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安은 학문의 고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함안에 본격적으로 학자가 배출 되어 학문이 시작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이다. 高麗末 琴隱 趙悅과 茅隱 李 午의 咸安 정착이 咸安의 학문 興隆에 있어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각 성씨가 함안에 기반을 잡아 번성함으로 인하여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朝鮮 宣祖朝에 寒岡 鄭逑가 咸安郡守로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교육을 장 려하고 咸州誌를 편찬한 것이 함안의 학문 수준을 높이고, 학문의 저변을 확 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咸州誌를 통해서 그 당시 함안의 지식인들 에게 그 때까지의 함안 문화의 전모를 알게 하여 함안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 부심을 느껴, 앞으로 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만들었다. 仁祖反正으로 침체되기 시작한 咸安의 학문은, 澗松 趙任道의 노력으로 급격 한 쇠퇴를 막고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仁祖反正 이후에도 江右의 다른 고을과는 달리 학문이 단절되지는 않게 되었다. 澗松은 南冥學派와 退溪學派의 융합을 위해서 평생 노력한 학자인데, 간송의 노력으로 인해서 함안 지역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퇴계학파나 남명학파 두 학파의 장점을 골고루 섭취하 는 이점을 갖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함안에서 저명한 학자나 비중 있는 저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때 함안의 학자들은 書院 건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尊賢과 講學을 통해 서 학문적 전통을 이어나갔다. 咸安에서 스승으로 삼을 만한 대학자가 나오지 않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함안에서 학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慶尙左道나 畿湖地方으로 유 학을 가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어, 자연히 대부분의 선비들이 향촌의 小儒로 침 체됨을 면하기 어려웠다. 조선말기 性齋 許傳이 金海府使로 부임하여 관아에서 講學을 하자, 배움에 목 말랐던 함안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가르침을 들었다. 500여 명의 성재 문인 가운데서 90여 명이 함안 사람이고, 그 가운데서 문집을 남긴 문인만 해도 27명에 이르니, 함안의 학문은 성재의 敎導로 말미암아 완전히 중흥을 이루었 다고 말할 수 있다. 性齋의 문인들은 지금까지 간행하지 못했던 조상의 문집이나 實紀에 성재가 지은 序文을 얻어 간행하여 반포하고, 조상의 재실이나 정자에 성재가 지은 記 文을 붙이고, 조상의 산소에 성재가 지은 碑文을 얻어 새기는 등 先賢들의 學問 과 德行을 선양함으로 인하여, 묻혔던 함안의 학문이 단시일내에 다시 빛을 발 하게 되었다. 性齋의 문인 집단에서 좌장격인 晩醒은 性齋의 學統을 전수받아, 스승 性齋의 문집 간행과 성재를 享祀할 麗澤堂을 지어 성재의 학덕이 천추에 전할 수 있도 록 기반을 마련하여 敎恩에 보답하였다. 그는 또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기도 한 데, 近畿南人學派의 실학적인 학문과 정통 嶺南退溪學派의 성리학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함안의 학문 경향을 정통을 지키면서도 실용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했 고, 退溪와 南冥의 학문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1937년을 하한선으로 할 때, 咸安의 학자들에 의해서 지어진 文集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약 200여 종에 이르고, 專著는 30여 종 되는 것으로 파 악되었다. 이 정도로 풍성한 著述이 나온 것은 咸安이 學問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이들 저술 가운데는 아직 간행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고, 개중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간행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춘 것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함안 학자들의 저술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간행 보급하면, 함안에서 나온 文集과 專著를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본격적으 로 연구할 수 있게 되어, 함안의 역사와 문화가 새롭게 밝혀질 것이다. 특히 지 금까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온 朝鮮時代 咸安의 漢文學이 새롭게 조명되어 각 광을 받게 될 것이다.
