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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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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9권 (2016년 3월) 10

1.
2016.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하학론(下學論)’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당대 퇴계 등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하학 (下學)’을 강조했다. 그는 하학이 유학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측 면에서 하학을 경시했던 당시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 의 ‘하학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유학에 있어 하학이 가지는 위치를 먼저 검토했다. ‘하학’은 유학을 도가나 불가 등 다른 사상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선진 유학에서부터 이어져온 중요한 전통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의 본질은 하학에 있다고 보았으며, 하학(下學)의 대상인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 았다. 유학자들은 세속에서 상달하고 도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속에서 상 달의 성스러움을 실현하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는 상달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유학과 비슷하지만, 하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학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학은 정치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학은 유학자를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며, 하학의 세계에 대한 걱정 은 바로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학의 하학전통을 잘 이해한 사람이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이다. 남명 에게 ‘하학’은 단순한 공부상의 절차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의 사상에 있어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명에게 현실을 떠난 학 문은 실(實)이 아닌 헛됨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유학의 경세(經世)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남명사상의 특징 중 하나인 실천성과 경세성 등을 이런 ‘유학의 하학전통’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남명의 하학론을 단순한 학 문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유학의 주요한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사상(敬義思想)이나 출처관(出處觀) 등 남명의 주요 사상에 있어서도 그의 하학론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고, 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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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7세기 南冥 曺植의 문인으로 진주 지역에 살았던 처사 成汝信 (1546-1632)이 만년에 지리산 천왕봉을 유람하고 쓴 「遊頭流山詩」를 분석하 여 정신세계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성여신은 젊어서부터 경세적 포부와 문학적 성취를 견지하였는데, 문학은 당 송고문 가운데서도 특히 韓愈와 歐陽脩를 전범으로 하여 雅正平淡한 문장을 추 구하였다. 그러나 잇따라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중년을 훌 쩍 넘긴 뒤, 60세가 넘어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해 불우한 處士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 때 영창대 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불화가 극대화되어 이를 해 소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는 방편으로 1616년 선계 유람에 몰입하였다. 또한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자신의 포부를 완전히 접게 되자, 78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정신적 지향처로 삼았던 천왕봉에 올랐다. 조선시대 士人들의 지리산 유산기를 보면, 대체로 천왕봉에 올라 登泰山而小天下의 의식을 맛보거나, 청학동을 찾아 俗塵을 蕩滌하며 仙遊를 하는 것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성여신의 「유두류산시」에는 천왕봉에 올라 등태산이소천하 를 지향하는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불우한 처사로서의 思美人, 유자로 서의 현실주의정신, 탈속적 淸新灑落의 興趣, 安貧樂道와 逍遙放曠의 志趣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을 통해 성여신이 천왕봉에 오른 이유를 추론해 보면, 불우한 처사로서의 정신적 지향을 다짐하기 위한 유람이었다고 하겠다. 성여신의 1616년 쌍계사 방면 유람은 仙趣的 傾向에 몰입하는 성향을 보인 다. 그런데 1623년 천왕봉 유람은 선취적 경향보다는 불우한 처사로서의 정신 적 지향을 더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지향은 安貧樂道와 逍遙放曠의 志 趣로 귀결된다. 이런 점에서 성여신이 1616년 쌍계사 방면을 유람하고 지은 「方丈山仙遊日記」에는 극대화된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선계를 유람하며 仙趣 에 빠져드는 儒仙的 仙趣가 두드러진 반면, 1623년에 천왕봉을 유람하고 지은 「遊頭流山詩」에는 불우한 처사로서의 안빈낙도와 소요방광의 지취를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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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忘憂堂 郭再祐의 한시에 드러난 망우당의 선속에 대한 관념을 조명해 본 것이다. 망우당은 우리에게 임진왜란 때 紅衣將軍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대한 세상의 논의는 의외로 신선과 관련된 것이 많다.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일과 세상을 등지고 속 세를 떠나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일은 매우 다른 선상에 놓여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적어도 망우당의 한시를 보면 이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선과 속을 넘나드는 그의 한시세계와 그 선과 속을 매개 하는 절의를 통하여서, 그것들이 과연 어떠한 관계에서 그의 일생에 어떠한 역 할을 하였던가 하는 것을 드러내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망우당의 한시에서 仙과 俗, 그리고 節義는 서로가 서로를 극복하는 하나의 명제가 되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를 해나갈 때 어려움에 부딪히면 그것을 해결 하는 원동력으로 다른 하나를 구하였다. 그래서 선과 속이 상반되면서도 하나 가 되고, 속에서 절의를 추구하다가 절의를 버리고 신선세계로 나갔다가 다시 절의를 위하여 속세로 나아오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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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강희맹의 함양시절 시작활동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 보는 데 있다. 현전하는 문집에 가운데 17권 4책으로 이루어진 甲辰字본 사숙 재집에 이 시기의 시가 실려 있다. 강희맹은 양부 강순덕의 상을 당해 벼슬에 서 물러난 51세 전후의 2, 3년간 함양에 머물렀다. 짧은 시기였으나 이곳에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당시 함양군수로 부임해 있던 김종직과의 교유이다. 어릴 때 교분이 있었던 이들은, 강희맹이 함양에 있는 동안 자주 오가면서 친분 을 나누었다. 중앙 관계를 떠나있는 문인관료로서의 공감대 위에 창화시가 오 가고 시의 영역은 주변 생활을 읊는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의 창화는 함양 시절을 관통해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둘째는 함양의 경물과 소소한 전원생활의 경험이 시적 영감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약초를 캐면서 농사를 연구하던 강희맹은, 생활 속에 보 이는 가축과 식물을 시재의 하나로 활용하였고 그림으로도 그려냈다. 