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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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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41권 (2014년 3월) 6

1.
2014.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에는 당파적 성향이 강하다. 전란이 일어나기 9년 전 (1583)에 栗谷 李珥가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 1590-91년 通信使 일행의 보고 가 正使, 副使 간에 서로 달랐던 것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두 가지는 이 시 대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데도 객관적 분석, 판단보다도 분쟁 적 측면이 필요이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心性 도야를 중시하는 性理學者들이었다. 따라서 공과 사를 분명히 가리고, 강한 是非之心 을 가졌다. 조정에 나아와서는 聖聰, 곧 군주의 옳은 판단을 이끄는 데 기여하 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정사를 논할 때 자신의 견해를 엄정하게 표현하는 한편, 동료의 진언에 잘못이 보이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논척하였다. 그러나 상대 의 논변이 설득력이 있거나 실제의 사세에서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을 발견 하면 이를 인정하기를 미덕으로 삼았다. 10만 양병설이나 통신사 보고 건에 관 한 오늘날의 대척적 인식은 사실은 당대 관련자들 사이의 인식보다도 더 과장 된 면이 없지 않다. 이 글은 당대의 관련 기록에 근거하여 후대의 부정적 윤색을 걷어내어 바른 지식과 인식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栗谷 李珥의 10 만 양병제안, 鶴峰 金誠一의 의병 招諭의 역할, 西厓 柳成龍의 관군 재건의 공 로를 주요 논제로 한다.
2.
2014.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慶尙右道 義兵 봉기의 배경, 金誠一이 작성한 招諭文의 역사적 특징, 招諭 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기여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고찰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初戰의 무력한 패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한 경상도 지역 민 심 이반의 근본적 원인은 수령들의 무능과 비겁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 이 전 적극적 군비 확충을 시도한 중앙 朝廷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초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진 재 지 사족층(在地士族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었던 것 은, 조정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경상도 재지 사족층의 잠재력에는 그 들이 불법으로 탈점한 토지, 노비로 위장하여 거느린 농민, 마땅히 수행해야 할 軍役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 사족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것들은 임진왜란 敗因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軍政 문란을 포함한 失政 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김성일의 초유문은 지역민을 결집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초유의 대상인 경상도 지역의 士와 民을 가장 적절하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階序的 신분 구조와 華夷觀과 같은 당대인들의 특징적인 心性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유문은 크게 보아 義理와 利害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역민을 설득하고 자 하였다. 셋째, 중앙 조정은 안동 출신의 명망 있는 前職 高官이자 南冥學派와 긴밀 한 유대가 있는 김성일에게 招諭使의 職名을 제수하여 경상우도에 파견하였 다. 김성일은 의병의 봉기를 장려·보장함으로써 武裝 起義할 경우 반란 세력 으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재지 사족의 우려를 拂拭시켰고, 도주·관망 상태 에 있던 지방관과 지역민을 결집하여 저항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 였다. 나아가,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던 관 군과 의병의 충돌을 적절히 타협·조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의 봉기는 지역 의 방어뿐만 아니라, 이반된 민심을 돌이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본군의 宣撫 공작과 원활한 현지 조달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갖는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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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성일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초유사 또는 경상우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고, 그것이 임진왜란의 극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김성일은 전형적인 퇴계학파 계열의 학자·관료였지만 인간적 성향 및 기 질에 있어 조식 및 남명학파와의 친연성이 컸고, 최영경의 신원운동을 주도 하는 과정에서는 강우 남명학파권 인사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김면·곽재우·정인홍 등 남명문인이 중심이 된 의병조직을 원만하게 지휘·조율하며 전란에 대응했고, 그 결과로서 호남 을 수호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김성일은 수십년 관료 생활의 과정에서 형성되어 있었던 조정 관료 들과의 인적 연계망을 최대한 활용하며 직무를 수행해 나갔다. 류성룡·김우 옹·유근·김응남 등 주로 동인계 중진 관료에 집중되어 있었던 관료적 네트워 크는 군량의 조달 및 확충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결국 김성일은 남명학파와 의 사적(私的) 네트워크와 재조 관료들과의 공적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며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가 통신사행에 따른 실보(失報)에도 불구하고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의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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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노력 이 지속되었으며, 전쟁 상대국이었던 조선과 명의 문헌도 수집 정리 대상에 포함되었다. 근세 일본에서 임진왜란 문헌군이 형성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외국 문헌은 명나라의 「양조평양록」과 조선의 「징비록」이었으며, 그 밖 의 문헌들은 상대적으로 이용되는 비중이 낮았다. 