晩醒 朴致馥은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 두 문하에서 수학하여 江右(慶尙右 道) 지역을 대표하는 퇴계학파의 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한주학파의 새로운 학설로부터 師門을 보위할 것을 자임하 였다. 한주와 만나 太極動靜의 문제를 토론하고 만성은 바로 그 이듬해인 무인 년에 太極動靜辨을 저술, 한주의 태극설을 반박하였다. 여기서 만성은 태극이 홀로 동정할 수 없고 반드시 음양이 함께 있어야 하니, 음양을 떠나서 태극의 동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氣를 떠나서 理를 말하면 理가 공허하 고 추상적인 것이 될 우려가 있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퇴계학파 전통의 心說인 合理氣說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성의 명덕설은 스승 정재의 설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주의 설을 반박한 것이 다. 만성의 명덕설에서 중요한 특징은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맑고 밝은 것도 명덕이요 맑혀서 다시 밝게 하는 것도 명덕’이라 하여 明明德까지 명덕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만성만의 매우 특이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工夫論의 차원에서 나온 견해로 이해된다. 태극설, 명덕설을 이어서 心說에서도 만성은 理와 氣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 하였으며, 특히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역시 理만으로 심을 정의한 한주의 心卽理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만성의 心說 전반을 관통하는 심의 主槪念은 시종 合理氣일 뿐이다. 즉 합리기를 근간으로 삼은 위에서 경우에 따 라 즉기·즉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심의 개념 자체를 달리 정의할 수 없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晩醒 朴致馥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에 영남 강우의 유학을 다시 일으킨 대표적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 재 류치명을 사사하여 전통적인 퇴계학파에 속하면서도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 상을 수용하였으며, 유학을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성재 허전의 학문에도 심취했다. 만성은 당시 국가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는 유교적 교훈을 따르지 않았던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유교적 정치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만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처방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華夷論’을 수용하여 오랑캐인 서구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조선 을 보호해야 하며, 조선은 ‘中華’로 상징되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의 옹호자여야 했다. ‘斥邪論’은 당시 집권층과 학파적 바탕을 같이하는 기호지역 유학자들의 지론이었는데, 만성을 통하여 영남의 유학자 가운데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성은 비록 조선후기 일반의 유학자들이 갖 는 세계인식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당시 조 선지성들의 사유세계와 그들이 안고 있던 위기의 본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慶尙右道에서 활발한 敎學 활동을 벌였던 晩醒 朴致馥은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의 학문을 계승하여 理學과 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이 논문에서는 만성의 문집에 수록된 그의 禮說을 禮本質論, 經禮 해석 관점, 變禮 조처의 경향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는 각종 變禮를 논함에 있어서 대체로 家禮에서 수립 된 典範을 준수하여 원칙에 입각한 조처를 강구하였다. 그는 예의 본질이 忠信 質素에 있다고 하여 소박한 인정의 진실성을 중시하였으며, 人情의 편안함을 전제로 하여 廬墓의 관습과 묘소가 없는 선조의 壇享과 影幀을 모시는 生辰祭 를 긍정하는 논리를 세웠다. 經禮의 해석에 있어서 桑主와 栗主의 차이를 喪과 慄의 의미로 해석한 것이나, 春秋左傳과 周禮에 근거하여 爲人後者에 대한 새 로운 해석을 제안한 것, 影幀과 神主의 의미를 生事와 死事의 도리로 구분한 것 등은 모두 그의 독특한 創見이다.
이 글은 만성이 그의 시에서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그의 어떠한 생각이 반영된 것인가를 살펴본 것이다. 만성은 그의 시에서 역사와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으려 애 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것은 그의 도문일치에 입각한 그의 문학관에 기 초하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도 문학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 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우 단편적이거나 편의적 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잡록 부분에서 잠간 언급하거나, 청탁에 의해 짓는 개인 의 문집 서와 발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매우 체계적으로 문 학론이나, 문론 혹은 시론이라는 글을 지어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문학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또 생각에만 머물고 그의 문학 세계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만성은 문학관에 대해 피력한 글이 많지는 않으나, 최장한・곽종석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문학관을 일목요연하게 사적 체계를 세워 정리한 것을 볼 수 있 으며,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많지 않은 시작품 속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올바른 인간에 대한 관심과 수양은 그의 몇 몇 잡저들 예를 들면, 「명덕 설」, 「위인론」, 「입지설」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그의 시 속에서 나란히 읊어진 한유한, 정여창 등 선현에 대한 그의 생각과 남명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당대의 어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읊은 시 등에서 발현되어 있다. 그가 매 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특히 납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과 이를 바탕 으로 지은 「납매설」은 그의 참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현시하려한 의도를 읽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인간이 속해 있던 그리고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에 관심 을 가지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역사를 회고하고, 또 시사를 걱정하고,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의 과거와 당대에 깊 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만성의 시문학에는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를 열어가는 당대의 바람직 한 인물들과 깊은 교유를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그의 과거와 과거의 인물 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만성이 바라보는 현실은 없어져야할 대상이 아니고, 보존하고 안존하 고 싶은 곳이다. 시사를 걱정하는 것도 현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걱정 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다 만 미래의 불안과 걱정이 있을 따름이다. 미래의 불안과 걱정은 바로 굴욕적이 고 처참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예측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과거는 현재를 보 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보는 거울인 것이다. 인물의 경우에도 사람을 평가하는 바람직한 기준이 무시되는 현실을 매화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인물들을 모색하였으며, 과거에서는 그러한 바람직인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던가를 인식하고, 현실의 인물들에 교우를 유지하였다.