강희맹에게 있어 함양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지냈던 경기지역의 전원과 다른 차원에서 온전히 농사 현장을 향유하면서 시를 창작하는 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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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 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 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 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 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 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 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 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 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 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 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 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 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 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 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 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 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 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 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 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 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 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 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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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선진 유가 사상을 정치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분석 함으로써 그것의 공사문제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家와 國의 영역 문제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다음 으로, 그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단순히 인간의 본성 문제로 설명되는지, 만약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 해명 되지 않는 부분이 도덕 감정과 공동선의 상호작용임을 밝힘으로써 선진 유교의 공사관을 그림을 그려낼 것이다. 유교가 감정윤리라는 점에서 이모티비즘과 어 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차별성을 통해 유교의 감정윤리가 어떻게 공공성을 획 득할 수 있는지 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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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수용에 따른 토속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에 의 해 연구되어 왔지만, 山寺의 확산으로 인한 보살주처신앙의 성립 및 그 연관성 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산지 사찰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토속적 산신신앙과의 갈등 및 극복, 그 리고 통일 이후 화엄 신앙의 정착과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보살주처신앙이 우리 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 불교신앙이 대중화됨에 따라 왕경 근처의 평지에 사 찰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山地에도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 현상은 지방으로 까지 번져갔다. 그 과정에서 山寺의 승려와 토속의 산신 숭배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의 양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체로 불교신앙이 산신신앙을 압도하였고, 산은 불교신앙 공간으로 탈바꿈해갔다. 통일 이후에도 왕실에 의한 山神祭는 계속되었고, 전국의 名山을 三山‧五岳‧二十四山으로 나누어 大祀‧中祀‧小祀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가 불 교신앙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名山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불교의 기도처를 전국에 확대하였다. 이는 왕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신라불국토 의 염원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화엄신앙의 한 형태인 보살주처신앙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의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에 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 고 그러한 염원이 더욱 확대되면서 산에는 磨崖佛이 새겨지고 새로운 불교설화 가 만들어졌으며, 더 많은 산에 사찰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월 이 흐르면서 산 이름이 사찰명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사찰명이 산 이름으로 바 뀌기도 하면서 산에 불교적 신비성이 가미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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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개청(鄭介淸, 1529~1590)은 호남의 대표적인 화담학파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화담학파의 특징인 기 본체론(本體論)과, 선후천론 등이 그의 저 작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사상이 특정한 스승을 통해 확립된 것이 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독서와 탐구를 통해 얻어진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기의 관계에서 이가 기를 주재한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서 기의 역할에 보다 더 주목한다. 만물의 생성과정에서 기의 차 이에 의해 만물 간의 차이가 발생하며 인간의 운명과 선악 또한 전적으로 기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가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스스 로의 노력을 통해 주어진 기질을 변화시켜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는 존 재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기질 변화를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며 정개청은 기질변화를 강조한다. 정개청은 기질변화론에서 내면의 수양에 힘써 외부 사물에 대한 단속을 소홀 히 하는 무내유외(務內遺外)의 수양을 비판한다. 이와 같은 정개청의 수양론은 경의(敬義)를 함께 실천하는 전통적인 수양론을 계승한 것이지만 구체적인 예 의 실천에 수양의 핵심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정개청은 「동한절의론(東漢節義論)」이라는 글이 빌미가 되어 정철에게 죽 음을 당하였다. 이 글은 정철 같은 당시의 학자들이 중국 동한(東漢) 시대의 학 자들처럼 절의(節義)와 같은 이상적인 덕목만을 숭상하고 일상의 행동은 멋대 로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정개청이 「동한절의론」을 쓴 배경에 대해서 여 러 논란이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그것이 정개청의 기질변화론에 기반한 것이었 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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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고지도는 당시의 자연인식, 문화와 경제, 정치‧행정과 국방, 지명 및 지리정보 등을 총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경관텍스트이다. 이 글은 남해안 및 진주를 사례로 조선후기의 지도상에 재현된 지역경관에 관해 역사지리적인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고지도를 지리정보의 사실적 표현 및 시간단 면의 누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관계의 재현물이자 해석적 텍스트로 까지 포 괄적인 스케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관이 주도하여 제작한 조선 시대의 고지도는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왕조의 정치사회적 통치 질서를 구현, 강화하는 목적과 기능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의 남해안 지도 에는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사회경제적인 비중이 시대적으로 달리 반영되어 있 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남해안이 갖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경제적인 비중의 증대로 지도 표현이 정밀해지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국토공간적 중요성 에 대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적인 인식이 달라진데 연유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진주 지도에는 위계적 산수체계의 인식, 중앙집권적 통치체계의 구현, 행정중 심지적 도로체계의 형태, 이데올로기적 교육종교경관이 재현되어 있다. 현존하 는 진주의 고지도는 대체로 18세기와 19세기에 제작되었는데, 특히 진주성도 및 군현지도첩의 지도는 지역경관의 복원 자료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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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 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 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본고는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 업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가 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로 도 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 서 드러난다.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남자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장릉 참봉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느리 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 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지만, 이 무렵 소실은 병 이 들어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 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고향에 머 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