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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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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권 (2010년 6월) 13

1.
2010.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9세기 후반 이후 영남 우도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蘆沙學 派 문인들의 학문적 연원이 되는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 활동을 韓 末 畿湖學界의 동향과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다. 門戶 分立에 따른 학파 분화, 그리고 이에 따른 다양한 학문적 입장의 대두 속에서 기정진의 主理的 학문 경 향이 가지는 위상을 검토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반 기호학계의 논란이 되었 던 理 중심의 이기론과 호락논쟁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기정진은 호남을 중심으로 꾸준히 강학활동을 펼치면서 그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계의 학문 연원이 되는 栗谷 성리설에 대한 비 판적 입장을 제시하며 자신의 학설을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당시 기호학계의 최대 논란 대상이었던 호락논쟁에 대해 인성물성동이를 중심으로 비판적 지양 의 입장을 취하였다. 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성리설은 실천적 위정척사로 현실 화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학문관은 그의 문인에게 계승되어 호남과 영남 우도 지역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을 영 남 우도의 학계 지형에 유의하여 전반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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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노사학파가 19세기 후반 영남 서부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문인 정재규의 역할을 분석한 것이다. 노사 기정진은 1840년 대부터 서학을 배척하고 의리와 도덕의 확산을 꾀하였던 산림학자로서 중앙정 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850년대에는 영남의 노론학자들로부터 동방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받들어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기정진의 일족이나 문인들도 세도정치기와 대원군 집권기에 점차 중앙정계와 향촌사회 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세기 이래 영남 서부지역에서 당색의 대립이 약화되고 다른 당파나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둔 노사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영남 서부의 노사학파는 남인 출신도 있었었지만 대체로 노론 위주의 인 물들이었으며, 새롭게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려 는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방관과 협조하여 향 약 실시나 󰡔소학󰡕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강학활동에 힘써 영남 서부 지역에 많 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정여창과 조식을 숭앙하는 기풍이 강한 이곳에서 이들을 모신 서원이나 사우의 향례에 참여하거나 강회를 자주 개최하 여 진주와 하동․산청․합천․의령 일대의 영남지역에 노사학파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넓혀 나갔다. 이러한 영남지역에서의 노사학파의 성장은 특히 정재규의 노력에 힘입은 바 가 컸다. 정재규는 기정진 사후 적극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하여 영남지역 내 에서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동문이나 문인들과 자주 강회를 열어 성 리학과 예학을 강론함으로서 기정진의 주리론이 널리 보급되고 위정척사의 주 지가 훼손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또한 기정진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답문류편(答問類 編)󰡕을 편찬하였으며, 1901년 기정진의 문집을 목판본으로 중간했을 때에도 단 성의 신안정사에서 직접 일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문집 간행 이후 기정진의 논 설인 「외필(猥筆)」이나 「납량사의(納凉私議)」등에 대해 영남지역의 노론이나 송병선, 송병순, 전우 등이 이단으로 배격하였을 때, 정재규는 동문과 문인들에 게 기정진의 학설을 변호하게 하였으며, 본인도 직접 논서를 지어 기정진의 주 리론이 결코 주희나 이이의 학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재규는 영남지역에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일으켜 기정진의 위 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1881년 신사척사운동에 가담하고 1895년에 서부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개화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 에 항거하였다. 이어 그는 1905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민 심의 결집을 주장하고 의병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문인 들과 함께 190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충청도의 최익현과 전라도의 기우 만과 함께 각지에 포고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문인들을 유생들에게 파견하였다. 비록 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의병이 제대로 모이지 않은 상태 에서 실패하였지만 의리를 중시하는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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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載圭는 奇正鎭의 학문을 영남에 전한 학자이다. 기정진의 문집 간행과 추모 문자를 제작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그는 스승에 대한 비난에 대응하 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스승의 학설에 田愚의 비판이 있자 師說을 변호하면 서 자신의 성리학을 체계화한다. 지향해야 할 가치의 폭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主理의 논리로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성리학이 었는데, 理의 主宰·인물성동이론·本心論 등을 통해 주리의 논리를 전개한다. 정 재규의 성리학을 규명하는 본 연구는 그의 학설의 모태가 된 기정진의 성리학, 기정진의 학설에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 전우의 성리 이론을 먼저 살핀다. 이를 바탕으로 정재규 성리학의 역할과 성격을 이해하여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정진 과 정재규의 주리론과 전우의 주기론이 갖는 학술적 의미를 조명해 보았다. 