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권호리스트/논문검색
이 간행물 논문 검색

권호

제38권 (2013년 6월) 6

1.
201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咸安을 본관으로 하여 함안에 세거해 온 咸安趙氏는, 趙鼎, 趙丹碩으로 이어지는 上祖가 있지만, 文獻에 의한 고증이 불가능하고, 또 함안과 관계된 기록을 찾기 어렵다. 高麗末 琴隱 趙悅에 이르러서야 함안에 정착한 확실한 기록이 있다. 琴隱으로부터 치더라도 이미 60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을 한 곳에서 살아왔다. 중간에 晋州 靑松 등지로 移居한 일파도 있지만, 대대로 함안에서 최대의 성씨로서 집성촌을 이루고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살아 왔다. 琴隱의 高麗王朝에 대한 節義를 지켰고, 漁溪가 生六臣으로서 志節을 지킨 이래로 門聲이 더욱 널리 퍼졌다. 丁酉再亂 때 大笑軒이 순절함에 따라 명문이 되었다. 대소헌의 學問과 忠節은 琴隱 漁溪로 이어지는 가문의 전통과 南冥이나 남명의 제자들로부터 받은 실천위주의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동안 9명의 문과급제자, 13명의 忠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내는 등 학문과 충절로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大笑軒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 데는, 오랜 기간 咸安趙氏 가문의 선조들의 온축된 傳統과 기운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대소헌이 배출됨으로 해서 咸安趙氏 가문은 전국 어느 가문에도 손색이 없는 높은 위상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201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丁酉再亂 때 黃石山城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당시 그 황석산성에서는 대소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 大笑軒과 存齋 郭䞭(1551-1597)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縣監이란 벼슬아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기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이 황석산성에서 殉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이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학문과 행실을 겸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소헌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대소헌은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데다, 鄭斗·盧禛·曺植 등 당대 경상우도에서 가장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하였고, 이러한 학문 풍토에서 함께 강학했던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나, 여기서 학문이 무르익을 수 있었다. 둘째, 「學校策」이나 「倡義文」 등을 통해서, 대소헌의 학문이 社會的 實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曺植의 학문과 깊은 영향관계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셋째, 대소헌은 대범하고 호방한 삶의 자세를 지녔는데, 학문에 의해 ‘大節이 不踰閑’할 수 있었기에 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삶의 자세와 학문의 역량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201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忠毅公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남명 선생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招諭使 金誠一(1538~1593)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고, 1597년 丁酉再亂때 안음현감 郭준(1551~1597)과 함양 黃石山城에서 왜장 加蕂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소헌은 어릴 때부터 家學 또는 지역의 先輩 학자들로부터 익힌 공부를 비롯해 본격적으로 남명에게서 배운 학문의 지결을 몸소 실천하였다. 곧 義理精神을 근간으로 한 그의 학문적 바탕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 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대소헌은 평소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선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소 배운 대로 실행하여 하늘의 떳떳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한 일로 삼아 명예만 얻으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고 문무를 겸비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라고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함으로서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201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大笑軒 趙宗道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문학작품 특히 시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대소헌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安奇道察訪에 천거되었고, 그곳에 있으면서 退溪 李滉의 제자인 柳成)·金誠一·權好文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 黃石山城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호에 드러난 바와 같이 매우 호방하였으며, 성품과 행실이 고상하고 우뚝하였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어질게 대하고, 벗들에게는 진심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과 행실은 문학에 그대로 나타났는데, 문학에 대하여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學校」라는 일종의 策文에서, 학교는 문학을 詞章을 외워 科擧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선현의 덕을 함양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문학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매우 뛰어났으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갖는 가치는 우선 문학작품은 그 사람의 인물됨됨이를 반영한다는 매우 오래된 생각을 바탕으로 발현이 되고 있다. 