의 전통을 계승하여 학문을 갖춘 인물이었다. 반구당은 龜溪書院 원장에 추대될 정도로 학문과 명망이 있었다. 구계서원 원장으로서 龜巖 李楨 의 弘揚과 龜溪書院 중건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허재와 반구당의 아들들도 학문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허재의 아들 述齋 林東遠, 反求堂의 아들 錦岡 林東茂, 梅軒 任東說, 潤叟 林東迪 등이 학문 활동을 크게 했다. 林谷의 손자 시대가 임곡 후손들의 학문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이고 유림의 推重도 가장 크게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집안 외적인 상황으로는 1623년 仁祖反正 이후 慶尙右道 지방의 南冥學派 침체와 西人들의 회유 등으로 경상우도의 학문 전체가 떨치지 못하던 시대가 계속되었고, 집안 내적으로는 가난과 단명 등으로 家運이 번창 하지 못하여 학문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도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는 오랜 기간 대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 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본고는 隱求型 지식인 임여송이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작품화하였던가 하는 문제를 살피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事上學’이 라는 관점을 설정하였다. 이것은 ‘생활 속에서 진리 찾기’를 의미하는 바, 灑掃應對나 起居動作 등 인간의 일상을 중시한다. 우리는 흔히 문학 사적 측면에서의 문제적 작가나 사상사적 측면에서의 주요 위상을 지닌 인물을 주목한다. 이러한 연구방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향촌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며 진리를 탐구해 왔고, 가족을 중시하며 생활에의 체험을 작품화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고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일상과 생활, 평범과 소박을 존중하며 작품 생활을 해 왔던 한 작가에 집중한 것이다. 임여송 문학의 주제는 수양론적 측면, 가족주의적 측면, 그리고 자연 인식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향촌에서 생활하면서 그 자신이 이를 가장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론적 측면에서는 居敬과 明誠, 그리고 愼獨 등의 개념을 내세우면서 적극 작품화하였고, 가족주의적 측면에서는 위로는 부모, 옆으로는 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그리고 산수 속에서 仁知나 歲寒之意 등 유가적 이상을 찾고자 하기도 하지만, 그의 자연관에는 무한한 자유와 자족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임여송 문학의 의의는 ‘지금-여기’에 대한 자각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생활 小事를 재발견하며 소재를 더욱 다양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사상학의 문학적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反求堂 林汝栢(1614~1685)의 시세계를 살펴보고, 그것이 그의 內省的 학적 지향과 反求의 정신에서 비롯했음을 확인하고자 서술되었다. 반구당은 17세기 중반을 살았던 영남의 지식인으로서, 時命 의 불운으로 폐거한 뒤 지역의 학인들과 교류하며 士人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삶의 행적은 『反求堂集 』(필사본)으로 수렴되어 전하며,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 논고는 그의 문집을 일견한 뒤에 적은 摘記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그의 시세계가 갖고 있는 특징을 중심으로, 그의 시적 논리를 추적하고자하였다. 반구당의 시를 살펴보면 두 가지 情調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偶吟’의 방식을 통하여 갈등하는 내면을 진솔하게 토로하고 있는 바, 우울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상황을 禍로까지 생각하는 마음과 그 안에서도 수긍하고 안온하게 여기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런 갈등은 ‘霖雨’를 대상으로 지은 시에서도 나란히 노출된다. 그러나 이런 갈등하는 마음은 독서를 통한 自警的 주체의 정립으로 시적 승화를 이룬다. 이는 그의 내적 성찰을 위주로 하는 反求의 정신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진다. 