朴致馥의 《大東續樂府》는 조선시대 사화를 수용하여 악부체시 형식을 빌어 쓴 영사악부로서 28편이나 되는 시 모두를 일컫는 시집 이름이다. 작가의 창작 동기는 《大東樂府》를 보고 조선 시대 역사가 빠져 있어서 이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동악부의 속편으로 조선 시대 사화를 중심 으로 지어진 것이다. 박치복의 《대동속악부》는 盧德奎의 《海東續樂府》와 내용이 같은데, 박치 복의 《대동속악부》가 원본이고 노덕규의 《해동속악부》는 박치복의 《대동 속악부》를 베낀 이본이다. 《대동속악부》는 조선시대의 王政, 烈行, 忠節, 學行, 孝行 등의 사화를 수용 하여 褒貶을 노래한 시로서 勸善懲惡의 교훈성을 지니며, 문학성과 역사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28편 모두를 1편 3수의 편법으로 구성하였으며, 장편의 서사성을 더하여, 일반 영사악부들이 지니는 문학성, 역사성, 교훈성을 뛰어 넘 는 특성을 지녔다. 특히 1편 3수의 편법과 장편 서사시로서의 구성과 표현은 우 리 나라는 물론 중국 고악부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이다. 이를 통해서 작가의 충만한 표현 욕구에 의한 다양한 표현의 추구, 서사시의 다양한 변모, 연작시의 새로운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대동속악부》는 중국의 악부에 대한 한국의 악부라는 개념이 바탕이 되어 서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노래를 중시한다는 작가의 역사의식에 의해 창작되었 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서민의 삶에 대한 긍정, 조선 건국의 위대성, 충신, 열 녀, 학자, 효자의 아름다운 행실을 후대에 전승하려는 역사의식도 함융되어 있 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지니게 된 밑바탕에는 박치복의 역사관과 衛正斥邪 사상 이 깔려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대표적인 글이 「斥洋邪論」이다. 《대동속악 부》에 나타난 악부시적 성격과 작가의 역사의식을 통해 나타난 양상은 한국악 부문학사는 물론 漢詩史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글은 19세기 江右地域의 대학자 晩醒 朴致馥의 남명학 계승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본고는 만성의 학문이 定齋 柳致明을 통한 퇴계학파의 학설을 수용한 점과 性齋 許傳를 통해 근기 남인계 星湖學의 實用主義를 수용 한 점에 주목하여, 만성이 이 두 학문을 겸함으로써 전통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 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致用의 학문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 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성향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이나 蘆沙 奇正鎭의 主理論이 전통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을 전개한 것과 다르다. 또한 양 자를 兼取하였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나 성호학파의 학문성향과도 변별된다. 그 리고 학문이 침체되었던 강우지역에서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학 술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논한 만성의 남명학 계승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만성의 南冥遺蹟 探訪과 追崇事業으로는, 山天齋・白雲洞 등 남명유적을 찾아 추모한 것과 산해정 중건 기문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南冥의 文廟從祀 를 위한 노력으로는, 만성이 1888년 疏頭가 되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들 수 있 다. 셋째, 만성은 許眉叟의 문집 記言에 남명을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答學 者書」를 삭제해 줄 것과 「德山碑」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南冥集 重刊을 위해 교감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넷째, 만성의 現實認識의 측면에서 본 南冥精 神 繼承으로는, 「上時弊疏」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민생구제정신이 남명의 상소 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섯째, 만성의 南冥에 대한 認識 및 論評으로 는, 남명을 소미성으로 상징되는 처사로만 보지 않고 傅說・富弼처럼 賢相名丞 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고, 남명의 학문을 程子・朱子를 계승한 正學으로 보았으며, ‘秋霜烈日 千仞壁立’으로 일컬어지는 남명의 기상에 대해 敬義學을 전제함으로써 伯夷와 다른 성향으로 재평가하였고, 山海亭의 山海에 대한 해석 을 통해 남명의 정신지향을 泰山보다 높고 瀛海보다 크다고 평했다.