그 결과 정재규의 성리학은 한말 주리론의 삼대가인 기정진, 李恒老, 李震相의 학 문과 정신적으로 상통하는 것이었고, 또한 율곡학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주기론의 장점을 버리지 않고 주리의 학문과 결합시킨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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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鄭載圭(1843-1911)의 학문정신과 󰡔대학󰡕 해석에 대해 살펴본 것으 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재규는 인륜이 무너져 금수의 세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守正主義를 강조했고 衛正斥邪를 부르짖었다. 그는 도 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守死善道意識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를 보전 하기 위해 讀書種子를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재규의 학문방법은 독 서를 통한 지식을 실생활에서 체찰하는 隨事省察과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 는 反身踐實로 요약된다. 이는 分殊 속에서 理를 구현하려 한 주리론적 사유를 반영한 것이다. 정재규의 󰡔대학󰡕 해석 기본관점은 ‘新民도 明德 속의 일’로 보는 명명덕에 치 중한 해석과 팔조목 가운데 反身踐實에 해당하는 修身에 치중한 해석이다. 해 석의 주요 특징으로는, 1)反身踐實의 관점에서 誠意를 󰡔대학󰡕의 골자로 본 점, 2)「大學章句序」의 分節이 선유들의 설과 다르며 性․敎에 중점을 두어 성인의 가 르침을 따라 본성을 회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 본 것, 3)明德을 ‘天之明命’과 연관시켜 理로 보고, 心合理氣를 전제로 하되 心은 氣之精爽, 明德은 心之无妄 으로 보아 理主氣資의 입장에서 心 속에서 眞實无妄한 본체를 명덕으로 본 것, 4) 正心을 全體主宰處에서 照管하는 것으로 보아 장구의 ‘敬以直之’에 천착해 體까 지 말한 것으로 보는 설을 따르지 않고, 用의 측면만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정재규의 󰡔대학󰡕은 해석을 경학사적 시각에서 보면, 주리론적 관점에서 明德 를 理로 보아 이에 치중해 해석한 것과 反身踐實의 관점에서 성의․정심에 치중 한 해석을 하면서 齊家 이하를 수신의 實事로 본 것이 시대적 변화에 대처한 그 의 새로운 해석성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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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한말의 혼란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1843 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 육리 묵동에서 태어나, 개화기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 에서 일생 실추된 전통유학의 도를 회복하고 확립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22세 때 전라도 장성의 노사 기정진(1798-1879)에게 수학하였고, 쇠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명학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강우지역에 노사학을 확립 한 핵심 인물이었다. 정재규는 19세기 중반 이후 강우지역에서 일었던 학맥의 융합 분위기에도 아랑 곳 않고, 기정진을 집지한 이후부터 일관되게 노사학에 매진하였다. 인근 타 학맥의 학자들과의 친밀한 교유, 치열한 논쟁 등을 통해 그들의 학설을 접하고 수용하면서도, 강우지역에서 일어나는 여타의 강회나 인 근 명승으로의 유람 등을 통해 학문적 결속력을 심화시킨 것 등은 모두 노사학 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생 강우지역에서 스승의 학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일생 전통유학의 도를 扶持하고 이를 통해 난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 백헌의 정신은 사후 그 문인들의 학문 활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정 재규의 이러한 삶과 학문 활동이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대처방식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당시 종래의 전통유학을 고수해 오던 노백헌이 택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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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鄭載圭(老柏軒, 1843-1911) 시세계에 나타난 학문정신을 탐구하 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 남 기호학파의 문학세계, 그 일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규의 삶과 문학에 저류하고 있는 것은 강한 호학정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활동은 모두 여기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다. 정재규의 시세계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학문적 연대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창작활동은 학문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학문 내용은 그 중심에 율곡학이 있었고, 그 주변에 남명학과 퇴계학 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기호학에 연원을 두면서도 영남학으로 열려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성리학적 이념과 굳건히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문학과 성리학이 일체를 이루며 작품군을 형 성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이념적 인식과 그것의 시적 형상은 정재규의 시작 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념성으로 편향되어 있 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례없는 위난의 시대를 맞아 위기의식에 입각하여 작품 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복령과 단발령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경 험하면서 明末 절의를 지키며 죽어간 중국 선비들을 시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위정척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정재규 시세계의 의미구조는 단순하지가 않다. 호학정신에 바탕하여 학문적 연대를 통해 작시활동을 전개하면서 선현의 도학을 계승하고자 했고, 또한 다 양한 사물에서 이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관념으로 흐를 수 있다 는 자각 하에 당대를 극도의 위기적 현실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 고자 했다. 그러나 정재규의 시는 실천정신과 결합되어 있다기 보다 성리학적 이념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 우세하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전통적인 세 계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 성리학을 묵수하면서 현실대응을 시도한 당연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의 시세계에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 러나 하나의 특징과 한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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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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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무진봉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조식의 사회변혁론을 정리해 봄으 로써, 실천적 유학자로 지칭되는 조식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무진봉사」에 나타난 조식의 사회 변혁론은 한마디로 군왕의 도덕적인 인격의 완성을 토대로 한 ‘덕치’를 핵심으 로 하고 있다. 