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권호리스트/논문검색
이 간행물 논문 검색

권호

제39권 (2013년 9월) 8

1.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의 내용 및 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 남명의 인간관계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는 인간관계,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간관계, 마음과 행동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남명의 인간관계 실천이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덕의 함양과 근본을 갖춘 지식, 그리고 사회ᆞ교육적 가치의 강조이며, 이를 생활에서 실천화하는 방법을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2.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경남 하동 지역 유학자의 세기별 분포는 15세기 1명, 16세기 2명, 17세기 7명, 18세기 2명, 19세기 16명, 20세기 초 1명이다. 가장 비율이 높은 시기가 19세기이며, 그 다음이 17세기이다. 경남 지역은 南冥 曺植의 학문을 계승한 南冥學派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남명학파의 성쇠에 따라 하동 지역의 유학자도 비례하여 산출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구역별 분포는 총 29명의 유학자 가운데 옥종면이 21명으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북천면이 6명, 금남면과 양보면이 각각 1명이다. 이 가운데 옥종면 안계리 출신의 유학자가 11명으로, 옥종면 유학자의 절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하며, 전체 하동군 유학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해 볼 때, 하동 유학의 중심지는 옥종면이며, 그 중에서도 안계리가 핵심 지역이라고 규명해 볼 수 있다.학맥 형성 양상을 살펴본다면, 남명학파 11명, 寒洲系列 4명, 蘆沙系列 5명, 星湖系列 3명, 尤庵系列 1명, 華西系列 1명, 기타 6명이 된다. 그러므로 하동 지역의 학파별 분포는 남명학파 및 南人 계열이 대다수 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노사계열의 문인이 많은 비중을 가진다. 하동 지역의 남명학 전승과 관련해서는 안계마을 출신의 晉陽河氏 학자들이 家學을 통해 계승한 사실을 거론할 수 있다. 그리고 河達弘, 鄭瑀贇, 趙性家, 崔琡民, 姜柄周, 鄭敦均 등의 학자들이 서로 다른 학맥과 당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명을 존숭하고 본받아 실천하려 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3.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陜川 三嘉에 있었던 龍巖書院 운영주체들의 성격과 활동을 고찰하였는데, 특히 인조반정 이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지향에 관해 주로 논의하였다. 또한 1609년에 공히 사액되었던 德川書院ᆞ新山書院 등 타 남명 제향 서원의 경우와 비교해 봄으로써,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의 특징을 좀더 부각시키고자 하였다.용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경 재건되었는데, 이때 관여한 인물 다수가 鄭仁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용암서원의 원장ᆞ원임을 맡은 인물로는 정인홍, 文景虎, 李屹, 鄭蘊, 林眞怤, 朴絪 등이 있는데, 정온ᆞ임진부ᆞ박인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용암서원 내에서 남명 선양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덕천ᆞ신산서원의 추가 배양 논의에서도 남명 위상의 제고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임진부는 용암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남명 정신을 강조했고, 박인은 남명 관련 기록물의 정리ㆍ편집을 맡았는데, 이 일들을 정온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였다. 정온은 趙任道에게 신산서원 원장을 맡길 만큼 용암서원ㆍ신산서원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조임도는 용암서원 측의 입장을 참고하며 신산서원 내의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한편 덕천서원에서는 1635년 무렵 覺齋 河沆을 배향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여기서 사액서원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배향을 강행하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온 등 용암서원 운영주체 측에서는 사액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하항 외에 鄭逑 등 남명 高弟를 함께 배향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추락해가는 남명의 위상을 제고할 방법을 모색한 것인데, 정구에게서 남명의 영향을 지우려는 집단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인홍이 생전에 추구했던 남명 선양 정신의 잔존이라 할만하다. 신산서원에서 金宇顒만을 제향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들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은 정구도 함께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다.인조반정 이후 덕천서원ᆞ신산서원에서는 서원 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집단끼리 논의하고 충돌함으로써, 반정 이후 바뀐 환경에서 적응할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면, 용암서원은 변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인홍 계열의 영향력이 컸던 곳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에도 한동안은 정인홍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학의 학습과 교육, 정리와 출판 사업 등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회봉과 동파는 몇 백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和陶詩’라는 하나의 시형식으로 遭遇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짓게 되었고, 특히 회봉은 소동파에게도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는데 이도 화도시를 짓는 하나의 動因이 되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고 ‘화도시’로 만난 이들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加減 없이 담아내었다. 그러므로 ‘화도시’는 그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하였다. 회봉은 화도시에서 유학자로의 자세를 견지하고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시를 지었으며, 亡國의 좌절과 아픔을 화도시에 담아 내었다. 유학자로서 이상적인 모습을 시에 나타내려한 회봉의 화도시에는 溫柔敦厚함이 담겨있다. 그리고 동파는 현실을 추구하는 유자로의 모습과 은일의 삶을 추구하는 은자로서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며 시대의 불우에 대한 좌절을 화도시에 담아내면서도 아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 회봉은 동파와 유사하거나 또는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화도시’를 통해 동파와 交感하였다. 동파와 비교가 가능한 회봉의 화도시는 우리 한문학의 범위를 해방후까지 연장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근대한문학의 범주를 공고히 하게 한다.
5.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목적은 ‘우리는 왜 지리산을 찾는가,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답을 찾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써 조선조 유자들에게 지리산이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첫째, 지리산이 大山으로써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조선조 유자들에게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 국토의 중앙에 우뚝 솟은 웅장한 산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기에 직접 오르고 싶은 산이었다는 사실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항상 ‘가장’은 ‘최고’의 의미로 인식되곤 한다.두 번째로 지리산은 승경을 지닌 빼어난 산으로 인식되었다. 논의의 집중을 위하여 청학동을 제외하고 천왕봉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음에도 지리산은 빼어난 승경을 지닌 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람록과 유람시에 묘사된 천왕봉은 승경을 지닌 명산이다. 실제보다 훨씬 아름다운 산으로 관념 속에서 미적 아름다움은 완성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 획득한 미감이기에 구체적인 미적 표현이 약화되어 나타난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세 번째로 지리산은 탈속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천왕봉에 오르는 일은 세상 밖으로의 입문이며, 천왕봉은 종종 천계의 입구로 인식되었다. 천왕봉은 하늘문이지만 거기까지였다. 즉, 천왕봉은 세상 밖이지만 천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청학동에서 나타나는 선계로의 몰입이 천왕봉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탈속의 공간이지, 선계로는 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천왕봉의 장소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천왕봉은 탈속의 공간으로써 세상의 짐이 내려지는 공간이었다.