구암 이정(1512-1571)은 1544년 그의 나이 33세 이후 퇴계를 사사하여 그 학문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학문을 이루려 하였음은 물론, 인근 고을에 거처 하던 남명과도 끊임없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고상한 정신 경계를 추앙하 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암의 「신명사부」는 남명의 「신 명사도명」과 명칭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 사상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암은 퇴계와 함께 남 명을 자신의 학문 표적으로 삼아, 평생을 성의와 집념으로 위기지학에 종사했 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주자학적 방법만으로도 성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래서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崇正學의 기치를 내걸어 이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 는 사람을 指斥하기에 이르렀다. 남명은 성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주자학적인 요소가 아닌 것이 학문 방법으로 원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는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이고, 남명은 자신에게 맞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 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구암이 학문의 표적을 퇴계에게도 두고 남명에게도 두었으나, 세상에서는 대 체로 구암의 학문이 퇴계를 이은 것으로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는 앞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암의 학문 표적을 퇴계에 게만 두고 남명과는 친분 관계 이상의 학문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는 구암의 학문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로 인해 남명학파 내에서도 구암의 위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구암을 한강이나 동강처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아우르는 노 력을 한 초기 인물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덕계가 퇴계・남명 양현 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한강과 동강을 이끌어 양현의 학문을 겸하도록 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듯이, 구암은 덕계나 한강・동강보다 먼저 양현 의 학문을 표적으로 하여 하나의 통합된 학문을 추구하였다고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遺逸은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문학의 작자층 가운데에서 학덕이나 재능을 지 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고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未入仕者를 말 한다. 士禍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로 은거한 이들은 현실 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심성수양을 통해 온전한 인격을 추구하 였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도학을 전파하는 등 경색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士 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중과 신망이 조 정에서 벼슬하는 관료보다 더 높아져, 조정에서는 이들을 예우하여 徵召하였다. 곧 遺逸은 출사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에서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碩儒들로 서, 우리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산수자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고, 은거지 주변의 명산과 절경을 유람하는 것으로 이를 표출하였다. 유람 에서 만나는 자연경물에 자신의 심정을 붙여 술회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 산 수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 조선조는 성리학 연구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 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산수자연은 당대의 不正한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은거지 중심의 유람에서 표출되는 산수자연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수양으로 승화시키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의 不 正 및 민생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역사유적지를 접하면 그 시대를 회고 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무엇보다 물러나 있지만 자아를 각성하고 심성수양에 진력했던 이들에게 산수자연은 士意識을 고취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곧 당대 관료세계에 피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 하고 물러났던 조선조 士人의 의식을 산수자연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大學類義』는 정조가 『대학』을 토대로 편찬한 군주 聖學의 교재로서 『聖學輯 要』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 『성학집요』 강독과 함께 抄出 작업 을 진행하였으며, 이것은 정조 5년 『聖學輯略』으로 완성되었다. 『성학집요』에 대한 이해는 『大學衍義補』로 확대되었고, 이것이 『대학유의』 편찬으로 귀결된 것이다. 『대학유의』의 편찬은 『大學衍義』와 『大學衍義補』의 내용을 초출하여 재편집 한 것이지만, 나아가 국왕의 입장에서 『大學』의 정신을 체득하고 스스로 聖學 교재를 편찬하려는 것이었다. 