이 논문은 이상과 같은 전 제에서, 김성일의 저작인 󰡔해사록󰡕과 「학봉선생문집」 그리고 김성일 그 자 신의 이미지가 근세 일본 특히 쓰시마 번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해 「조선통교대기」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학봉선생문집」 초간본에 포함된 「해사록」이 쓰시마로 넘어가서 이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쓰시 마번과 일본 본토에서 공히 김성일과 1590년 통신사행에 대해 부정적・경멸 적 인식이 통용되다가, 「징비록」의 일본 유통으로 인해 본토에서는 그 인식 이 일변하여 “충신” 김성일 상이 수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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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孤臺 鄭慶雲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이다. 고대는 󰡔孤臺日錄󰡕이라 는 비교적 많은 양의 일기를 남기고 있으나, 정작 그의 시문을 수록한 문집 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남긴 시문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시문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고대일록󰡕과 그의 주변의 인물들, 특히 사우관계에 있 던 사람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정보를 제법 얻을 수 있 다. 우선 󰡔고대일록󰡕을 보면 그가 생활 속에서 시문을 일상화하였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일부 시를 볼 수 있고, 특히 많은 문장을 접할 수 있다. 그리 고 시는 그의 스승인 鄭仁弘의 문집에 여러 작품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시는 스승의 학덕과 행실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가운데에 는 벗과 주고 받은 시, 벗을 만나 그 감회를 읊은 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 히 스승을 읊은 시는 현실(소인), 스승, 국왕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시의 구조에는 그의 시의 지향이 담겨 있다. 고대는 이러한 시들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였다. 산문은 알려진 것으로 感樹齋 朴汝樑에 대한 제문 1편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대일록󰡕에는 완전한 산문으로 전하는 것만도 11편이 있고, 산문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여러 편 남아 있다. 그는 산문을 지음에 후대에 남기려고 하 는 저술의식을 뚜렷이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문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보다도 더 강력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특히 절개를 지키는 일에 중점을 두어 의도적으로 글을 지었는데, 바 로 「牡丹側柏說」과 「硯子說」이 그것이다. 모란 측백은 모란과 측백을 의인 화하여 대화체를 통하여 모란의 화려함보다는 측백의 절조가 중시되어야 함 을 이야기하였고, 「연자설」은 벼루에 새겨진 소무의 일을 통하여 절조를 강 조하고 조정에 이런 사람이 등용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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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서부경남지역의 저명한 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조성가의 ..월고일기..를 통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핀 것이다. 서부경남지역은 관리들의 탐학과 혹심한 가뭄으로 자주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산청 덕산에서 백낙도 등의 동학교도들이 처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부터 호남지역의 지원을 받아 덕산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부터 곤명의 봉계와 진주의 마동 일대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비판적인 사족들을 체 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9월 초 섬진강을 건너온 순천, 광양의 영호도회소나 구례 등지를 거쳐 남원 등에서 온 호남지역 농민군과 함께 하동,진주, 사천, 곤양 등지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 입을 막아낸다는 명분하에 대규모로 집결하였기 때문에, 진주 병영이나 관아에 서도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군을 공 격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전투는 10월 14일 전개된 하동의 고성산성 전투 였다. 동학농민군은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기술 에 눌려 끝내 동학농민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이곳에 관군이 진격하 고 진주 우병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맞서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 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각 지역별로 요호(饒戶)를 대상으로 군무참모관을 뽑아 향회를 개최하고, 성첩 을 수리하고, 군기를 보수하였으며, 군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당시 사족들은 경상우병영의 대책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이 자금을 제공하고, 군무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마을에서는 오가작통제를 강화하고 산에 보를 축조하였다. 오가작통제는 경상감영의 지시로 실시되었는데, 각 洞에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 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 었다. 보는 진주 우병영의 지시로 단성이나 옥종면 일대의 산에 많이 축조되었다. 월횡리에서 축조한 사림산 보의 경우, 보의 축조에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 다. 마을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성문을 축조하고 보 안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리고 식수원과 연결하는 길을 내었다. 그러나 이 보는 땅 이 좁아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가작통이나 보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동학농민 군에 가담한 인물이 점차 늘었다. 월횡리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 동학농민군 조 직이 있었으며, 10월 초 일본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동학농민군 에 강제 징집되었다. 대부분 탈출하였으나,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을 따라 백곡, 수곡, 북평을 거쳐 이동하였으며, 고성산성 싸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죽거 나 피신하였으며, 월횡리에는 도인과 속인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