차후 이와 관련하여 반구당의 학술적 담론들에 대한 별도의 논구를 통해, 그의 17세기 조선지성사에서의 위치가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고는 林養正(1716-1777)의 문집인 『수분와집』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생애와 가학을 계승하고 실천한 양상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守分窩集』은 별도의 목차 없이 그의 지향을 밝힌 문장인 「守分窩 序」와 관련 기록 부분, 시편과 간찰을 모아놓은 부분, 家狀 관련 부분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양정은 남명학파의 학자였던 임진부(1586-1658)의 후손으로, 三嘉 지역의 학풍을 이끌어나가는 지역 명문가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여의었으나 평생 충과 효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가학 을 잇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이는 성현이 남긴 文義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이를 후학에게 자신이 터득한 문의를 정확히 전수 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아울러 가학의 전수는 임진부의『禮略』을 실천하여 誠禮의 정신을 체득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이를 실질적으로 적용시켜 선조의 가훈을 誠孝와 公正이라는 정신으로 확립시켰다. 임양정의『수분와집』은 남명학파의 한 지파인 임곡 임진부의 후손이 향촌의 명문가로 자리 잡으면서 선조의 가훈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시켰고 윤리규범으로 작용하였는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본고는 만사 제문을 통해 玉山堂 林柱翊(1741~1797)의 삶의 자취와 인맥기반을 살펴 본 것이다. 이 당시 강우지역 학자들이 출사의 길이 막혀 학문적으로 침체했던 만큼, 임주익 역시 출사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야의 지식인으로서 가학을 계승하며 합천 지역에서 후학 양성에 주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저술이 없어 그의 삶과 학문의 자세한 면모를 알기는 어려우며, 다만 문중에서 보관해 온『옥산당만제집』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망인을 위한 만사와 제문은 의례에 수반되므로 실용적 목적성이 강하고 관습적이며 상투적인 글쓰기로 흐를 여지가 많다. 또한, 한 명의 망인을 추모하는 만사와 제문들은 내용적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유사한 구조와 표현 방식으로 일정 부분 공통된 내용을 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들은 만사와 제문을 작품으로 두고 개성과 문학성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망인을 위한 집단 창작이라는 배경 위에서 그들이 일관되게 서술하고 인정하며 공감하는 내용은 그 자체가 객관성을 담보하는 사실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렇게 별도의 책으로 남아있는 만사와 제문의 경우 저술이 산실된 학자들의 삶의 실체에 접근해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살펴 본 결과, 옥산당 임주익은 합천의 은진임씨 가문에서 태어나, 석천 임득번 – 갈천 임훈과 첨모당 임운 – 임곡 임진부로 이어지는 선대 가학의 계보를 온전하게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더욱 독서와 학문에 매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평소 품었던 뜻대로 자연에 의탁해 은거의 시간을 보냈다. 은진임씨가가 대대로 孝友의 실천에 명성이 있었던 만큼 임주익 또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아우 매악당 임주석과도 남다른 우애를 자랑하였다. 외아들 임경이 딸만 두고 요절해서 여러모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으나, 달관한 듯 평소에 그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만사 제문을 쓴 사람들을 통해 임주익의 인맥 기반을 들여다보면, 당시 강우지역 학자들이 출사의 길이 막혀 학문적 침체를 겪던 터라 학문적으로 뚜렷한 구심점 없이 분산되어 사생 관계가 지역 단위 정도로 국한되어 나타났던 현실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임주익은 합천군 대병면에 세거해 온 안동 권씨·벽진이씨·남평문씨·밀양박씨 가문과 대대로 쌓아왔던 世誼를 바탕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고, 그들과 때로는 戚誼를 맺고 때로는 사생관계를 맺으며 그 인맥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글에서는 澗隱 林台煥(1874-1929)의 생애를 개괄하고, 그의 시대 인식과 學的 지향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임태환의 자필 원고 『睡語』를 활용하였다. 