군왕의 도덕적 인격완성은 인재의 등용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문 제의 해결 등 모든 정치의 출발점이자 토대이다. 즉 인재를 등용하는 것도, 관 리들의 비리를 척결하는 것도, 그 밖의 모든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열 쇠는 바로 군왕의 수신에 있고, 군왕의 수신에서 시작한다. 이와 같은 덕치를 통한 조식의 사회변혁론은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이상적이 라는 측면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훈척정치의 폐단이 문제가 되었던 당시, 제 도와 그것을 제대로 지키려는 인간의지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작용을 할 수 있 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민주적 절차가 점차 형 식화 될수록 인간성의 실현으로부터 멀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형식화된 민주적 절차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주목될 수 있다. 또한 덕치의 이상은 현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척도로 작용함으로써 이미 충분한 의미를 가 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식의 이러한 덕치는 관학파에서 훈구파로 이어 진 역사의 전개과정을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토대로 하지 않고, 단지 법과 제도 에 의지한 정치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단면적인 추구가 결국은 정 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들을 생성시켰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제기되었다고 이 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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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상필 교수가 200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기 간본들과 관련하여 김윤수 씨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필자를 비판한 데 대 한 응답이다. 이 교수는 문경호의 기유본 발문 중에서 “순찰사 유영순 또한 공 역을 도왔다.”는 한 구절을 鐵案으로 삼아, 이 구절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필자 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논거인 까닭에 필자는 남명학파의 초 기 역사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에서도 경상감사가 서원의 일에 관여했다는 기록 은 모두 󰡔道先生案󰡕과 어긋남을 증거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적 이 이 교수의 주장에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가 「덕천서원중건기」의 기록 을 왜곡하고 「신산서원기」 중 해당 부분의 贗作說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무리 를 범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남명집󰡕의 초간본이 임인년에 간행되었음은 기유본 발문에 명기되어져 있 으며, 󰡔고대일록󰡕 속에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임인 전해인 신축년 (1601) 조에 ‘留寺看役’ 등 해인사에서의 간행 작업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는 점 이 그것이다. ‘看役’ 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은 이후의 󰡔고대일록󰡕에도 많이 보이 고 있는데, 그것들에서도 이 용어는 타인이 하는 작업을 감독한다는 의미로 쓰이 고 있으며, 정경운은 벗들이 모두 귀가한 후에 혼자 해인사에 남아 이러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판각이 아닌 편집 작업의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다. 필자의 󰡔남명집󰡕 판본 연구도 이제 완결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차제에 전체 판본 계통과 판본명에 대한 그 동안의 성과를 정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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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의 17세기 말엽의 혁신적 사상가였던 顔元의 개혁사상을 학문 론과 교육론을 위주로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안원의 사상에 대한 그 러한 논의는 이후에 전개할 남명 사상과의 본격적인 비교 논의를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안원은 초기에 朱子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윽고 생명을 잃을 뻔한 실존 적 체험을 겪고 난 뒤에 품은 의문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행하게 된다. 이후 그는 주자학 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행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이 현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실제적인 공헌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들의 사유가 주자학적 인성론에 얽매여 있음을 깨닫고서 이를 비판하여 새로운 인간 개념을 공식화하 기에 노력하였다. 그러한 그의 인성론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실천 지향적 특성 은 이후 그의 사상이 후대에 나타나는 實學 사상의 한 선구적 존재가 되게끔 하 였다. 안원은 우주를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보고 인간도 본질적으로 선악을 벗 어난 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인간성을 자아실현의 진정한 도구로서 낙관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보았던 그의 관점은 이윽고 학문과 수양의 과정에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는 학문과 수양의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길 은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제시하는 三事와 三物, 특히 六藝의 학문을 習行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習行의 방법론은 끊임없이 현실적 과제나 구체적 사물과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학습과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주자학 체계 가 지니는 개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과 뚜렷하게 대립하였다. 이렇듯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세계를 중시하는 안원 사상의 특징은 格物致知 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그는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 실제로 그 일을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서 그 행위의 대상이 곧 六藝라고 해 석한다. 