이는 공자와 맹자에게서 비롯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有德者 ,必有言]’이나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르면 되겠는가?[誦其詩, 讀其文, 不知其人, 可乎?]’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사람됨됨이[爲人]와 시를 짓는 것[爲詩] 혹은 글을 짓는 것[爲文]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람됨됨이와 시를 짓는 한 것은 한 가지’라는 ‘爲人爲詩一道論’에 근거하여 선현들은 대소헌의 시가 그 인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훌륭하였음을 말하였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오래된 논점의 하나는 ‘고기 한 점만 맛보면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는 ‘一臠全鼎可知論’이다. 이는 한 점의 저민 고기로 한 솥의 국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한 국자의 맛으로 전체 솥의 맛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쓰이고 있다. 大笑軒 趙宗道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이 진실로 ‘일련전정가지론’에 부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岳堅山城에서 지은 시와 玄蘇에게 주는 시는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밖의 작품들도 여러 선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性情과 氣格을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5.
201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임진년(1592) 오월 진주성 촉석루에서 김성일, 조종도, 이로(혹은 곽재우)가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건과 관련되어 지어진 시에 관해 언급한 여러 기록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삼장사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글로는 「從遊諸賢錄」(성여신 찬), 「鶴峯言行錄」(최현 찬), 「矗石樓詩懸板」(오숙 찬), 「大笑軒事蹟畧閭表碑」(찬자 미상), 「矗石樓詩註」(김응조 찬), 「大笑軒行狀」(한몽삼 찬), 「請祠祀三壯士疏」(하세응 찬), 「鶴峯年譜」(이재 찬), 「松巖李先生行狀」(조선적 찬) 정도가 『용사일기』가 印刊되기 이전의 기록으로 살펴진다. 이들 자료에는 대부분 삼장사시의 지은이를 김성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시의 작자를 다른 사람인 것으로 기술한 경우도 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시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 1762년 간행된 이로의 『용사일기』는 동일 저자가 지은 「문수지」와는 달리 삼장사시의 작자가 김성일이고, 그와 함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을 조종도와 이로로 기술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 사후 백수십 년이 지난 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에는 삼장사 사당의 건립과 관련해서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문중 간에 얽혀 있었다. 인간된 『용사일기』는 이로가 찬한 원래의 초본에 적지않은 첨삭이 가해졌기에 출간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으나, 『용사일기』의 출간에 뒤이어 한몽삼의 글이 수록된 『대소헌문집』이 간행되어 이-삼장사설을 뒷받침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현풍 곽문에서는 『망우집』을 중간하여 곽-삼장사설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후 양측의 주장이 심각히 대립하였다. 『망우집』의 발간으로 점화된 삼장사 시비에 관여하여 가장 정밀한 수준에서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적으로 밝힌 이는 대산 이상정이었다. 이상정이 찬한 『촉석루시사적』은 학봉이 초유사로 함양에 도임한 때로부터 이후 진주성에서 촉석루시를 짓기까지 『용사일기』의 기록을 위주로 김성일, 조종도, 이로, 곽재우 4인의 행적을 발췌해서 정리하고, 이에 대해 이상정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한 내용이다. 이상정은 무엇보다도 촉석루시의 작성 시점이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온 직후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왔을 때 곽재우는 이미 진주를 떠나 의령으로 돌아와 있었으며, 대신에 이로가 진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촉석루시사적』의 간행 이후 촉석루 삼장사에 관해서는 이-삼장사설이 통설의 지위를 차지한 듯이 보인다. 이후에도 삼장사 사적에 관한 이견(異見)이 간간히 표출되었으나 마침내 근년에 진주성에 삼장사 비를 세우면서 이-삼장사설의 내용이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의 비면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촉석루 삼장사시는 김성일이 지었고, 당시 시를 짓는 현장에는 조종도와 이로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실효적 사실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6.
201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의 의병 봉기에 크게 기여하고, 정유재란을 당하여 고립된 황석산성에서 전직 군수로서의 직분을 지켜 순절하였던 대소헌 조종도가 한국의 인물사 내지 문화사에 있어서 가지는 의의를 점검하고, 역사 문화 인물로서 대소헌 조종도의 위상을 역대 문헌에 수록된 그 인물 형상의 특징을 통하여 개괄하고자 집필되었다. 본론에서는 먼저 대소헌과 관련된 문헌을 사망 직후의 애도를 표한 輓章과 祭文, 친지나 가문 기록으로서의 碑誌와 傳狀, 국가나 사림의 공식 추모 문자로서의 褒贈 追崇의 문자 등 세 층위로 나누어, 해당 인물에 대한 사적 애도와 공적 추모의 전개 양상을 점검하고, 다음으로 이들 문헌에 빈번하게 나타내는 인물 형상의 특징적인 징표를 大笑子와 烈丈夫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하고, 그 인물 형상의 성립 정착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이 두가지 징표가 가지는 인물사적 문화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추론하였다. 결론에서는 대소헌 조종도가 남명 조식의 문도로서 학문을 성취하여 통달한 식견과 활달한 처신 및 왜란 도중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헌신하고 황석산성에서 대의를 지켜 죽음을 감수한 행적으로 인하여, 그와 교유한 당대의 지인들은 물론 후대 사대부 지식인으로부터 대대로 추숭되고, 조정과 사림으로부터 누차 포증을 받아,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유가 의리와 신념에 충실하여 죽음을 사양치 않은 인물 전형의 하나로 각인되었다고 논평하였다.