『대학연의』의 내용 중 「帝王爲學之本」에서 三代 이후 군주의 학문에 대한 3개 세목을 삭제하였는데, 이는 君師로 평가받는 삼대 의 군주만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治國・平天下의 구체 적인 통치술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는 삼대 군사의 이념도 구체적인 통치 과 정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대학』이 추구한 全體大用의 학문체계로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지향은 앞서 『성학집요』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이이는 『대학연의』의 시각을 계승하면서 통치 과정에 대한 내용을 수용하여 『대학』의 이념을 재구성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대학연의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담긴 통치술 을 대폭 수용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군주와 신료를 포함하는 보편 적 관점에서 효능을 말하고 군주에게 수신을 강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 는 『대학유의』를 통해 太平의 임무를 가진 국왕을 중심으로 놓고 여기에 신료 들의 보좌 역할을 규정함으로써 『성학집요』의 성학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이미 알려진 한고관외사의 일실된 작품들과 그 존재를 재검토한 것 이다. 그 결과는 첫째 이제까지 하버드대학 소장본과 장서각 소장본을 비교해 서 모두 8책 자료가 일실된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실제로 일실된 자료는 「이씨 서정록」[제4책], 「병진정사록」・「필원잡기」[제5책], 「필원잡기」・「소문쇄록」 [제6책] 및 「동각잡기」[제16책] 뿐임이 확인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현재 일실 된 자료 중, 「이씨서정록」은 총2권이므로 한고관외사권7,권8(제4책)에 수록 되었고 저자는 李蕆이며, 「병진정사록」은 총1권이므로 한고관외사권9(제5 책)에 수록되었고 저자는 李穆이며, 「소성기축록」은 李壽慶의 저작임을 밝혀내 게 되었다는 것이고, 셋째 일실여부와 관계없이한고관외사 개별 작품의 필사 연도를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료 수집면에서 완본을 찾으면 바로 기록하는 김려의 대단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 자료들을 초두에서 말미까지 그대로 보충해 넣음으로 써 한고관외사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제후문이 당색을 완전히 탈피하여 객관적인 측면에서 작성되었다는 의미는 아 니다. 정치적으로 그는 엄연히 노론학자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를 더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당색이 다르고 정치적 시각이 다름으로 해서 비판 의 대상은 삼았을지언정 결코 자료 폐기를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완본을 소개하려 애쓰고 거기에 비평문까지 수록하였음이 단순히 야사 수집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비판은 할지언정 왜곡하지 않는다는 기록자의 자세를 보여주며 실천한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에 한고관외사의 일실 자료를 바로 잡는 작업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이다.
鶴山樵談은 許筠(1569~1618)이 25세 되던 1593년 강릉에서 기록한 시화 집이다. 鶴山은 허균이 이 시화를 저술하던 시기에 머물렀던 愛日堂 북쪽에 있 는 靑鶴山이다. 학산초담 後記에서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蛟山 子라는 호를 처음 썼다. 허균은 아직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라 ‘청학산 나무꾼의 이야기’라는 정도로 겸손하게 책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한 학산초담 이본은 6종이다. 이인영의 장서인 淸芬 室文庫에도 학산초담이 소장되어 있었지만,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李仁榮 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던 1937년부터 고서를 수집했는데, 희귀본 540종의 해제를 작성하여 1944년에 淸芬室書目을 탈고하였다. 그가 소개한 학산초 담의 서지에 「寒皐館外史題後」를 인용 소개하였지만, 출전을 담정유고라고 밝힌 것을 보면 한고관외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10행 24자라는 필 사형식도 다르다. 현재 확인된 6종 가운데 규장각 소장본만 단행본이고, 다른 5종은 叢書에 실 려 있다. 가장 오래된 본은 이장재가 1790년에 편찬한 청구패설에 실려 있다. 패림이 일찍 영인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김려가 편찬한 한고관외사도 패림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총서이며, 패림은 한고관외사와 창가루외사를 저본 으로 해서 편찬했다. 패림에 실린 학산초담은 당연히 한고관외사를 베낀 것인데, 내용과 형태가 같을 뿐만 아니라 글자의 위치까지도 그대로 베꼈다. 그 러나 패림본에 빠진 구절들이 한고관외사본에는 온전하게 실려 있다. 한 고관외사본을 놓고 필사하는 과정에서 빠진 것이다. 대동패림본은 35칙만 필사되어 자료적 가치가 적으며, 장서각본도 청구패 설본이나 규장각본과 같은 내용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적다. 청구패설에 실린 학산초담이 가장 앞선 본이기는 하지만, 주석이 정연하 기로는 한고관외사본을 따를 수 없다. 欄上의 기록이 덧붙긴 했지만, 체제가 정연하지 않다. 현재 확인되는 이본만 놓고 본다면 夾注는 김려의 한고관외사 에 실린 학산초담에서 시작되었으니, 김려가 정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협주를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많은 이본을 확인한 뒤에야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 필사 습관에 따라 다르게 쓴 글자들은 선본 확정에 큰 문제가 아니다. 패림본이 한고관외사본을 충실하게 전사했지만 몇 군데 잘못된 부 분이 있어, 현재로서는 한고관외사본이 가장 선본이라고 판단된다.