이러한 해석의 전환을 행함으로써 그는 학문과 수양의 주체를 수동적 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해방시켜 현실의 경험 세계 속에서 대상 사물과의 동적인 관계를 맺는 주체적 자아로 바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안원이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진정한 목 적을 轉世之人,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데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이 론의 당연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안원의 사상적 탐구는 자아 수 양의 정신적 역량을 어떻게 하면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는 세계 형성을 위한 사 회정치적 힘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 향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현실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안원의 사상을 그보다 앞선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 사상이었던 남명 조식의 사상과 비교의 관 점에서 논의해 보는 것은 남명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동아시 아 유학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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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각 계층의 사람들이 지리산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해왔 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여러 고을에 걸쳐 너르게 퍼져 있고 매우 靈驗하다고 알 려져 있었다. 신라 때부터 국가에서 중요시해왔던 지리산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산천제 정비에 따라 산신의 封爵이 제거되고, 전라도 남원에 神祠를 세워서 제 사지내게 되었다. 지리산 산신신앙에는 불교․도교 등 여러 신앙이 복합되어 있 었다. 지리산에는 聖母祠 이외에 여러 신당들이 세워졌고, 봄과 가을마다 삼남지역 의 무당과 일반 민중에 의한 기도가 성행하였다. 또 지리산은 골이 깊고 여러 가지 작물들이 풍성하여, 생계가 어려운 사람, 도망자들이 이곳을 찾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불교 억압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새롭게 들 어섰다. 이런 사찰 중에는 지리산 신을 위한 신당을 세운 곳이 많았다. 불교계 에서는 聖母天王이나 이외의 상징물에 대해서도 불교와 관련시켜서 지리산에 서의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儒者들은 지리산 신에 대한 별도의 敬拜는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었고, 무 당이나 불교계의 지리산 제례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리산을 찾은 것은 경치를 즐기고 문학적 호기를 기르거나, 속세에서 찌들렸던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일반 민중과 무당, 불교계, 유자층들이 지리산을 인식하고 이용하는 입장은 서로 달랐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계층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도 없 지 않았다. 게다가 지리산의 승려․무당이나 골짜기 깊숙한 곳에 사는 민간인에 게는 일찍부터 관의 침탈이 가해져서,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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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조 문인들의 지리산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를 고찰하였다. 조 선시대 유산시는 대체로 몇 가지 투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대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산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여, 그 중요성을 부각시 키는 것. 둘째, 지리산에 대한 敬畏心을 담아내는 것. 셋째, 지리산에서 浩然之 氣를 기르고 발산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 넷째, 지리산을 仙界나 理想鄕의 소 재처로 보아 憧憬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 다섯째, 지리산과 연관이 있는 인물 을 연상하면서 尙友千古의 자세를 보이는 것. 여섯째, 지리산 등산을 修己, 또는 학문 연마의 비유로 삼는 것. 유산시에 나타난 이런 투식은 곧 지리산에 대한 인식의 유형을 의미하며, 이것은 오랜 기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唐詩 風의 서정적인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고, 보다 현실적인 사고를 담아내기도 하 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自尊感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시 국 변화에 따라 國運을 염려하는 마음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문인들의 사고가 근대화 되어가는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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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한자의 해서체는 오랜 기간 동안의 규범화과정 을 거쳐 정리된 것이기는 하나, 그 학습과 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개별 자소의 변이형태가 워낙 많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자는 隸變 이후 자형 자체의 象意性은 어쩔 수없이 훼손 되어 개별 자소들이 符號化되긴 하였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義符 혹은 音符로 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사용위치 혹은 결합대상이나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자의 학습 및 운용과정에서 봉착하게 되는 난제들 가운데 해결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문제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본고는 필자가 그간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진행해 온 일련의 자소 관련 작업 중의 하나로, 고문자 계통에서의 특정한 자소의 자형이 예서를 거쳐 해서체 자형으로 정착하는 과정 에서 두 개 이상의 자형으로 나타나는 경우 혹은 생략된 경우의 자소들을 대상 으로 하여, 그 변이형태를 분석·정리하여 그 규율을 모색하는데 일차적인 목적 이 있다. 본고에서는 필획화 과정에서의 자소 변이형태를 그 유형별로 정리하여 크게 省略·異化·同化 등의 세 가지로 귀납시켰으며, 생략과 이화는 대개 개별자소 자 체의 결구간화·混淆로 인한 訛變 또는 자소끼리의 粘合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 이었고, 동화는 생략과 이화의 결과로서 발생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유형을 세 분하여, ‘생략’은 ‘개별자소의 생략 또는 개별자소의 일부분 생략’과 ‘중첩자소 의 생략’ 두 부분으로 나누고, ‘이화’는 ‘개별자소의 단순변이’·‘자소끼리의 점합 으로 인한 변이’·‘자소의 결합위치에 따른 변이’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 그 例字 들을 제시하였으며, ‘동화’는 다시 ‘기존의 특정자형으로 類化’되는 경우와 ‘예 변 이후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자형으로 나타나는 동형화’ 등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