임태환은 林谷 林眞怤의 9대손으로, 그의 가계와 혼맥은 南冥學派的 경향이 강하다. 그는 三嘉 大田에서 遺腹子로 태어나, 백형 林宗煥의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인근에 있던 朴致馥·許愈·尹夏植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배웠고, 郭鍾錫·尹冑夏의 영향을 받았다. 33세 때부터는 다수의 종족들이 세거하던 安義 葛溪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문 에 교유 범위도 삼가·단성·합천·안의·거창 등지에 걸쳐 있었다. 또한 안의, 삼가 등지에서 강학 활동을 지속했는데, 특히 1919년 무렵 栗里書塾에서 20세 전후의 학생들에게 1년 남짓 四書와 『詩經』등을 지도하였다. 임태환은 儒學的 전통이 있는 가계에서 성장하여 당대의 名儒를 사사하였으며, 학생들을 교육한 내용도 전통 학문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망할 무렵 태어나 기존의 유학적 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일제강점기를 살았지만, 전통 학문을 고수하면서 유학이 부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강학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는 儒道의 扶持를 사명으로 여겼고, 유학의 핵심적 가치인 節義를 중시하였다. 특히 당시대의 郭鍾錫이 桐溪 鄭蘊(1569-1641)의 절의를 계승했다고 인식하였다.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걸었던 두 인물의 절의가 유학적 가치의 시대적 발현이라 여긴 것인데, 독립운동을 하던 族姪 林有棟의 절의를 높이 평가한 부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본고는 촉석루 제영시의 역사적 전개와 작품의 내적 특징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전통의 재인식과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시문의 총량 파악은 무엇보다 절실하며, 제영시에 반영된 다양한 주제의식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방대한 문헌을 두루 뒤져 촉석루 제영시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집성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층의 성격, 작품의 형식과 내용적 특성을 검토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촉석루 제영시의 작가는 710명, 작품 수는 884제 1,028수에 달했다. 이는 잠정적이기는 하나 현재까지 전국의 단일 누정으로서는 최다 수준이다. 그리고 작가는 경남 출신이 가장 많아 전체 49%를 넘고, 그중에서도 진주를 비롯해 서부 경남 출신이 약 87%를 차지했다. 또 작가는 유람객이 제일 많고, 고을 통치와 관련된 관리들의 작품도 적지 않았다. 작가들 중에는 스승과 제자, 혈연관계가 있는 문인들이 많은 점도 특징이다. 둘째, 창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은 893수로 전체 약 87%에 달했다. 이중 임진왜란 이전의 작품은 133수로 비교적 적은 분포를 보였다. 작품의 약 33%인 335수가 1900년 이후에 창작되었는데, 이는 19세기 후반 이후로 출생한 경남지역 문인들의 작품이 대거 양산된 결과였다. 셋째, 촉석루 시 중 7언시가 93%로 압도적인 비율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7언율시가 약 75%에 달해 대표적인 양식으로 향유되었음을 알았다. 이는 원운의 권위를 활용하는 제영시의 일반적 창작 경향에서 비롯 된 것으로, 선편을 잡은 정을보의 시는 조선전기까지만 원운으로서 기능했다. 조선후기에는 신유한의 시를 차운한 이가 40%일 정도로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다. 또한 임란 사적과 유관한 시어가 관습적으로 활용 되었는데, 이는 다른 누정시와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라 하겠다. 넷째, 촉석루 시의 주제는 진주의 문화경관에 대한 상찬, 임진왜란의 대응과 구국 의지, 순국 영웅의 기억과 내면 성찰, 유람의 진정성과 시대의식의 네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이후로는 순국 영웅을 호출해 내면을 성찰하거나 강개한 충의 정신을 주제로 내세우는 창작 경향이 지배했다. 이에 따라 빼어난 경관만을 부각하는 시는 자취를 거의 감추었고, 촉석루 유람이나 작시 행위를 올바른 시대의식을 체득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의 반민족적 유람 풍조를 시를 통해 준열히 비판하기도 했다. 촉석루 제영시를 대상으로 진행한 통시적이고도 실증적인 본 연구가 누정문학의 특성을 구명함은 물론 지역문학사를 다양하게 구성하고, 나아가 한국문학사를 기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