역사적 事實에 기원을 두고 있는 王昭君 故事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 들에 의해 수없이 창작 소재가 되어 왔다. 元代 馬致遠의 「漢宮秋」는 장르를 불 문하고 王昭君을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經典的인 가치를 가진다. 따라 서 이후 敍事文學 특히 戱曲作品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漢宮秋」 이후 다양한 재창조가 이루어졌으나, 王昭君 素材는 시대의 변모에 따라 작가의 시대정신에 따라 항상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 발전되어 왔다는 점 이 특징이다. 이 중, 20세기에 와서 郭沫若과 曹禺에 의해 각각 창작된 同名 史 劇 「王昭君」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대표적인 예다. 「漢宮秋」는 元代의 첨예한 민족 모순을 바탕으로 망국의 한과 민족의 절개 등 이 표현된 작품이었다면, 郭沫若의 「王昭君」은 중국의 신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20년대를 배경으로 여성해방과 여권의식의 시대성이 반영된 작품 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1970년대 曹禺의 「王昭君」은 그 당시의 정치현실을 반영하여 ‘민족단결’을 강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조우의 작품은 당시 정치 지도자 周恩來의 ‘지시’에 의해 수동적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다 른 작품과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조우의 작품은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창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曹禺는 작품에서 ‘민족 단결’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기존 王昭君 형상 및 故事를 몇 가지 측면에서 變容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 다. 첫째, 王昭君의 出塞 동기를 자신의 정치 이상에 따라 自願하는 것으로 變 容하였다. 둘째, 元帝와 單于를 明君化하여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 셋째, 出塞 후 王昭君의 신분과 생활내용에 변화를 주고, 胡地에서의 생활 내용을 작 품의 절반 이상으로 안배하였다. 넷째, 和親 이후 漢과 匈奴간의 화목함을 구체 화하였다. 작품에 반영된 曹禺의 시대정신은 일면 타인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있기는 하 지만, 어쨌든 기존 작품에서 대부분 눈물 흘리며 가련한 모습을 보였던 王昭君 을 웃음 가득한 여성으로, 떠밀려 出塞하는 비극적 인물이 아닌 자신의 이상을 따라 용감하게 나아가는 여성 영웅으로 변화시켜, 20세기 다민족 국가 중국이 걸어야할 ‘민족단결’의 시대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였다.
명심보감의 사상가운데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이상적인 道德修養과 治國) 을 목표로 하는 儒敎思想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老莊思想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수기치인의 능력을 가지는 자에게는 착한 성품을 길러 天下에 좋은 바람직한 정치를 행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 는 각자 자신의 정도에 맞는 선행을 행하여 강한 인내로 자신의 작은 행복을 찾 고 구해야 한다는 「知足安分」을 논하고 있다. 후자는 人民이 정치・사회제도에 대해 그다지 불만 없이 선행을 행하여 자신의 분에 만족하기 위하여 安貧樂道 를 가져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명심보감의 권선의 최종목적은 모든 인간 이 「天」의 섭리를 기본으로 마음에 性善을 배양하고 선행을 통해 서로 용서하 고 존중하는 사회를 이룩함에 있다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명심보감의 전체상을 파악하려고 한 연구보다 는 천의 관념을 근거로 한 특정 사상만이 주목되어져 왔다. 그 결과 명심보감 이 단순한 서민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선서로서 규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명심보감이 태상감응편·공과격 등과 같이 단순한 俚俗 대 상만을 위한 권선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명심보감의 전편(원본 명 심보감본문의 제1 ‘계선편’에서 제20 ‘부행편’까지의 총 20편의 주요 내용)을 분석·정리 한 후, 명심보감의 주요 내용의 사상적 특징(天의 觀念.知足安分.五 倫의 道德)을 명확하게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