6.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초기 사림의 종사이다.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문학과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통하여 인륜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고, 그 문하에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훌륭한 후학들을 양성해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도학 이념에 입각한 정치 교화와 교육의 실천 모범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던 10년 동안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봉직하였던 5년 동안의 시문 가운데 정사를 임하는 태도와, 풍교의 대책과 강학 및 유상의 정서를 추적하여, 점필재의 평소 학문 사상과 정치 교육의 성과가 조선전기 도학의 선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수시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물산, 홍수의 재해, 조세와 부역 등, 民生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고, 함양읍성 나각을 보수하고 다원을 경영하는 등 조선초기 지방관원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을 주민의 편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는 또한 향교를 보수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음 향사 양로의 의식을 거행하여 인륜 도덕으로 풍속을 순화한다는 風敎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많은 문생들을 받아들이고, 그 문생들과 고을 주변의 산천을 다니면서 수시로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도학과 심학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점필재는 함양군에서 시행한 시정과 풍교 강학의 규범은 이 시대 학자들에게 도학 정치 실현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조정의 관료나 재야의 문인 학자로서 그의 모범과 신념을 널리 확산함으로써 한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런 점에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 사상과 경륜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조선조 도학의 본류를 형성하는 전환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을 언급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 중에 ‘南冥學派의 본고장’, ‘1862년 농민항쟁의 선구적 지역’, ‘1894년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전쟁의 본거지’라는 표현들이 있다. 이런 상징적 표현은 진주의 강역이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변해왔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려시대에 진주는 경상도 界首官의 하나로서 경남 서부지역을 통할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여러 고을을 통할하였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邑과 鄕ᆞ所ᆞ部曲 등의 任內를 고을 예하에 두고 있었다. 예종대 이후 진주목의 일부 속읍들이 독립해 나가기는 했지만, 昆明縣 등의 여러 임내가 조선왕조 초기까지 남아 있었다.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진주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강역이 축소된다. 1419년 진주의 속현 중 하나인 곤명현이 분리되고, 이후 진주 예하의 金陽部曲을 흡수하여 昆陽郡으로 독립해 나갔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들어와서도 섬진강 일대의 관방을 강화하면서 진주목의 적량ᆞ진답ᆞ화개현ᆞ악양리가 하동으로 이속되었다. 을사조약 직후인 1906년 일제는 합리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때 진주의 강역은 대폭 축소된다. 즉 진주의 75면 중 25개 면이 산청ᆞ하동ᆞ고성ᆞ사천ᆞ남해ᆞ함안 등 주변지역으로 이속된다. 또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에는 전국의 군과 면ᆞ리를 통폐합하여 군과 면의 수를 크게 줄이는데, 이때에도 진주군의 영역 중 일부는 사천군으로 이속되었고, 1906년 진주에서 함안군으로 이속되었던 지역이 다시 진주로 편입된다. 이처럼 진주의 강역은 여러 시기에 걸쳐 점차 축소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8.
2013.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92년 정조는『奎章全韻』을 편찬한 후 각신 및 초계문신, 검서관을 포함한 9명의 신하들에게 문자에 관한 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文字策文 9편이 제출되었으며 그 중 현재 남아있는 글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윤행임, 서영보의 대책이다. 문자책문의 집필배경이 된『규장전운』의 편집 방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음과 조선음을 구별하여 각각의 규범음을 밝히는 것, 둘째, 俗音을 제거하고 압운 체계를 개정해 전아한 문사 창작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 셋째, 古音의 확정을 통해 古經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6편의 문자책문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문제의식들은 위 세 가지 목적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상이한 견해들이 이 시기 문자학의 논점들을 형성하고 있다.첫 번째 논점은 글자와 소리 혹은 말의 관계 문제이다. 박제가는 문자에서 聲의 요소가 중요함을 일관되게 서술하였으나 중국어 사용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행임은 글자와 소리가 일치하는 중국어를 사용하여 중화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유득공은 천하만국에 각자의 글자가 있다는 논의를 통해 기존의 華夷觀을 뛰어넘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논점은 문자학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이서구는 이 시기 六經의 이해를 위해 문자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달리 이덕무는 실제적인 名物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에 문자학의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세 번째 논점은 字形의 변천과 異體字 문제이다. 유득공과 이서구, 이덕무는 모두 俗字, 訛字, 조선식 한자 등의 사용을 일절 금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덕무는 시대에 따른 자형의 변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였는데, 이와 달리 서영보는 자형의 변천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인지 서영보는 이체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국가 문서에 글자를 잘못 쓰는 일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만 하였다.이상에서 분석한 문제의식들은 18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문자학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각각의 의의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이 논점들이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는지, 나아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문자책문을 작성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학파나 가문, 당파 등에 따라 언어문자관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 역시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